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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봉독
성경봉독
1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2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3 사울이 광야 앞 하길라 산 길 가에 진 치니라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광야로 들어옴을 알고
4 이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5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6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7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서론
서론
어느덧 2021년의 마지막 주 수요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던 한 해였지만
여기까지 우리의 삶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한다.
새해에도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길 축복한다.
만일 올 한해 여러분이 살아온 인생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무슨 색’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올 한 해 여러분은 어떤 색깔의 인생을 살아오셨는가?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아니면 핑크색인가?
오늘 설교 제목을 4인 4색으로 이름지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인 사무엘상 26 장에는
4명의 사람과 그들의 인생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울과 아브넬, 그리고 아비새와 다윗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4명의 인물은 각자 자신의 인생을 살아갔다.
그리고 그들 각자 자기만의 인생 색깔을 만들어갔다.
오늘 이 시간
사무엘상 26장을 중심으로
이 네 사람의 인생을 살펴볼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며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결단하는 복된 시간 되길 축복한다.
본론
본론
1. 사울의 인생
1. 사울의 인생
먼저 우리가 잘 아는 사울의 인생을 살펴보자.
사울은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한마디로 평가하면
사울은 사람들을 의지하고
사람들의 말을 따라 살아간 인생이라 할 수 있다.
1절 말씀을 보자.
1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유대 광야 땅 십 사람들이
사울의 왕궁이 있는 베냐민 기브아로 찾아왔다.
그리고 사울에게 고급 정보를 하나 알려준다.
어떤 정보인가?
다윗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알려 준 것이다.
당시 다윗은 사울을 피해
유대 땅 십 광야 앞에 있는 하길라 산에 숨어 있었다.
그 근처에 살고 있던 십 사람들 중 일부가
이 사실을 알고 사울에게 찾아가 밀고한 것이다.
이 정보를 접한 사울은 어떻게 하는가?
2절을 보자.
2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사울은 일어나, 내려가, 찾는다.
다윗의 소식을 들은 사울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윗이 숨어 있다고 하는 십 광야 하길라 산까지 내려갔다.
사울은 혼자 내려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장정 중에서
뽑고 뽑은 정예 군사 3천명을 데리고 갔다.
무엇을 하기 위함인가?
다윗을 찾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실 사울은 이미 여러 차례 다윗을 잡으려고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 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무엘상 24 장에서는
다윗을 잡으러 엔게디 광야에 갔다가
그곳 동굴에서 다윗의 손에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그때 사울은 자기를 살려준 다윗을 향해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7)
라고 고백했고,
더 나아가 사울은 다윗에게 맹세를 받기도 했다.
어떤 맹세인가?
사울은 다윗에게
자기자신과 후손의 이름을 끊거나 멸하지 않겠다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요구했고
다윗은 기꺼이 사울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다.
다윗은 이 자리에서
자신이 사울을 죽이거나 해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고,
또한 사울의 요구를 따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했다.
그럼 된 것이 아닌가?
이제 더 이상 사울이 다윗을 잡기 위해 쫓아다닐
이유도 명분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여기 26장에서 사울은 다시금 다윗을 찾아 나선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여기에는
자신의 왕위를 빼앗기지 않고 지키고자 하는
사울의 헛된 욕망과
또한 사람을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사람을 의심하는
피해망상적인 사울의 불안정한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울 혼자 이렇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고 움직이도록 부추기고 말을 하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사무엘상 24장 9절을 보면
다윗은 사울을 향해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라고 이야기한다(삼상 24:9).
다시 말해 사울 왕 주변에
다윗이 사울을 죽이려고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사울은 그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의구심에 더욱 확신을 갖고
정말 다윗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오늘 본문인 26장 19절에서도
다윗은 사울에게 한번 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19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
사람들이 준 마음이라고 이야기한다.
누군가가 사울 왕의 마음을 충동질해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 충동질하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사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만약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자신을 제물로 바치겠지만,
만약 이 일이 사람들의 일이라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말한다.
다윗은 알고 있었다.
사울 주변의 사람들이 다윗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자신을 쫓아내어 여호와 하나님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이 사울 왕의 마음을 충동질시켜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다.
지금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한번 더 사울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다윗의 이러한 말을 듣고서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21절 말씀이다.
21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
어떻게 보면 사울의 인생은 뒤늦은 후회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삶인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는 하지만
그의 근본적인 삶의 태도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동일한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며
후회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그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따르기보다는
세상 사람들을 의지하고 그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하기에 세상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며
그 말에 이끌려 사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러한 사울의 삶은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까지도 신접한 여인을 통해
죽은 사무엘을 찾아 헤매던 사울은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과 맞서 싸우다가
자신의 세 아들과 함께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우리는 사울의 인생을 통해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들의 말을 좇아 살아가는 인생이
결코 복된 인생이 아님을 배우게 된다.
2. 아브넬의 인생
2. 아브넬의 인생
이제 두 번째 사람 아브넬의 인생을 살펴보자.
아브넬의 인생은 한마디로
자신의 욕망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망각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아브넬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살펴보자.
사무엘상 14장을 보면
아브넬은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삼상 14:50).
다시 말해 사울과 아브넬은 사촌지간인 것이다.
사울의 할아버지의 이름이 아비엘이다.
아비엘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명은 기스이고, 또 한 명이 넬이다.
기스의 아들이 사울이고, 넬의 아들이 아브넬이다.
사울은 자신이 왕이 되자
자신의 사촌이었던 아브넬을 그의 ‘군사령관’으로 삼았다.
다시 말해 아브넬은 사울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아브넬은 다윗이 블레셋의 골리앗과 싸웠던 엘라 골짜기 전투에서
사울 옆에서 사울과 함께 했다(삼상 17:55-58).
골리앗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들고 돌아오는 다윗을
사울 앞으로 인도했던 인물이
바로 아브넬이었다.
또한 정기적으로 매달 초, 왕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아브넬은 왕인 사울의 옆 자리에 앉아 왕과 함께 식사를 했다(삼상 20:25).
물론 다윗도 그 식사 자리에 함께 했지만 그의 자리는 아브넬 다음 자리였던 것 같다.
다시 말해 당시 아브넬은
이스라엘에서 사울 왕 다음의 서열 2위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오늘 본문인 26장 15절을 보면
다윗은 아브넬을 향하여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가운데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명실상부하게 이스라엘 권력의 서열 2인자이자
다윗도 인정한 이스라엘의 용사인 아브넬이
사울 왕과 함께 3천 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다윗을 잡으러 온 것이다.
사울과 아브넬, 그리고 3천 명의 군사는
십 광야 하길라 산까지 내려와
하길라 산 길 가에 진을 치고 그곳에서 야영을 하게 된다.
5절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5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다시 말해 진의 중앙에 왕인 사울이 있었고
3천 명의 군사들이 왕을 둘러싸고 둥글게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진영을 갖춘 이유가 무엇인가?
당연히 왕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혹시나 모를 위험이 닥쳤을 때에
바깥쪽에 있는 군사들이 안쪽에 있는 왕을 보호하기 위한 배치인 것이다.
그리고 왕을 지키고 보호할 최종 책임은 바로 아브넬에게 있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했는가?
7절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7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그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비록 진의 모양은 왕인 사울을 가운데 두고
군사령관인 아브넬과 3천 명의 군사가 사울을 둘러 싸고 있었지만
밤이 되어
다윗과 아비새가 몰래 사울의 진영으로 들어갔음에도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왕인 사울이 잠자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왕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군사령관인 아브넬마저 사울과 함께 잠자고 있었다.
그리고 삼천 명이나 되는 군사들 또한
이 아브넬을 따라 모두 잠들어 있었다.
군사령관인 아브넬은 자신이 맡은 직무와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아브넬은 ‘직무유기’를 한 것이다.
이에 다윗은 16절 상반절에서 다음과 같이 아브넬을 책망한다.
사무엘상 26:16 (NKRV)
16 네가 행한 이 일이 옳지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이니라 ...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물론 성경은 이 사건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한다.
하지만 왕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군사령관 아브넬이
자신의 역할을 안일하게 생각하고
경계에 만전을 기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아브넬의 마음 상태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14절 말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14 다윗이 백성과 넬의 아들 아브넬을 대하여 외쳐 이르되 아브넬아 너는 대답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아브넬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하더라
다윗은 그의 부하인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영 깊숙히 들어가
잠자고 있던 사울 왕의 머리 곁에 있던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온다.
그리고 다윗은 건너편 멀리 있는 산 꼭대기에 올라가
큰 소리로 아브넬의 이름을 부르며 잠자고 있던 그를 깨운다.
‘아브넬아 너는 대답하지 아니하느냐'
고요한 밤 중에 울리는 외침이라
분명 크고 선명하게 들렸을 것이다.
이 외침을 듣고 잠에서 벌떡 깨어난 아브넬은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지 못한 채 당황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지금 다윗은 누구의 이름을 불렀는가?
아브넬의 이름이다.
그런데 아브넬은 그 이름이 누구의 이름이라고 이야기하는가?
왕의 이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그 외침 때문에
잠을 자고 있던 사울 왕이 깨어날 것을 염려해서 하는 말이기는 하다.
다시 말해 지금 사울 왕이 잠을 자고 있는데
큰 소리를 외쳐 왕을 깨우는 자가 누구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다윗은
아브넬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찾았는데
아브넬은 그것을 갖고 ‘왕을 부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아브넬의 말 속에는
은연중에 왕인 사울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분명 아브넬은
이스라엘의 군사령관으로서
엄연히 왕인 사울의 충성된 신하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만,
사울 왕 다음으로 높은 지위를 갖고 있던 아브넬의 마음에는
어느새 자기 자신도 왕처럼 권세를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러하기에 왕을 보호하고 지키기보다
오히려 자기도 왕처럼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사건 이후 전개되는 내용을 보면
이러한 그의 욕망을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무엘상 31 장에서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전투에서 모두 전사할 때
아브넬은 사울 왕의 곁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군사령관으로서
마땅히 목숨을 바쳐 왕을 지켜야 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지만
아브넬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전쟁터에서 빠져나와
사울의 또다른 아들인 이스보셋을 데리고
블레셋을 피해 요단강 동편에 있는 마하나임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이스보셋을 유다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의 11지파의 왕으로 세운다.
형식적으로는
사울 왕의 혈통을 왕으로 내세워
이스라엘 왕조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이어갔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아브넬 자신이 갖고
스스로 왕인 것처럼 행세했다.
이러한 아브넬의 욕망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
사무엘하 3 장에 나오는 사울 왕의 첩이었던 리스바와의 통간 사건이다.
엄연히 왕의 신하로서 왕의 여자를 넘보는 것은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불경한 행위이다.
그럼에도 아브넬은 자신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처럼 행세했고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스보셋에게
오히려 더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러한 아브넬의 인생 말년도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다윗의 군사령관이었던 요압에 의해 암살당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요압의 동생이었던 아사헬의 죽음에 대한 복수였다.
우리는 이러한 아브넬의 인생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와 역할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보다
자기의 욕망을 좇아 살아가는 인생이 결국 행복한 인생이 아님을 배우게 된다.
3. 아비새의 인생
3. 아비새의 인생
이제 세 번째 사람 아비새의 인생을 살펴보자.
아비새의 인생은 아브넬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아브넬의 인생은 한마디로
자신의 자리와 역할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며 살아간 인생이었다.
사울과 아브넬과 마찬가지로
다윗과 아비새도 서로 친척 관계이다.
아비새는 다윗의 누이였던 스루야의 세 아들 중 하나로
다윗은 아비새의 삼촌이고, 아비새는 다윗의 조카였다.
사울과 아브넬이 군사들을 이끌고 하길라에 진을 치게 되자
다윗은 일차적으로 정탐꾼을 보내 그 사실을 확인한 뒤
자신이 직접 사울의 진영을 살펴보러 가게 된다.
오늘 본문 6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6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적진으로 잠입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라
3천 명의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진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찌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일 수 있다.
그러함에도 ‘누가 나와 더불어 가겠느냐'는 다윗의 말에
아비새는 주저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내가 당신과 함께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것이 충성된 부하의 모습이다.
아비새는 자신이 모신 주군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그와 함께 한다.
이 때만이 아니다.
사무엘하 21 장을 보면
이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던 중 다윗이 위험에 빠졌을 때에도
목숨을 걸고 다윗을 구해준 인물이
바로 아비새이다.
거인족의 아들 중 하나인 이스비브놉이
삼백 세겔 되는 놋 창과 새 칼을 가지고
전투에 지치고 피곤한 다윗을 죽이려 할 때에
바로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를 죽이고 다윗을 전쟁터에서 구한 것이다.
이렇듯 아비새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자였다.
이러한 아비새는
훗날 다윗의 30용사 중 첫 세 용사의 우두머리로서
세 용사 중 가장 존귀한 자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삼하 23:18-29).
우리는 이러한 아비새와 같은 충성된 자의 모습을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신약시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그러한 인물이었다.
아굴라와 그의 아내인 브리스길라는
원래 로마에 살던 유대인 부부였는데
글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로마추방령으로 인해
고린도에 왔다가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 그들은
사울의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 그의 사역을 신실히 후원하였다.
로마서 16 장에서 사도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아비새와 같이,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이,
자신의 몸과 생명도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존귀와 상을 주실 줄 믿는다.
우리도 아비새와 같은 충성된 인생을 살아가는 자 되길 축복한다.
4. 다윗의 인생
4. 다윗의 인생
마지막으로 네 번째 사람 다윗의 인생을 살펴보자.
사울의 인생이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의 말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한다면
다윗의 인생은그 반대의 인생을 살았다.
바로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살았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그의 부하인 아비새가
무방비로 자고 있던 사울 왕을 창으로 찔러 죽이겠다고 했을 때
그를 말리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10-11절 말씀이다.
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다윗은 아비새의 말을 듣지 않았다.
분명 다윗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뜻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분명히 믿었고
그 믿음대로 행한 자였다.
‘코람데오',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정직히 살아갔다.
그러하기에 사람의 말이나, 눈 앞에 보이는 이득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분명한 확신과 믿음이 있었다.
23-24절 말씀에서
다윗은 사울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23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24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다윗의 이 믿음과 확신대로
하나님은 다윗의 생명을 중히 여기시고
그를 모든 환난에서 구해 내셨고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높이셨다.
우리는 다윗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복되고 복된 인생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우리 모두 이런 복된 인생 살아가길 축복한다.
결론
결론
말씀을 맺기 전에
여기서 중요한 진리 하나를 더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떻게 보면 인생은 내가 주인이고 내가 그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반드시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울은 진영 가운데에서
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잠을 자고 있었고,
그의 머리 곁에는 창을 두고 있었다.
창을 머리 곁에 둔 이유가 무엇인가?
유사시에 그 창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적을 공격하기 위함이다.
자신의 몸을 지킬 최후의 수단이 바로 창인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군사들은 모두 잠들어버렸고
머리 곁에 있었던 창은 오히려 자신을 죽이는 살해무기로 사용될 뻔 했다.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군사들과 무기가
아무런 쓸모없는 무용지물이 될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해가 될 뻔 했던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12절 말씀을 보면
사울과 아브넬을 비롯한 3천 명의 군사들이 모두 잠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12절 말씀을 읽어보자.
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이 본문 하반절의 내용을 히브리어 원문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아무도 보지 못했고,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아무도 깨어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잘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깊은 잠이 그들 위에 임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깊은 잠'이라는 히브리어는 ‘타르데마'라는 단어인데
바로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들기 위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고 할 때 쓰인 단어가 바로 이 ‘타르데마'이다.
사울과 아브넬은
자신들의 막강한 군사력을 믿었다.
수십 만 명의 이스라엘 장정 중에서 고르고 고른 3천 명의 정예군사였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깊은 잠' 앞에서는
그 누구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보려고 해도 볼 수 없었고,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었고,
깨어있으려고 해도 깰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이 ‘깊은 잠’을 통해
사울과 아브넬과 삼 천 명의 군사를 모두 잠들게 하셨다.
그리고 그 반대로
하나님은 다윗과 아비새를 위험으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다.
이것이 바로 능하신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사울과 아브넬, 아비새와 다윗
이 네 사람의 인생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과 조건에서
나름대로의 선택과 결정을 따라 행동했다.
그것이 그들의 하루가 되었고, 그들의 일 년이 되었고, 그들의 인생이 되었다.
그것이 각자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인생이 되었다.
어떤 색깔의 인생이 좋아 보이는가?
분명한 것은 어떤 색깔의 인생이든
자신의 인생에 대해 하나님 앞에 평가받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이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잘했다 칭찬받는 복된 인생 되기를 축복한다.
사람들과 그들의 말을 의지하여
헛된 욕망과 야망을 쫓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이 주신 자리에서 충성하며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시고 높이실 줄 믿는다.
그러한 인생이 가장 복된 인생될 줄 믿는다.
2021년 한 해를 그렇게 살아왔고,
이제 우리에게 주실 2022년 새해도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우리 모두 되길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