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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서론]
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기차가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철로에 다섯명의 인부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기관차 운전수는 핸들을 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철로에는 한명의 인부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같으면 이 핸들을 꺾겠습니까?
많은 사람은 아마도 핸들을 꺾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샌들러의 책에 나온 공리주의의 한 예입니다.
공리주의는 벤담이 말한 ‘최대의 다수, 최대의 행복’이란 말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한명의 인부가 기관사의 아들이라면 어떨까요?
제가 예전에 본 체코 영화중에 이런 비슷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The bridge’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영화에 보면 아버지가 철도역무원인데, 하나뿐인 아들과 함께 철도역에서 일을 합니다.
아버지 일은 기차가 오면 기차가 다리를 건너갈 수 있게 다리를 내려주는 거에요.
아들은 밖에서 놀고 있고, 아버지는 역무실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밖에서 보니 원래 올 시간보다 앞서 기차가 너무 빨리 오는 거에요.
그래서 그 아들은 아버지를 소리쳐서 부르는데 아버지가 못 들어요.
그래서 다급하니까 자신이 직접 다리를 내리기 위해 다리밑에 있는 수동밸브를 내리려 합니다.
그러다가 아들이 그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아버지는 그 때서야 밖에 있던 아들이 안 보이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들이 그 기계 속에 빨려 들어가는 모습도 보게 되죠.
기차는 이제 곧 도착하고, 그 기차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밸브를 내려 다리를 내리면 기차 안에 사람들은 살겠지만 자신의 아들은 그 기계에 짓이겨져 죽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버지 기관사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본론]
오늘 우리가 볼 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한두번씩은 어디선가 들어봤을만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자신의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만드시고 ‘보기 좋았다’며 만족하셨습니다.
특히 사람을 만드시고 난 후에는 ‘보기 매우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과 영원토록 좋은 관계를 맺고 함께 사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주이고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는 단 한가지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에덴동산 중앙에 있던 ‘선과 악을 알게 해주는 나무, 바로 ‘선악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어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로인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깨어지게 되었고,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단절은 우리에게 결핍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마치 절단된 꽃은 결국 시들어져 말라 죽을 수 밖에 없듯이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필요한 것들을 얻으려 했습니다.
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우상으로 삼아 필요한 것들을 얻으려 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갔습니다.
모두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 밖에 없었습니다.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도 죄인인데 누구 죄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늪에 빠진 사람은 누군가 구조해주지 않으면 스스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직접 오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러한 모습을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자신의 외아들을 포기하신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가 이해할 언어가 이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 자식이 없어서 내 자식이 얼마나 귀한 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내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넣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엊그제 소방관 3명이 화재현장에서 남은 사람들을 구하려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의 속 사정들을 들어보니 참 안타까운 죽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뉴스에서 그 죽은 소방관의 한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냥 소방관 못하게 할 것을 그랬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하물며 인간 아버지의 마음도 그러한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는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죽이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아들이 죄인인 우리들보다 덜 귀해서 그렇게 했을까요?
아니면 공리주의처럼 아들 하나로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유일한 아들’이라는 단어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것밖에는 우리를 살릴 방법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자신이 자발적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면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실 줄 알면서도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죽어야 할 가치가 있을까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이성적으로는 다 이해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기를 써도 부모의 사랑을 다 이해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형편없는 아들일지라도 그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우리가 죄로 멸망하지 않고 죄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1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럼 ‘영생’,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육체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할까요?
그것은 너무 1차원적인 생각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주신 ‘아들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나눠주고가신 ‘영적인 생명’말입니다.
마치 심장을 기증한 사람은 죽고 없지만 그 심장을 기증받은 사람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곁에 계시지만 그의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보고 예수의 심장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두가지로 나눠집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먼저 ‘믿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을 그냥 어떤 사실에 대한 지적인 동의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내 삶의 구세주 메시아로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그럼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그냥 지적인 동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믿음은 지적 동의를 넘어 삶의 근본적인 변화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들을 버리고, 믿음의 대상을 하나님께로 옮긴다는 것입니다.
사람, 돈, 성공, 쾌락의 신을 믿어왔다면 그것을 버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두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온 삶, 내가 주도적으로 살아온 삶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나 중심적으로 살아오던 삶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자, 그렇다면 먼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반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18절입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왜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일까요?
그들이 여전히 죄가운데 있으면서 어둠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사탄의 통치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통치하는 어둠의 영역에서 그들의 운명은 멸망으로 정해져 있을 뿐입니다.
요새 아내때문에 우리 집에 자주 예쁜 꽃들이 있습니다.
꽃있으니까 참 좋더라구요.
그런데 문제는 길어야 며칠밖에 못간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모두 절단된 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자체가 가진 영양분이 떨어지면 생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잘먹고 잘 사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죽음 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자신이 가진 어떤 것도 그의 영혼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그들은 멸망하여 영원한 죽음가운데 처해지고 말 것입니다.
19절이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했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어둠, 죄악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다 주어졌는데도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욕망대로 계속 살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는 삶입니다.
여기 요한복음에 이런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기적들을 모두 보았는데도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자신들 기대와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도 그들의 필요만 채우고 나면 예수님에게서 멀어져버립니다.
그들이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앞장섭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존재가 필요할 뿐 자신의 삶의 주인을 바꾸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자기 힘들때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대표적입니다.
평소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다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구세주가 아니라 램프의 요정 지니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기회가 많이 생겼는데도 그것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가족들 다 믿는데 자신만은 안 믿으려는 사람들, 인생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도 하나님을 찾기 거부하는 사람들, 이런 저런 핑계로 믿음을 갖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마음 속에는 뭐가 있을까요?
그냥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술 너무 좋아하는데 예수님 믿으면 술 끊어야 할 거 같고, 내가 좋아하는 거 못할 거 같은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이 잘못된 것임을 부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빛이 비추었으나 그 빛을 의도적으로 등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계속 고집을 부리면 하나님께 ‘버려진 사람들’이 됩니다.
로마서 1장 21절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헛된 것을 생각했으며,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어둠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어리석습니다. 또 사람들은 불멸의 하나님의 영광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나 새나 짐승 또는 뱀과 같은 모양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죄악된 행동을 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심판은 이 세상에서 겪는 힘겨운 고난이 아닙니다.
그러면 차라리 기회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가장 큰 심판은 그들의 죄악대로 그냥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 땅의 죄악들을 그냥 두시나요? 라고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버려두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20절은 이런 믿지 않는 사람들을 또다시 설명합니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미워하지는 않아.
그렇지만 나는 믿고 싶지는 않아.
그럴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을 내 삶의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죄악가운데 있고 싶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자체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에 어중간한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여전히 은밀히 죄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수는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을 넘어서 죄를 미워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사랑하느냐, 내가 무엇을 미워하느냐에 따라 내가 누구인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예전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며, 죄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빛이 아닌 어둠을 택해 자신을 감추려 하는 반면,
믿는 사람들은 빛으로 나아와 자신을 드러냅니다.
21절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진리를 행하는 사람, 즉 믿는 사람들은 빛, 예수님께로 나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나무가 햇빛을 따라가야 살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빛으로 나아간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요?
솔직하게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가 빛 앞에 나아가는 첫걸음입니다.
나를 치장하던 거추장스러운 가면과 옷을 벗고, 벌거벗은 채로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서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온 삶들을 인정하고 모두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빛으로 나아오는 첫걸음입니다.
지금 제가 설교하는 이 시간이라도 속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십시오.
어둠 속에 숨지 말고, 빛으로 나아오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빛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청하십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빛이냐 어둠이냐, 생명이냐 멸망이냐
이게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선택해야만 합니다.
인생의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어중간하게 살아갈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자신의 가장 귀한 유일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창조주이신 분이 죄악으로 얼룩진 세상 속으로 오셔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그런 무한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들입니다.
그것을 믿는 자는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삶의 진리 가운데로 나아가게 됩니다.
지금까지 세상에 속아서 살았던 삶, 죄에 속아서 살았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더 브릿지’라는 영화를 처음 말씀드렸습니다.
그 영화에서 아버지 역무원은 결국 자신의 아들을 두고 밸브를 내려 다리를 내립니다.
그리고 기차가 그 다리 위로 지나갑니다.
아버지는 지나가는 기차 옆에서 애통해하며 울부짖습니다.
그런데 그 기차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알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데도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줘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다카포 식구들이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