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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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 제사를 지내는 것, 기독교인이 타로점이나 일반 점, 오늘의 운세 보는 것, 아니면 이루마, 유키구라모토같은 뉴에이지 음악에 빠져있는 것. 이런 것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기독교인들이 가족 잘되게 하기 위해서 새벽예배 빠지지 않고 나가는 것,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따라한다며 하나님께 1000번 헌금을 바치는 것. 몸 아픈거 치유해주거나 예언해주는 교회에 가는 것. 이런 것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뭐 교회는 다니니까 그냥 넘어가줄수 있는 것 아닌까? 이렇게 생각하시나요? 이런 모든 모습들이 종교 혼합주의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건강에 안 좋은 밥이 잡곡밥입니다.
현재 골로새 교회가 이러한 세상 풍조들과 종교 혼합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현재 감옥에 갇혀 골로새 교회를 직접 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회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골로새서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런 세상 풍조들과 종교 혼합주의의 유혹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삶의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주님이라는 단어는 영어로는 ‘Lord’라고 부르지만, 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이라고 하면 느낌이 잘 안옵니다. 우리는 왕이 어떤 존재인지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주인과 종의 관계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분만 바라보고 그 분에게 순종하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개를 보면 주인에게 복종합니다. 주인을 바라보고 주인을 사랑합니다. 그렇다고 개가 주인의 노예는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인 것이죠. 그런데 개가 주인을 몰라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거나 따라간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도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절 마지막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다면, 즉 주님과의 관계가 맺어졌다면 이제는 그 분 안에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또다른 예를 들자면, 결혼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혼이란 가장 친밀한 관계를 새롭게 맺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관계를 맺고나면 그 전과 후가 달라져야 합니다. 결혼한 후에도 총각때처럼 살아간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죠.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압축해서 설명한 것이 ‘그 분 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살아가라’는 것은 마치 남편과 아내의 관계처럼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몇가지 순종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말씀에 따라 내 삶의 방식과 태도들을 바꿔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전까지는 내 마음대로 살아갔지만 이제부터는 주인의 마음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갑자기 옛날 사고방식과 습관들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7절입니다.
7절에는 4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고, 굳게 하고,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앞에 나온 동사 두가지가 원인이라면 뒤에 나온 두가지가 결과입니다. 뿌리박고, 세우심을 입으면 믿음을 굳게 하며, 감사가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사들을 보면 4가지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먼저 ‘뿌리를 박으라’는 말은 나무 이미지입니다. 뿌리를 깊이 내린 나무가 쉽게 쓰러지지 않는 법입니다. 예수님께 깊이 뿌리내렸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양분을 공급받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뿌리박힌 나무가 성장하듯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사람은 믿음이 성장합니다. ‘세우심을 입는다’는 것은 건물이 견고하게 세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부실공사한 건물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품을 계속해서 따라 살아가야 우리의 신앙이 튼튼히 세워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께 잘 뿌리내리고, 예수님으로 잘 세워질 때 우리의 믿음이 굳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굳건하다’는 것은 유혹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일관성있는 삶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에는 마치 컵에 물이 넘치듯 주님을 향한 감사로 마음이 넘쳐나게 됩니다. 이런 삶이 바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삶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어떤 유혹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8절입니다. ‘누가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노획물로 삼을까 조심하십시오.’ 이런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9절에서 그것을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라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성도들을 흔들려고 하는 철학을 헛된 속임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을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정확히 알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당시 골로새 성도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들리는 그런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보다 더 매력적으로 들렸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뒷부분에 나오는 말씀으로 짐작해보면 그것은 극단적 신비주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특별한 체험을 위해서는 금욕주의를 요구하고 어떤 종교적 규율을 지켜야 한다고 강요했던 것 같습니다. 특정한 날을 준수하라고 한다던지, 어떤 음식을 가려먹어야 한다든지, 천사를 숭배한다든지 이런 일을 통해 영적 비밀이나 지혜를 더 알게 된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인간이 만든 전통이나 세상의 유치한 원리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여러가지 규칙과 규율을 만들어서 그것만 지키면 영적 비밀이나 삶의 지혜를 얻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열심히 하고, 제사 많이 지내면 어떤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한 지식에 비하면 이것들은 저급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자들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들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을 자신들의 노획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노획물이란 ‘포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유혹해서 하나님 백성을 납치해가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사탕발림에 놀아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도 저번 추석에 엄마 산소에 갔는데 좀 특이한 경험을 했습니다. 저와 여동생, 셋째 누나는 크리스천이니까 엄마 산소 앞에서 기도만 했거든요. 그런데 둘째 누나랑 매형은 와서 엄마 좋아하는 것 음식 싸오고, 술도 가져와서 산소에 던져주고 절하고 그러더라구요. 이것을 보면서 우리 기독교는 의식이 너무 간단한가? 뭔가 더 있어야 하나? 이런 생각들이 잠깐 들었습니다.
이처럼 미신이나 특정 종교의 열심에 비하면 그리스도인들의 겉모습은 보잘것 없어 보일때가 있습니다. 이슬람교는 하루에 다섯번 메카를 향해 절하고, 라마단 기간에는 금식하잖아요. 이런 거보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너무 쉬워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상들은 결국 우리를 그들의 노획물로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우리를 떼어놓고 자신들의 영역으로 우리 영혼을 포로로 끌고갈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왜 그들에게 속으면 안되는 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9.10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그 분 안에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이십니다.’
그런 종교적 규칙들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 안에는 신성, 즉 어떤 신비한 어떤 것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안에 모든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뭐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럴듯해 보여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앞서 예로든 제사나 종교는 결국 헛된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대상일 뿐더러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자기 열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모든 충만한 신성이 있기에 뭔가 부족한 것처럼 느끼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 역시 그런 것들을 다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뭔가 또다른 차원에 있다며 자신이 신령하다고 주장하는 모든 통치자, 권세자들 위에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영적 존재들에게 머리 숙여 예배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적 세계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또다시 우리가 그런 거짓 가르침에 속아서는 안되는 이유를 재차 설명합니다. 그 이유를 할례와 침례를 통해 설명합니다. 먼저 할례를 비유로 설명합니다. 할례란 생식기의 표피를 일부 제거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포경수술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가입원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그렇게 손으로 행하는 할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란 번데기가 허물벗듯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세상의 이상한 가르침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인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침례를 통해 설명합니다. 12절입니다. 침례할 때 우리가 물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의 죄된 자아를 못 박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았던 삶을 이제 물 속에 수장시키는 것입니다. ‘예전의 나는 죽었어.’ 이런 의미입니다. 반면 물 속에서 나올 때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나도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할례나 침례가 비슷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또다시 노예해방이라는 측면에서 다시 설명합니다. 14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버리셨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이집트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구원받았는 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죄의 빚을 졌기 때문에 사탄의 나라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사채쓰고 빚 못갚으면 노예각서 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우리의 빚문서를 십자가에 못박아서 제거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의 나라, 어둠의 나라에서 우리를 빛의 나라, 하나님 나라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왜 바울은 이렇게 여러가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요? 새 사람은 새로운 질서 아래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전통이나 거짓 가르침에 속아서 그것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정권이 바뀌면 우리가 따라야 할 새로운 법과 질서들이 생겨나듯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법과 질서 아래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모습들이 마치 예수님이 사탄의 나라를 무너뜨린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5절입니다.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셔서, 뭇 사람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개선행진을 합니다. 그 때 적군의 수장들을 포로로 끌고와 사람들의 구경거리를 만듭니다. 15절은 그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C.S. 루이스의 작품을 영화화한 ‘나니아 연대기’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는 두 나라가 등장합니다. 사자가 다스리는 나라와 마녀가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사자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마녀는 사탄을 상징합니다. 결국 사자의 나라가 마녀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승리합니다. 더이상 마녀는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그 나라에는 봄이 찾아옵니다. 그 모습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우리에게 정말로 예수님이 주님이 되셨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 질문들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의 눈과 귀를 잡아당기는 많은 유혹들이 있습니다. 종교혼합주의가 은밀하게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습니다. 그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면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또는 서점에 가면 각종 개똥철학을 소개하는 책들이 넘쳐납니다. 돈버는 법, 좋은 관계맺는 법, 행복하게 사는 법, 고수가 되는 법 등 수많은 자기개발서들이 우리의 마음을 현혹시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 예수님 잘 믿는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은밀하게 들어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모든 해답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오늘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내 삶에 예수님 한분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게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