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8새벽] 능력이 나타나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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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68 주 예수여 은혜를 내려주사
본문 마 17:14-20
사랑이 충만하신 아버지, 우리를 주의 몸된 교회로 불러주시고, 주의 파로 값주고 사신 이 양문교회를 함께 세워갈 수 있도록 은혜베플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힘써 주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섬길 수 있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친히 공급하여 주시고, 주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친히 먹이시고 인도하여 주셔서 환란에서 벗어나 근심없이 주를 섬기게 하여 주옵소서.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기독교만큼이나 ‘믿음’을 많이 이야기하는 종교가 또 있을까 싶다. 어려운 일을 만나서 힘들어할 때는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기도 하고,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봉사와 헌신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성경 속에서도 많은 ‘믿음’에 대한, 믿음과 관련된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신앙여정은 삼위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바르게 믿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기독교에서 자주 언급하는 것이 믿음이고, 이 믿음이 그토록 중요할진대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느냐, 그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고, 그곳에서 세 제자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후에 예수님과 세 제자는 산에서 내려와 다른 제자들이 속해있던 무리들과 합류하게 된다. 그런데 이 무리들은 간질병을 앓던 소년의 치유에 관한 논쟁 중이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변화산에 오르시고 하루가 지난 후에 내려오셨음을 기록하고,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과 3명의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큰 무리가 남은 제자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음을 기록한다. 아마도 변론의 주제는 환자 아버지의 증언처럼 간질병 걸린 소년을 고치지 못한 남은 제자들의 무능함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과 세 제자들이 남은 제자들과 합류하기 위하여 내려올 때, 온 무리가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고 소년의 아버지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15절처럼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아뢴다. 예수님과 세 제자가 산에 있을 때 소년의 아버지는 남아있던 제자들에게 도움을 구했던 것 같다. 그는 치유하시는 예수의 능력을 제자들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능히 고치질 못했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실패했는가? 그들에게는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병을 낫게 하는 권능이 없어서일까? 물론 그들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으면서도 뭔가 달랐다. 분명 그들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마10:1 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모든 필요한 은사와 권능들을 제자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이미 제자들은 그 권능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지금 그들의 실패는 능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실패했을까?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때로 자연법칙을 거스르고 이적을 베푸실 때가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고, 모세를 들어 사용하셔서 바다를 갈라 마른 땅을 내시기도 하셨으며, 여호수아를 사용하셔서 하늘의 해를 멈추시기도 하셨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사들과 선지자들을 일으키셔서 수많은 이적들을 베푸시기도 했고, 예수님께서도 오병이어를 비롯한 많은 이적을 베푸시기도 했다. 그런데 제자들이 능히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비록 예수님께서 권능을 제자들에게 주셨음애도 그들이 실패한 이유는 단 두가지 뿐이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거나, 혹은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이적을 베푸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으리라는 이유 뿐이다.
이미 권능을 부여받았고, 어쩌면 수 차례 전도를 다니며 신유의 능력을 베풀었던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치는데 실패했다. 아마도 고치는데에 실패한 산 아래에 남아있던 제자들은 매우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많은 무리들에게 둘러 쌓인 채로 서기관들의 비난을 받으며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한채로 서 있었을 것이다. 이 때에 주님과 세 제자는 실망과 충격에 빠져있는 다른 제자 무리들에게 내려오시고, 이에 주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라고 모인 제자들 뿐만 아니라 이 세대를 책망하신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전혀 없는, 오늘날 표현으로 믿음이 1도 없는 완전한 불신앙을 의미하고, 패역하다는 것은 바른 것을 굽게 한다는 의미로 진리에서 벗어나 그릇된 삶에 계속해서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이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까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고, 하나님께로부터 이적을 베푸시는 권능을 부여받았음을 유대인들에게 계시해 오셨다. 그러나 주께서 베푸시는 수많은 이적을 보고서도 그들의 믿음은 분명하지 않았다. 그 주님께로부터 모든 질병을 치유하는 권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은 온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년을 치유하신 이후, 제자들은 자신들이 치유하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주님께 질문한다. 이에 주님은 ‘그들의 믿음이 작은 탓’이라고 답을 주신다. 여기서 ‘작은 믿음’이란 뒤에 이어서 말씀하시는 ‘겨자씨만도 못한 믿음’으로, 그 의미는 매우 제한되고 아주 보잘 것 없는, 부정적인 의미로서의 매우 작은 상태를 의미한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있긴 했다. 그들의 믿음은 겨자씨보다 작은 것으로서, 그 믿음이 능력으로 나타나는데에 실패한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자. 주님께서는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산을 옮긴다는 것은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리킬 때 사용하던 일종의 표현법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겨자씨만한 믿음’은 이와 같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이라는 존재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신비한 권능인가? 그 믿음 자체는 어떤 초자연적인 일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신비한 능력인가?
오늘날에도 이렇게 주장하는 수많은 은사주의자들이 존재한다. 그들에게 믿음이란 아말감 이빨을 금이빨로 바꾸는 것이고, 작은 돈을 하나님께 투자하여 수많은 이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믿음이란 독사에게 물려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독사가 자기 팔을 물게 하여 그 믿음을 증명하려다가 몇명이 죽는 사건도 일어났었다. 어떤 이들에게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 꿈과 목표를 이루어주시는 수단이라고 여기어 다른 우상들을 섬기는 것처럼 하나님께 정성을 쏟아내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자신이 뭔가를 노력해서 얻거나 이루는 것이며 이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과 공을 들인다. 그러나 여러분, 믿음은 내가 많이 가지려 하면 할수록 얻거나 이룰 수 있는 어떤 특정한 물질이 아니다. 뭔가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마술적인 수단도 아니다.
겨자씨 만한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사, 우리를 속량하신 것에 대한 믿음이 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이 자신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 산을 명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를 기도해야 하는가? 이 새벽의 시간에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시간을 갖는 것보다는, 다들 어디 산자락 하나씩 잡고 이 산이 저리로 옮겨지기를 기도하며 자신의 믿음이 참믿음인지를 증명해야 하는가?
주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단지 믿음의 작고 조그마한 ‘양’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 만한 믿음은 그것이 작은 씨라고 할지라도 결국 뿌리가 내리고 줄기가 뻗어나가 원래의 작은 크기와는 비교할 수 없이 확장되어가는, ‘믿음의 효과성’에 대해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그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며 자신들이 겨자씨보다 훨씬 더 큰 믿음의 양을 가졌노라고 자부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소유한 믿음의 능력으로 귀신들린 소년을 치유하고자 했다. 그러나 실패한다. 그 믿음은 참된 믿음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믿음의 양이 아니라 ‘믿음의 초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혹은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 믿음을 잘못 행하였음을 보여준다. 효과적인 믿음은 아주 작은 양이라 할지라도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가능하게 만들지만, 아무리 큰 믿음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믿음은 아주 작고 사소한 일조차 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효과적인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기 원하시는 것을, 내 힘과 능력과 같은 내가 가진 것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와 같은 것을 명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명하실 때, 그것을 명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일을 우리에게 사명으로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그 일을 하기 기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에 그에 합당한 능력과 은사를 더하여 주실 줄을 확신하는 것, 바로 이것이 참된 믿음이다.
제자들은 자신이 갖고 있거나, 자신의 위치에 확신을 두어서 실패하였지만, 참된 믿음의 신자는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실 때 그것을 함께 감당할만한 능력도 주신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감당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라고 고백하였다. 그는 결코 자신의 학벌이나 혈통이나 지위를 가지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을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시고 세우셨기에, 그 주시는 능력 안에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노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이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한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함께 세워가시는 여러분, 지난 한해동안 여러 봉사와 헌신의 자리를 잘 지켜 주셔서 감사하다. 여러분을 그 자리에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으시는가? 하나님이 여러분을 세우셨고, 여러분을 통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 안의 이곳 저곳을 세워가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줄을 믿으시는가? 만일 여러분이 이에 대하여 확신을 갖고 계시다면, 우리에게 효과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능력으로 나타나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인가? 나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섬기는 데에 필요한 은사와 덕목과 능력과 모든 필요들 역시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리라는 믿음이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여러분을 다시 살리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 가운데 주님의 몸된 양문교회로 보내어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여러 섬김과 봉사의 자리로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효과적인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는 고백이 바로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고, 여러분들을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갈 것이다. 다가올 2022년, 능력이 임하는 참된 믿음, 효과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들을 능히 감당하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도하자.
우리를 통하여 교회를 세워가길 기뻐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능력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교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직분을 주시고, 여러 섬김과 봉사와 헌신의 자리를 허락하셨으니, 또한 넉넉히 감당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서더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일을 감당키 위해 몸이 나아야 하겠습니다. 교회를 잘 섬기기 위해 가정이 평안해야 하겠습니다. 여러 근심과 걱정 없도록입사업들이 든든히 서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기름 붓듯 부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