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 (막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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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0장 46-52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분으로서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그 여정가운데 자신의 죽음을 앞서 보시고 그 죽음의 길을 가시는 중에 길에서 울부짖는 맹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도움을 주기 위해서 갈 길을 멈추십니다.
바디메오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낮고도 낮은 사람이었던 자입니다. 자기 소유라고는 겉옷 하나 외에는 거의 없는 맹인이자 거지였습니다.
그러나 이 맹인 거지였던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52절에서 구원을 받는 자가 됩니다. 이 바디메오의 모습은 같은 10장에 나왔던 재물이 많은 부자의 이야기와 대비되어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더 나은자가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줍니다.
가진 것이 많았지만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못하여 근심하며 돌아갔던 부자와 자신의 가진 겉옷 자락을 내버리고 주님의 구원의 손길을 위해 뛰어갔던 바디메오의 대비는 오히려 부자보다 바디메오가 하나님의 복을 받기에 더 나은 사람인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부자는 자신의 선행을 나열하면서 그 선행으로 영생을 얻게 되기를 바라지만, 바디매오는 긍휼을 외쳐 구합니다.
48절에 바디메오의 외침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는 빈손으로 와서 육체적 병 고침과 영적 시력을 선물 받습니다.
앞서 재물이 많은 부자는 재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를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눈먼 자, 눌린 자, 버림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들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 즉 예수님의 필요를 인식하는 자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2:14-17)
교만하고 자기 의에 가득 찬 종교 지도자들은 선포된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함으로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귀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교만함에 가득찬 종교 지도자들에게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1]
막 4:11–12.
(4:11-12)
그러나 맹인 바디매오는 하나님께 긍휼을 구해 외침으로 말미암아 그의 시력을 되찾게 됩니다.
천하고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누가복음에서 더욱 두드러져 나타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장 52절에서 마리아는 천하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1]
[1]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눅 1:52.
또한 가난한 거지 나사로는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서 아브라함 옆에 앉아 있는 복을 얻게 됩니다. 반면에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 18:14)
이 말씀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상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되었기에 받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래 의나 우리의 원래 모습이 그럴만한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오늘날 여전히 우리 주위의 비천하고 낮은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처럼 우리에게 우리 사회 곳곳의 그러한 자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 사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개인의 생활양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예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고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했던 그 공동체로 들어감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가치가 지배하는 세상가운데… 개인의 안전과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을 가짐으로 이제는.. 예수께서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듯이 이제 개인의 안전과 유익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와 비천하고 낮은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가치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의 기도생활이나.. 예배생활이 신앙생활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또한 우리가 이 오늘 본문의 바디매오와 같은 간절함으로 주님을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바디매오는 주님의 긍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무리가 이 바디매오를 꾸짖고 잠잠하라 말하고 그를 말리어도 계속해서 주님을 부르고 찾고 긍휼을 구헀습니다..
우리가 이토록 간절하게 주님을 찾고 주님의 도움을 구할 때..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긍휼을 입은 참된 제자는 52절의 말씀처럼…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 그것이 참된 긍휼을 입은 제자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이 본문 앞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10장 36절에서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세상적 욕심을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같은 질문을 하셨을 때… 51절입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욕심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 그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누가 참된 제자인가?를 묻는 듯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를 간구하길 바랍니다.. 세상적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그 귀중함을 바르게 알아보고 그것을 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수 있는 하루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의 긍휼을 구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복과 은혜로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