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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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0UNLIKELY
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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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0UNLIKELY
Sadness
0UNLIKELY
Language Tone
Analytical
0UNLIKELY
Confident
0UNLIKELY
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0.29UNLIKELY
Conscientiousness
0.27UNLIKELY
Extraversion
0.54LIKELY
Agreeableness
0.6LIKELY
Emotional Range
0.29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Language
Social Tendencies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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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3장 1-2절 말씀입니다.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설교 제목 : 천국? 하나님 나라!
서론
오늘은 2021년의 마지막 청소년부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나올 때 어떤 마음으로 나왔나요?
물론 아무생각 안하고 나왔을 수 있죠.
하지만 올 한해를 마무리 지으며, 또 내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이 시간 예배하길 원합니다.
특히 오늘 예배를 준비하면서 어떤 말씀을 우리 청소년부와 함께 나눠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예배를 마지막으로 청소년부를 졸업하고 청년부 소속이 되는 우리 고3 친구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실까 고민했습니다.
이제 5-6일 뒤에 성인이 되어서 자유를 누리게 되겠죠.
그런데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은 이제 자신이 내린 선택에 책임을 질 만한 나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선택하되 이제는 스스로 그 책임을 지라는 것이죠.
물론 당장은 자유가 눈에 보일 겁니다.
하지만 바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렇기에 고민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염두하고 선택해야 하는지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오늘 설교를 고3 친구들을 향해서만 할까요? 그렇지 않아요.
전도사님이 얼마나 배려심이 넘치는데요.
오늘 다른 친구들에게는 더 유익할 겁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설교 후에 셀 모임 때 나눔 중심으로 해왔죠? 내년에는 함께 공과 책을 통해서 함께 공부하며 나눌 예정입니다.
그런데 그 공과의 중심이 오늘 나오는 ‘하나님 나라’이거든요.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길 원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2절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얘기합니다.
천국
먼저 우리는 천국이라는 단어에 집중해보려고 합니다.
천국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인가요?
천국, 하늘나라.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천국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거 알고 있나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을 제외하고는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이 얘기하는 '천국, 하늘나라’는 무슨 뜻일까요?
이것을 이해하려면 복음서를 이해해야 합니다.
총 4개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각 복음서를 쓴 사람이 다르고, 그것을 읽는 독자도 다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은 마태라는 예수님 제자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쓴 복음서입니다.
누구라고요?
유대인이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아야 하는 십계명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왜 하늘인가?
하나님은 어떠신 분이죠? 하나님은 어느 곳에도 계시는 분입니다.
어느 곳에도 계시는 하나님을 대체할 만한 단어는 하늘이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보면, 하늘이 있죠.
한참 이동해서 위를 쳐다봐도 하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하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자연스럽게 천국,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지리적인 장소에서 우리는 찾습니다.
하지만 ‘나라’라는 단어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3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영토, 국민, 주권이죠.
그 중 오늘 쓰인 나라라는 단어는 ‘바실레이아’라는 단어로 주권, 즉 통치를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면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지 않는다면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아니죠.
우리는 대부분 죽어서 가는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통치는 무엇일까요?
이사야 40장 4절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낮은 곳은 높아지고 높은 곳은 낮아진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은 가난한 자가 높아지고, 부요한 자는 낮아진다는 것이죠.
어떻게 될 때?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을 때.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다스시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법이 임하는 곳이죠.
세상의 법은 무엇이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거에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그런데 하나님의 법은 무엇이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이 1순위 이웃이 2순위 자신은 3순위에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자기자신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라는 것이죠.
그렇기에 부요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놓습니다.
그렇기에 산과 언덕은 평탄하게 됩니다.
힘을 가진 자는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고, 연약한 자들의 편에 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2. 가까이 왔느니라.
우리가 두번째 살펴볼 것은 ‘가까이 왔느니라’ 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원어로 살펴볼 때 완료형이에요.
그러면 ‘가까이 와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상 의미는 이미 도착했다는 뜻이죠.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의 노력으로 인해 이뤄진다는게 아닙니다.
우리의 회개를 통해 이뤄지는게 아니라 이미 이뤄졌다는 것이죠.
전도사님이 최근에 계속해서 강조하는게 있죠.
구원은 우리가 이루는게 아니다.
우리의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모든 종교는 우리의 열심과 우리의 선함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이 임하고, 그 구원으로 인해 우리는 기쁨으로 선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하나님의 통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있는 것처럼 가까이 왔다.
이미 임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사실 우리가 평생 노력해도 우리는 선한 행동을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통치를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결과만 놓고 보면, 똑같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을 하는 동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같이 살펴볼 텐데요.
3번째 하나님의 나라, 통치가 임하였으니 무엇을 해야 한다? 회개해야한다.
3. 회개하라
지금 세례요한은 유대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회개란 자신의 죄에 대해서 고백하는 것이죠.
그래서 세례요한은 그들의 죄를 깨닫게합니다.
세례요한의 역할은 죄를 지적하여 회개하게 하는 것까지입니다.
헤롯 왕에게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은 잘못 되었다!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그들이 죄를 고백하도록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도록 합니다.
세례요한은 왜 죄를 고백하도록, 회개하라고 할까요? 우리는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구원자, 구속자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까먹고 살아요.
우리는 내가 수많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까먹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선포합니다.
너희는 죄인이야! 그러니까 나와서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꼐 고백해라! 그리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니, 내 뒤에 오시는 그가 그리스도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려니와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도록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하였으니,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고백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맞이하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회개하러 나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5-6절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에서 그에게 나와 죄를 자복합니다.
세례요한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그런데 똑같이 7절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요한에게 나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그들의 회개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러 나온게 아니었어요.
그들은 그저 다들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니까, 자신은 회개하지 않고 다른 사람처럼 세례를 받기 위함이었던 것이죠.
마태복음 21장 32절에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앞선 사람들이랑 똑같이 회개하러 나왔습니다.
말로는 회개 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죄를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의가 가득차 있어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사실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해결해주실 구원자 예수를 부인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있는 세리와 창녀는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고백합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있기에 구원자 예수에게 나아갑니다.
어떤 모습이 바른 모습입니까?
의인인 척하는 죄인입니까?
하나님 앞에 죄를 토로하는 의인입니까?
사실 자신의 죄가 가장 많아 여겨질 때가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때입니다.
어거스틴이라는 위대한 한 신학자는 고백록이란 책에서 자신이 젖 먹던 시절에 지었던 죄를 회개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갓난아이 시절, 남아도는 어머니의 젖을 다른 아기에게 주는 것, 그것 때문에 시기하며 울었던 그 죄성을 바라봅니다.
이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회개할 때, 그 영역에서 다스리고 있는 나의 통치권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합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내가 왕이 되고자 합니다.
내가 다스리려고 해요.
그런데 내가 다스리게 되면, 다른 왕과 부딪힙니다.
그 다른 왕은 다른 사람이죠.
다른 사람 또한 자신이 왕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며 싸웁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회개와 하나님의 법입니다.
내가 즐겁고자, 내가 누리고자 통치하려 하였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향한 사랑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이 어느 곳이나 하나님 나라이고, 천국인 것입니다.
심지어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리, 대학교의 MT, 직장에서의 회식, 그곳에서 벌어지는 술자리도 하나님의 나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자리에 있다면요.
그곳에서 술을 마시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오해할거면 그냥 술자리에 참여하지도 말아요.
그러니까 잘 들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에 정해져 있는게 아닙니다.
그 자리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곳에 나가 승리해야 하는 것이죠.
저희 청소년부 한 교사분께서 동창들을 만나야 할지 만나지 말아야 할지 너무나 고민이 된다고 저에게 얘기를 했습니다.
사실 너무 가고 싶지 않다는 거에요.
어떤 자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근데 전도사님은 나가라고 했어요.
나가서 술 마시지 말고, 그들과 잘 대화하면서 복음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고 오라고 했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고3 친구들 이제 자유가 생기면, 선택할 수 있게 되죠.
그곳에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지 말아요.
나의 즐거움과 유익을 위해 선택하지 마세요.
제발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십쇼.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는 모습이 어떠한 모습인지 우리 청소년부 후배들에게 당당하게 보여주세요.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전도사님이 좋아하는 문장이 있어요.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마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여러분이 걸은 그대로 우리 청소년부가 자랍니다.
여러분을 보고 자라요.
제발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주세요.
교회에서만 사는게 아니라, 제발 교회 밖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주세요.
여기까지 듣고 오늘 설교는 고3 한테만 했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없기를 바래요.
금방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얘기했다면, 반대로 교회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얘기합니다.
교회라고 그곳이 무조건 하나님의 통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배에 자리에 앉아서 자신을 위해 딴 짓하며 딴 생각하고 있다면, 바로 당신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있는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없을 수 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여러분이 회개함으로 자신의 주인됨을 포기하길 원합니다.
그러면 이미 임하신 하나님의 통치가 그 비어있는 여러분의 마음의 주인이 되실 겁니다.
그리고 통치하시고 다스리실 겁니다.
우리 삶 가운데 주인 되었던 모습을 회개하여 주옵소서.
회개하여 비어있는 마음 속에 이미 임하신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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