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빛이 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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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분, 즉 1:1-18절까지를 제외한 부분들은 모두 이야기라서 읽기 편한데 시작부분은 매우 신학적이라서 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이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매우 잘 이해해야만 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서론부분을 오페라의 서곡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페라 서곡도 전체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잖아요.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초등학교때 공부 열심히 한 사람은 세계 사대 성인중 한분?
아니면 기독교의 창시자?
아니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많이 도와줬던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
이정도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한 위대한 인간이나 한 종교의 창시자 정도로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 성경에 가장 잘 기록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누구신지, 그리고 그 분은 어떤 일을 하셨는 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따라 내 삶이 완전히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완전히 바뀔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5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느니라.
우리 삶의 길과 진리, 생명이 되신 분을 알아야 우리 인생의 방향을 잡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실까요?
오늘 말씀은 ‘참빛이 있었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냥 빛이라고 하지 않고 ‘참빛’이라고 했습니다.
‘참빛’이란 ‘진짜 빛’이라는 의미입니다.
앞서 4절에 보면 그 ‘빛’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참빛’이 있는데 ‘거짓빛’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처럼 우리를 속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마치 돈과 명예, 쾌락이 인생의 참빛인양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참빛’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9절에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빛이 세상 “속으로” 온 것입니다.
영어로 coming into the world인 것이죠.
도대체 어디서 온 빛일까요?
1절에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 말씀이 바로 ‘그 빛’입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기도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신 그 말씀, 그 빛이 이 세상 속으로 온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이 참빛을 ‘그’라고 표현합니다.
그 분이 누구일까요?
17절에 나옵니다.
네 맞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저는 ‘빛이 세상 속으로 왔다’는 부분을 읽을 때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님입니다.
책과 영화로 잘 알려진 분입니다.
이 분은 의사이면서 신부님이 되셔서 아프리카 남수단의 톤즈라는 곳에 선교사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학교, 병원을 세우고 브라스밴드를 만드셨습니다.
오랜 내전으로 인해 분열된 사람들 마음을 하나로 묶는데 음악보다 좋은 게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 브라스 밴드가 유명해져서 아프리카 전역에 공연하러 다녔다고 합니다.
이 분의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 분이 살이 썪어들어가는 한센병환자들이 있는 한 마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제임스 신부가 차를 세우자 이태석 수사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 순간, 그는 한센병 환자들이 누워 있는 움막에서 풍기는 심한 악취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들은 감각이 없어 손과 발에 항상 많은 상처를 달고 있었고, 고름이 터진 상처에서는 심한 악취가 났다. 그뿐 아니라 움막 안에 있는 환자들은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그곳에서 배설을 하고 치우지도 못했다. 먹질 못해 뼈만 앙상히 남은 사람들, 손가락 발가락 없이 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니는 나환자들, 삐쩍 마른 엄마 젖을 빨다 결국 지쳐 울어대는 아기들……. 이러한 현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른 채 너무 쉽게만 살아왔던 것에 대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그는 옷을 걸친 이가 거의 없는 한센병 환자들과 움막에서 올라오는 악취에 온몸이 감전된 것 같은 충격에 빠졌다. 의대 다닐 때 해부학 실습까지 한 그였지만, 50여 명의 남녀노소가 흙바닥에 누운 채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은 너무나 처참해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특히 어릴 때부터 생선조차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비위가 약한 그는 움막 속에서 나는 악취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태석 수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차를 타고 왔던 길을 향해 무작정 달렸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계속 뛰어가다가 수풀 옆에 주저앉았다. 숨을 고르며 자신이 본 처참한 광경을 떠올렸다. 그리고 외쳤다. 주님, 어떻게 아직 이런 곳이 존재합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건을 계기로 이태석 신부님은 그 곳에 선교사로 떠나게 됩니다.
하늘의 역병으로 알려진 한센병 환자를 돌보기 위해 찾아온 선교사님처럼 악취가 나는 죄가 가득한 세상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9절에서 빛이 세상 속으로 오셔서 우리를 비춰주셨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10절을 보십시오.
그 빛인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오셨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왜냐하면 자신들이 기대하던 메시야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엄청난 능력을 가진 메시야를 기대했지만,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너무나 나약해보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11절입니다.
사람들은 빛이 자기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빛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거부했다는 의미입니다.
왜 일까요?
바로 죄때문입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기보다 죄가 다스리는 곳에 머무르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니아 연대기에 보면 남동생이 겨울마녀가 준 달콤한 터키사탕의 유혹에 넘어가 그녀의 노예로 사로잡혀 버립니다.
그 터키사탕의 유혹이 바로 죄의 유혹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그 이유때문입니다.
내가 선과 악을 선택해야지 하나님께 맡겨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세상과 내 삶의 기준이 되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지금의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와도 같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외쳐댑니다.
니가 세상의 주인이라고 말입니다.
니가 하고 싶은대로 살라고 말입니다.
니 마음이 가는 대로 살라고 말입니다.
노래들을 봐도 전부 ‘너를 사랑하라’는 메시지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 예수님을 ‘참빛’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을까요?
14절입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그 말씀이란 1장 1절에서 말하는 말씀, 곧‘로고스’입니다.
로고스란 세상을 창조하고 세상의 질서를 잡아준 태초에 있던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그 로고스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태초부터 함께 계셨던 그 말씀이 세상 속으로 오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 시간이 지나면 닳아서 죽을 몸,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피조세계를 초월한 곳에 계신 분이 이 피조세계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존재가 ‘시간 속’으로 오신 것입니다.
또한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셨다’는 것은‘장막에 거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할 때 장막 또는 성막 배웠잖아요?
출애굽시절 광야에서 하나님이 성막에 거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하나님이 인간 육체를 성막삼아 백성들 가운데 거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성막이 곧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많은 것들을 신약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결국 14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제가 12월에만 두번이나 들었던 베토벤 나인 심포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별의 저편에는 사랑하는 아버지 주님이 계신다’
맞습니다.
14절은 별의 저편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님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참빛이자 말씀, 로고스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14절 나머지 부분입니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였다’
여기서 ‘영광’이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아들의 영광’이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유일한 영광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영광의 삶이었습니다.
그 영광의 삶이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삶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볼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계셨고,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니까 그 은혜가 사람들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통해 우리 삶의 진리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무엇이 행복한 삶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참빛’이자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침례요한의 증언입니다.
침례요한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마지막 예언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참빛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침례요한의 증언을 여기서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시는데 사람의 증언이 꼭 필요할까요?
네,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홀로 일하시지 않으시고, 사람과 함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증언하는 자가 없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할 선교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드신 이유도 증언자, 증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우리 역시 그러한 증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참빛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야만 합니다.
우리를 빛으로 부르셨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제자의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무엇일까요?
먼저 12절입니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지만, 맞아들인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였다는 것은 곧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이고, 그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참빛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말로만 믿는다는 게 아니라 삶에서 그 분의 뜻을 순종하며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왜 특권일까요?
왜냐하면 내가 되고싶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13절입니다.
이들은, 즉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되는 것이지 내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특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소수의 사람들만 온갖 특권을 누리기 위해 세상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채우려 합니다.
돈과 지위만 가지면 소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이 될 수록 그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럭셔리 클럽에 밥을 먹으러 간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겨우 식당인데 아무나 못들어가고 멤버쉽을 가진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랑 같이 가시는 분이 엄청 돈이 많아 그 곳 회원이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소수들만 누리는 특권을 가지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그 특권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는데 유일한 조건은 하나님을 내 삶에 받아들이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무엇을 누릴 수 있게 될까요?
16, 17, 18절입니다.
먼저 16절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그의 충만함이란 앞서 말한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통해 우리가 선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물일까요?
은혜에 은혜를 더한 선물입니다.
은혜에 은혜를 더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 17절입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를들면 10계명이 대표적입니다.
그 율법도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않고, 죄를 짓는 우리를 정죄합니다.
그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는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찾게끔 해주는 이정표 역할을 할 뿐입니다.
18절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하나님의 친구같던 모세도 하나님을 볼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등만 본 것으로 나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게 율법의 한계입니다.
제사를 아무리 많이 드려도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보거나 만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그 분을 보는 게 곧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셨나요?
우리는 앞으로 요한복음을 통해 더 자세히 이것을 알아볼 것입니다.
그러나 마치 오페라의 서곡처럼 여기 서론부분만 보아도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습니다.
다미앵이라는 벨기에 선교사는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 한센병 환자 정착촌이 들어서자 1873년 단신으로 그곳에 들어갔습니다.
그 뒤 16년 간 헌신적으로 환자를 돌보다가 자신도 결국 한센병에 걸려 1889년 49세의 나이에 죽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죄로 물든 이 세상에 오셔서 본인이 그 죄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일로 인해 우리는 구원을 받고 새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믿는 게 쉽나요?
네 쉽습니다.
그러나 너무 쉬운거 같아 그 가치를 잊어먹을 때가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 희생의 가치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