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합을 깨뜨린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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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216 , 211 , 315 , 217
기도
본문 막14:1-9 (신p.79)

서론

사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그동안 익숙하게 들어왔던 본문이다. 그 내용이나 배경에 대해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한다.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한 여인은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요한복음을 살펴보면 예수님에 의하여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 중 마리아 라고 말씀하신다. 마가복음에서 마리아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 이름을 알리는게 주된 기록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들은 베다니에 살고 있었고, 나병환자였다가 예수님에 의해 고침받은 것으로 추정이 되는 시몬이라는 사람 집에서 식사의 자리를 갖게 되었다. 이 때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는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아온다.

순전한 나드 한 옥합

여기서 이 여인이 드린 나드 한 옥합은 무엇일까? 아가서1:12에 ‘나도 기름’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네르드’ 라는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표현한 것으로, 이는 히말라야 산맥 고지대에서 자란다고 알려진 감송향이라는 매우 특별한 나무가 있다. 나도 기름은 이 나무의 뿌리를 말려서 추출하되 아주 극소량밖에 얻지 못하는 매우 진귀한 기름이다. 재료 자체도 진귀하지만 그 재료를 사용해서도 아주 극소량밖에 얻질 못하니 나드 기름은 매우 비싸게 거래되곤 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것을 순전한 나드라고 말한다. 프로폴리스 다들 들어보셨을 것이다. 저도 편도가 약해서 목이 쉴 때마다 프로폴리스를 먹곤 했는데, 이것이 순도 100%인지 50%인지에 따라 가격이 차이가 난다. 오늘 본문에는 나드 기름을 가리켜 ‘순전한’이라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의 의미를 따라 순도100%, 혹은 진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이 여인이 가지고 온 나드 기름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더군다나 그 양도 엄청난 것이 이 여인은 한 옥합을 채워왔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옥합이란 몸체가 둥글고 매우 넓으며 입구와 목이 가늘고 긴 모양을 한 도자기류의 그릇을 말한다. 나드 기름은 공기와 만나는 즉시 산화되어 버리는 기름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밀봉하여 보관했었고, 사용 용도에 따라 아주 작은 용기부터 큰 용기까지 다양하게 보관할 수 있었다. 당시 유대 문화권에서는 집에 아주 귀하고 귀한 손님이 찾아올 때에 좋은 기름을 꺼내와서 극소량 손님 머리에 발라주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 여인은 병째로 예수님의 머리를 적시고 있다.
그렇다면 나드 한 옥합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 혹시 리퍼샵이라고 들어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다. 가전제품이나 가구등을 파는 곳인데, 전시되었던 제품, 고객의 단순변심에 의한 반품, 혹여나 운반 도중에 생기는 아주 작은 스크래치로 인해 반품된 거의 새 제품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되파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구입하게 된다면 세 재품 가격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오늘 본문 속의 나드 한 옥합은 5절과 같이 300데나리온 이상으로 되팔 정도의 값어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나드 한 옥합 세 제품은 약 600데나리온 정도의 값을 치루어야만 구입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 1데나리온의 값어치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오늘날로 하루 막노동 값이다. 제가 대학생 시절에 생활비가 없어서 일용직 막노동을 몇 번 나간 적이 있었는데, 소개비를 제외하고 하루 45,000원을 받았다. 요즘은 7만원 정도 받는다더라. 400 데나리온을 오늘날 7만원으로 기준 삼아 계산한다면 이 한병에 2,800만원 정도에 달하는 금액이다.
특히 당시 여인들의 사회적 입지가 매우 좁아서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 금액은 이 여인이 평생토록 준비하고 모았던 돈이며, 어쩌면 자신의 결혼지참금으로서 모아왔던 금액일 수도 있다. 따라서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은 곧 자신의 꿈과 미래, 결혼, 노후까지 대비할 정도, 아니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은 곧 그녀 자신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

이 여인은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다. 오늘날처럼 병뚜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밀봉되어있는 도자기 용기였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옥합의 목이나 뚜껑 부분을 깨뜨려야만 사용할 수 있었다. ‘깨뜨려’에 해당하는 원어를 보면 ‘어떤 것을 부수어 산산조각을 내는 것’, ‘빻아서 가루를 만들정도로 부수는 것’ 등을 의미한다. 이 단어로 미루어볼 때, 이 여인은 예수님께 기름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남은 기름을 나중에 사용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용기를 깨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이 여인은 나중을 생각하지 않고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완전히 박살내어 예수님께 사용하는데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았다. 일부분 남겨두어 다른 일에 쓰려는 마음이 없었다. 8절 말씀처럼 그녀는 힘 있게 자신의 것을 주님께 올려드렸다. 자신이 드릴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예수님께 드렸다.

못 마땅히 여기는 자들

그런데 이것을 지켜보던 무리 중에 못 마땅해하던 자들이 있었다. 마가는 이 무리를 ‘어떤 사람들’이라고 두루뭉실하게 표현했지만 마태는 이를 ‘제자들’이라고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를 보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는 것이다. 5절에 그 여자를 책망했다고 하는데, 책망하다는 원어의 의미가 아주 강한 적대감과 분노를 함축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대접을 받으시는 장면을 보고 매우 강한 적대감을 보인다.
특히 사도 요한은 요12:4 에서 특별히 적대감을 발하던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주도적으로 분노하여 이 여인을 책망했음을 기록한다. 그의 주장이 무엇인가? 4절 말씀처럼 예수님께 쏟아부은 이 향유를 ‘허비했다’고 평가했다. 쓸모없이 소모해 버렸다는 것이다. 가룟 유다와 제자들은 이 귀한 나드 한 옥합이 아깝게 버려졌다고 여겼다. 다시 말해서 이 여인이 쏟아부은 그녀의 미래, 꿈, 결혼, 비전, 그의 모든 재산들이 쓸데 없이 허비되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적개심을 품고 노를 발하던 제자들을 향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6절에 보니 ‘가만두라’. 왜 이 여인을 가만두라고 말씀하시는가?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즉, 주님께 좋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행한 좋은 일이 과연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7-8절을 함께 읽어보자.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이 여인은 아마도 자기가 드리는 이 예물이 주님께 어떤 의미인지 모른 채로 드렸을 것이다. 뭔가 예수님께 인정을 받고자 혹은 예수님께 칭찬을 얻고자 드린 헌물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온 정성과 온 마음과 모든 삶의 가치를 주님께 올려 드렸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주님께 올려드렸다. 이를 주님께서는 주님께 좋은 일이라 평가하셨고, 이 여인의 예물을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으로 받아 주셨다.
그렇다면 본문의 말씀이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가? 두 가지를 말씀드린다. 첫째로, 주님께서 받아 마땅하셨던 그 경배를 헛된 것이라 비난하던 제자들의 무리에 우리도 끼지 않도록 주의하라. 당시 왕이나 높은 관료의 즉위식이 열리게 되면, 당연히 많은 지휘관들과 부관들이 즉위식을 준비하고 차질없이 거행되도록 챙겨야 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진정한 메시야의 오심을 기뻐하며 그분의 왕 되심을 만방에 선언했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2절에 등장하는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 압제에서 구원받았음을 기념하는 기쁨의 절기가 시작될 무렵에,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모의하는 패역함을 보인다. 저들은 집요하게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를 제거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연구하였다.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러하였다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주님을 바르게 섬겼는가? 아니었다. 저들도 이 여인의 헌신과 대접과 경배를 쓸모없는 일이라고 손가락질 했다. 제자들이라고 더 나은 점이 없었다. 오히려 제자들은 주님께 할 수 있는 최선의 예물과 헌신을 올려드린 이 여인의 행동이 나의 기준과 가치에 맞지 않을 때 비난하였다. 그 헌신이 아무 쓸데가 없노라고 화를 내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은, 주님을 함께 경배하는 자들을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사소한 일이면서도 가장 힘든 일이기도 하다. 왜인가? 하나님께 좋은 일을 행하는 자들의 행동이 나의 생각과 맞지 않을 때, 내 가치와 맞지 않을 때 우리는 그들을 쉽게 비난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좋은 일들이 많은데 왜 저사람은 저렇게 할까. 더 지혜로운 방법이 많은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할까" 그 사람이 정말로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겼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말이다.
생각해 보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시기 위하여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셨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며 이제는 그분이 오신 궁극적인 목표, 자기 백성의 죄에서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 절정의 순간을 준비하시던 때였다.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대로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고, 주님의 공적 사역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시작되었다. 볼품없고 가난하고 연약하고 병든 자들과 함께 거하셨고, 그분이 지나가시는 곳은 곧 천국이 되었다.
그 짧은 공생애기간 동안,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엄에 걸맞게, 온 세계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분의 권세에 걸맞게, 그분의 백성들이 과연 주님을 진정 높여드린 적이 있던가. 그 이름에 걸맞게 예수님을 경배하며 섬겼던 적이 과연 있었던가? 없다. 단 한번도 없다. 오늘 본문 속의 이 여인만이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께 최선을 다한 경배를 올려 드렸다. 다시 뭔가를 돌려받을 각오로, 뭔가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달라는 목적으로 경배하지 않았고, 그저 내가 가진 것으로 힘써 경배했다. 예수님의 사역기간 내내 이 여인만이 유일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 섬김과 경배와 헌신이 아깝게 낭비되었다고 비난한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받으신 처음이자 마지막 경배 마저 아깝다고 화를 낸다. 하늘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려 보내주셨는데, 우리는 그에 합당한 경배를 올려드리기는 커녕, 내 생각과 기준에 합당치 않다며 그 헌신과 경배가 아무 쓸모 없이 되었다고 분노한다.
여러분, 우리가 어찌 감히 우리의 형제들이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에 대하여 비난하고 화를 낼 수 있는가? 그것은 제자들이 했던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우리 교회 공동체, 신앙 공동체는 우리 형제들이 올려드리는 주님을 향한 경배와 찬양과 섬김과 헌신을 함께 기뻐해야 한다. 그 이름에 합당한 찬양을 서로 화답하며 아름답게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우리의 최선의 것들로 주님을 높이도록 함께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제들이 주님께 올려드리는 경배와 헌신을 바라보며 비판해서는 안된다. 내 생각과 내 기준을 그들에게 적용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저들에게 있어서 가장 최고의 헌신일 수 있고, 가장 최고의 경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함께 주님을 높여드리는 것에 기뻐하고, 함께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에 감격하며, 함께 주님께 헌신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란다.
둘째로, 우리도 이 여인과 같이 나의 가장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올려드려야 한다. 저는 물질에 국한시켜 말씀드리고 싶지 않다. 물론 우리의 물질을 최선을 다하여 주님께 올려드리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물질 만으로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이 여인이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부었다’는 것은 단 한방울도 남김없이, 아낌없이 주님께 드렸다는 것이고, 자신의 꿈과 미래까지도 모두 주님께 올려드렸음을 의미한다. 8절에 ‘힘을 다하여’라는 문장을 직역하면 ‘그녀는 할수 있는 것을 완전히 다 했다’ 라는 의미로서, 이 여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두 감당했다는 것이며, 이를 두고 예수님은 칭찬하셨다. 이것은 이 여인이 자신이 가진 물질을 힘을 다하여 주님께 올려드린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전 재산과 더불어 자신의 미래, 자신의 인생, 자기 자신을 주님께 올려드린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성도는 마땅히 자신의 몸과 마음,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주님의 손에 올려드리는 자이다.
온전한 헌신이란 무엇인가? 이 여인과도 같이 나의 가장 귀한 것으로 주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다. 나의 모든 것들을 주님께 귀한 보배로 올려드리는 것이다. 내 꿈, 내 미래, 내 시간, 내 정성, 내 열정, 나의 모든 것들을 말이다. 우리가 주님께 나의 전부를 아낌없이 올려드릴 때에, 예수님은 진정 그들의 전부가 되어 주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보배 중의 보배요, 자기 자신보다 귀한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라고 명하셨다. 아브라함이 이 명령에 순종하여 자기 자신보다 귀한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전부가 되어 주셨던 것이다.
그렇다.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라고 고백하였다. 또한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라고 권면한다. 이 두 말씀에서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나를 죽이는 것이다. 나를 온전히 주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다. 내가 번제단 위에 올려지는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데 여전히 죽기를 거부하고 살려고 아둥바둥한다면, 내가 십자가 위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야 하는데 박히지 않으려고 아둥바둥한다면, 나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린 것이라 할 수 없다. 온전한 헌신이라 할 수 없다. 주님께 내 모든 것을 올려드리고, 주님께 내 미래를 맡겨 드리고, 주님께 내 사랑하는 것들을 아낌 없이 내어 드리고, 더 나아가 나 자신까지 아낌없이 주님께 올려드릴 때에, 주님이 내 전부가 되어 주신다. 주님이 내 모든 것이 되어 주신다. 주님이 내 미래가 되어 주신다.

결론

이제 말씀을 정리하려 한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사도 요한이 장차 일어날 일들을 환상으로 보게 된다. 그 환상 중에 택하심을 입은 모든 성도들이 천사들과 함께 모여 한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영광으로 충만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모습은 장차 주님 오실 날에 성취될 말씀이기도 하지만, 지금, 오늘, 지상의 교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함께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가 함께 주님을 높이고, 함께 주님을 노래하며, 함께 주님을 예배하고, 함께 주님께 우리의 모든 것들을 아낌 없이 내어드리는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온 교회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모든 성도들이 나의 최선의 것으로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께 기꺼이 내어드릴 때 어떠한 복을 약속하셨는가? 주님께서는 이 여인이 행한 일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그곳이 어디든 함께 전파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기억될 성도가 될 것이다.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최선을 다해 올려드리는 자들 모두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날마다 주님께 내 귀한 모든 것들을 올려 드리시어,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기억될 저와 여러분들, 그리고 우리 양문교회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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