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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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장 10절 - 26절 말씀입니다.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설교 제목 : 창조 타락 구속 시리즈 8 “두 도시의 이야기”
서론
여러분이 어릴 때 가지고 있었던 습관이 있었나요? 전도사님은 어릴 때 동생이랑 내기를 해서 이길 때마다 하는게 있어요. 이겼다 또 이겼다. 이겼다 또 이겼다. 이렇게 동생을 약올렸죠. 전도사님이 이걸 누구에게서 보고 배웠을까요? 아빠가 엄마를 놀리는 모습을 보고 따라했던 거죠.
우리가 아주 어릴 때 가지는 습관은 우리의 선택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을 모방할 뿐입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부모님에게서 그것을 배우죠. 우리가 처음 언어를 배우는 것을 모국어라고 합니다. 영어에서는 mother tongue 마더텅이라고 하죠. 왜 이렇게 부르나요? 부모님의 말을 배우기 때문이에요. 엄마가 쓰는 언어를 따라하면서, 모방하면서 언어를 배웁니다. 만약에 부모님이 사투리를 하신다면 사투리를 배울거에요. 부모님께서 쓰시는 표현들을 배우게 됩니다.
처음에는 가족에게서 모든 것을 배웁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다른 세계들을 만납니다. 어린이집, 선생님, 친구들, 영상. 결국 문화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문화 속에서 모방합니다. 요즘 청소년부 우리 친구들을 만나면 듣는 얘기들이 있어요. 잼민이, 어쩔TV, ~라고 할 뻔, 킹 받네 전도사님이 맨날 만날 때마다 하지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얘기한다고 안 할까요? 그 말들은 이미 우리의 입술에 배어 있기 때문에 쉽게 멈춰지지 않습니다. 유튜브나 방송에서 하는 말투를 보고 따라하는 문화에서 우리 또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내버려두면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됩니다. 우리는 스펀지와 같아서 주변 문화를 빨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문화를 전파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문화 속에 있어야 하는가? 모든 문화는 올바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4주동안 살펴보는 ‘타락’이 문화 안에서도 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타락이 바꾸어 놓은 ‘문화’를 살펴볼 예정입니다. 또한 우리는 어떤 문화 가운데 있어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우리가 창조 - 타락 - 구속의 개념으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타락은 무엇이었죠?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올라가는 것이었죠. 타락 첫째 날은 죄의 시작을 얘기했습니다. 뱀의 거짓말로 인해 시작되었죠. 타락 둘째 날은 죄의 책임 회피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핑계대며, 남탓하고 하나님을 탓하였죠. 타락 셋째 날은 죄의 결과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남들과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끼거나, 좌절감을 느끼었죠. 여기서 타락은 죄를 낳았고, 죄는 파괴를 만들었죠. 그런데 지금까지는 아담과 하와의 죄, 가인의 죄, 한 사람의 죄를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죄의 파괴는 한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한 가족이 타락하고, 한 민족이 타락하고, 한 도시가 타락하여, 결국 문화의 타락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 가인이 하나님에게 2가지를 받습니다. 첫번째, 가인에게 하나님은 저주를 하십니다. “12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은 이제 유리하는 자, 몸을 둘 곳 없이 계속해서 돌아다니게 될 것을 얘기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저주하시는게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질문하셨던 것처럼,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가인은 무엇이라고 얘기합니까? 너무 가혹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다른 하나를 주십니다.
두번째, 가인에게 하나님의 표를 주십니다. 이 표는 무엇이냐? 어떻게 생긴 표인지 알 수 없어요. 그 표로 인해 가인은 죽음을 피하게 된 것이죠. 가인은 그 표를 보며, 2가지를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죄인이다. 하나님 앞에서 아벨을 죽인 죄인이다!! 라는 사실이죠.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이죠.
그렇게 가인은 유리하며, 정처없이 떠돌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자신의 아내와의 관계 속에서 에녹이라는 자녀가 태어난 것이죠. 그리고 자신의 자녀, 에녹의 이름으로 성을 쌓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받은 저주가 무엇이었죠? 유리하며 살아야 하는데, 가인은 지금 성을 쌓았습니다. 이 성을 쌓은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불순종하겠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유리하며 사는게 아니라, 이제는 이 성에서 내 힘으로 살겠다는 선포입니다. 하나님께 정면 승부를 내거는 것이죠. 그런데 가인이 지금 성을 무엇을 위해 쌓았습니까? 자신의 자녀, 에녹을 위해서 성을 쌓았던 것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름을 내고 싶어합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심지어 창세기 11장 4절을 보면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바벨론을 지을 때도, 우리가 이름을 내는게 목표였던 것이죠. 이것이 에녹성이 쌓아진 원리, 목적입니다.
그렇기에 성의 목적이 이름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의 문화는 어떤 문화입니까? 자신을 드러내는 문화입니다. 그 가인의 후손 중에는 새로운 것들이 많이 시작되었습니다. 농경이 시작되고, 음악이 시작되고, 제품을 만드는 것도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이 그곳에는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내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아가다가, 가인의 성 안에서 가인의 6대손 라멕이 등장합니다. 그 라멕이 범죄를 저지릅니다.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였나요? 자신의 상처로 말미암아 사람을 죽였습니다. 생명을 잃은게 아닌데, 상처를 무엇으로 갚았나요? 생명으로 갚았습니다. 그가 행동한 이유는 자신의 상처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범죄한 사실을 너무나도 당당하게 자랑합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가인보다 자신의 죄가 큼을 자랑합니다.
이 문화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문화입니다. 그리고 어떤 문화에요? 자신의 상처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죽음에 다다르게 하는 문화입니다. 즉 폭력의 문화, 죽음의 문화입니다. 누군가 나를 공격하면 무조건 갚아줘야만 합니다. 용서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 폭력의 문화, 죽음의 문화 앞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영화, 드라마, 만화, 소설을 상상하십쇼. 어떤 공통점이 있나요? 잔잔한 영화, 아무런 반전도 없이 잔잔한 드라마를 좋아합니까? 제가 제일 기억에 남는 영화를 뽑으라면 워낭소리에요. 거기에 나오는건 소와 풀 밖에 없었어요. 아무리 예술성이 뛰어나도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즐거움이에요. 재미 없으면 듣지 않고요.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고 있어도 재미 없으면,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재미를 위해서 영화와 드라마는 무엇을 선택할 것이가. 선정성과 폭력성을 담아냅니다. 사람들이 보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극적인 장면을 넣습니다. 사람들이 벗고 있는 장면을 넣기도 하고, 사람들이 서로를 때리고 피가 튀기는 장면을 넣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그 장면에 열광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하겠습니다. 이 문화는 어떤 문화입니까? 우리를 살리는 문화입니까? 우리를 죽이는 문화입니까?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폭력성이 넘쳐서 우리의 눈과 귀를 더럽힙니다. 죽음의 문화, 폭력의 문화입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문화가 등장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범죄함으로 죽음을 바로 맛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인 아벨이 죽었죠. 그리고 심지어 가인이 범죄함으로 가인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을 뼈져리게 느낍니다. 하나님을 떠남이 얼마나 큰 죄인지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25절에 새로운 아들을 낳게 됩니다.
25절에 아들이 태어나는 장면을 아담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 아들이 태어났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의 원인이시라는 것이죠.
가인의 후손들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아담의 후손은 무엇을 불렀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가인의 문화에는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풍요로움이 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아담의 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확실히 계셨습니다.
근데 확실히 해야할 것은 가인이 죄인이어서, 하나님이 없는 문화를 만들었습니까? 아담은 죄가 없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까? 아니에요!! 둘 다 동시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끝까지 도전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 안에서 해석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문화를 돌아봅시다. 우리가 놓여진 문화는 타락했기에 그 안에서 왜곡된 가치를 따라가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모방하며, 습관을 가지게 됩니다. 그 근본적인 가치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행동하냐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내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우리 문화는 끊임없이 즐거움을 찾아가라고 할거에요. 재밌는게 최고다. 재미없으면 듣지 마! 설교도 재미없으면, 예배도 재미없으면 드리지 마! 그렇게 얘기하는 문화를 향해 얘기합시다. 하나님이 이곳에 함께 계셔,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예배 드리게 하셨다.
그렇게 우리를 통해 문화가 바뀌길 소망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던 이들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노래를 부르게 하옵소서.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공부하던 이들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공부하게 하옵소서. 자신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 공격하고 폭력을 행하던 사람들이 용서하게 하옵소서. 나의 벌이 77배라고 외쳤던 라멕들이, 다른 이들의 죄를 77번까지 용서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