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친히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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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 설교
일시 : 2021.10.20
본문 : 출애굽기 33장 12-23절
제목 : 내가 친히 가리라
설교자 : 윤영준 목사
주제 : 주여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대가는 처참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내 백성’이 아닌 ‘네 백성’ / ‘모세의 백성’
‘내가 인도하여 낸 내 백성’이 아닌 ‘모세가 인도하여 낸 네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나’와 ‘너’ / ‘내’와 ‘네’ 한 음절의 차이지만, 이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는 하나님에게 ‘내 백성’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사랑하고 구원할 대상이었지만,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어진 지금은 ‘네 백성’이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 책임관계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상 숭배라는 죄를 통하여, 3천명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모세는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그러한 모세의 목숨을 건 두 번의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시려는 의도를 돌이키시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3장 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보다 천사를 앞서 보내시고, 이방 민족들을 몰아내시며,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모든 것이 잘 마무리 된 것처럼 보입니다.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갈 여행이 준비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뒷부분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너희들은 가라. 그러나 나는 함께 가지는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과 동행하시기를 멈추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가기를 멈추시겠다는 것입니다.
죄의 무서운 점이 바로 이러한 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에 대한 최종적인 결과는 육체적 죽임이 영원한 죽음이 된다는 무서운 형벌입니다.
살아있을 때에도 죄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떨어뜨려놓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멀리하도록 하고, 단절시킵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죄’라고 부를 만한 일이 드러난다면, 아무리 원만하고 좋았던 관계도 흔들리게 됩니다. TV에서 나오는 잉꼬부부가 누가 있을까요? 최수종하희라 / 션정혜영 부부처럼 금슬이 좋은 부부도 만약 배우자의 ‘부정한 관계’가 드러나게 된다면 단숨에 위기가 찾아옵닌다.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것도 당연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부부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단절된 관계를 이전처럼 원상복구하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할까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죄’를 이와 같이도 정의합니다.
“죄는 우리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하게 한다.”
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영적으로 단절시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하나님을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서먹서먹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하나님의 품에 온전히 안기기 전까지 죄를 멀리해야 하고, 죄를 미워해야 하고, 죽기까지 싸워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 관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로 인해 언약을 깨뜨리고 관계가 깨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말합니다. “너희는 가라.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취하라. 그러나 그때 나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신다면 어떠할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어떠할까요?
하나님이 안계신 삶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죠.
교회는 어떠할까요?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교회는 아무것도 아닌 공간에 불과한 것이죠.
하나님께서 안계신다면, 모든 것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희망적인 이야기들을 서로 나눈다고 할지라도, 그저 바람이 불면, 정처없이 휘날릴 먼지와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셔야 우리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계셔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가정,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떠나신다는 소식에 슬퍼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그들에게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오히려 친구처럼 대면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한 중보자 모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다시금 하나님께 세번째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1. 모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12-13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않으셨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모세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안에서 나오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으며, 하나님께서 이름을 기억하는 자로서 할 수 있는 기도였습니다.
모세 기도의 강조점은 ‘어디에 가느냐’ / ‘어떻게 가는냐’가 아닙니다.
모세에게 진짜로 중요한 점은 ‘누구와 함께 with 가는가’입니다.
모세의 기도 안에서는 간절한 하나님을 향한 간구함이 느껴진다.
어쩌면 대부분 사람들의 관심은 가나안 땅에 언제 들어가는가? / 가나안 땅에 어떻게 가는가? /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였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 필요없습니다.
주의 천사가 함께 가는 것 = 필요없습니다.
오직 나와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백성이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으신다면 나도 보내지 마소서라는
마음으로 기도한 것이죠.
[예시]
누구나 그러하시겠지만,
저도 사춘기를 제법 세게 보냈습니다.
제가 사춘기 시절 반항기에 스스로 가출을 하거나 한 것은 아니고,
얼마나 속을 썩혔는지 어머님을 가출시킬 뻔 했습니다.
어느 날, 무엇때문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한 것 같았고, 어머님께서 대단히 화가 많이 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알랑한 자존심을 지킨다고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말하기보다 오히려 내가 뭘 잘못했는가 따지고 대들었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한참을 들으시더니 갑자기 일어나셔서, 장롱 위의 찬장에서 캐리어 가방을 꺼내셨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머님께서 그저 뭐하시는가 보고만 서있었습니다. 그런데 서랍장들을 여시고, 주섬주섬 짐을 하나씩 싸시는데 어느덧 커다란 가방에 짐이 한가득 쌓이고, 지퍼를 닫는 것이 아니시겠습니까?
그제서야 제 마음 한 편이 싸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음이 덜컥하면서 무서워지는 것이죠.
“진짜로 어머니께서 떠나시면 어떻하지?” “진짜로 어머니께서 나와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지?” “나 혼자 어떻게 살아가지?”라는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방안에서 나오시는 어머니를 붙들고,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리며 용서를 구했고, 한참 동안을 앉아서 운적이 있습니다.
지나고보니 그 때의 욕심들, 내 마음대로 하고자 한 것, 내 의견을 피력하는 것 모두 중요한 것이 아니더라고요. 그저 어머니와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 모든 것을 뒤덮었고, 어머니께서 함께 하신다는 안도감이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는 경험이였습니다.
성경인물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이 좋은 곳만 다니고,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경험한 사람은 아니였습니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생명의 위협을 경험할 때도 있었죠.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고백했을까요?
“그래도 괜찮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괜찮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내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골짜기를 다녀도 괜찮습니다. 주게서 나와 함께 하시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 풀밭이며 쉴 만한 물가입니다.
아무리 안락하고 편안한 장소 / 부요한 가나안 땅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시면? 삭막하고 황폐한 곳입니다.
사망의 골짜기라 할지라도 / 하나님께서 동행하신다면 그곳이 풀밭과 쉴만한 물가, 안식처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이 모세의 고백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모세의 마음을 모르실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정말로 원했던 답변을 해주셨다.
14절입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에게 이보다도 더 위로되는 말이 어디있을까요?
모세에게 이보다도 은혜가 되는 말이 어디 있을까요?
[예시] 오래 사신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여보, 그동안 고생했지” 말해도 눈물이 왈칵 할텐데… 하나님께서 말하여주시는 것이다. 그동안 고생한거 내가 다 안다.
목이 뻣뻣한 말안듣는 노새처럼 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오느라 고생한 거 내가 다 안다. 너의 바람대로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 내가 함께 가서 너를 쉬게 하겠다.
하나님의 약속하심은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요. 안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여러가지 삶의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재정 / 자녀 대학 / 집 문제 / 남들이 다 가지고 있다는 집을 갖는 것일까요?
우리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와 동행하고 계시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이름을 아시고, 내가 하나님과 대화하며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지 않는데…
부와 명예와 지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오늘 그 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데…
그 어떤 학업과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계셔야 이 모든 것이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야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진짜 쉼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모세에게는 공동체를 향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리라 너를 쉬게 하리라 하면 어떻게 할까요?
아멘! 아멘! 너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기도산을 내려올 것입니다.
보통 문제들을 싸짊어지고 기도하러가서 “내가 친히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말씀들으면 기도응답받았구나 생각하면 기도의 자리에서 내려올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내려가지 않습니다. 기도의 자리를 지킵니다.
모세가 위대한 영적인 리더요. 위대한 중보자인 이유는 자신의 기도응답에서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문제를 들고 하나님 앞에서 버티며 끈질지게 붙듭니다.
아론은 모세와 하나님의 책망과 진노 앞에 = 백성들을 향한 탓을 했습니다.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아론은 백성들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 우상을 만들고, 정작 그 책임은 백성들의 악함에 돌렸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정반대로 행한다. 백성들에게는 불평 / 불만을 들을지라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거대한 하나님의 진노 앞을 막아서며 그들을 위해 다시 기도합니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모세는 응답받고자 하는 대상이 ‘우리’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직 내 백성이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아직 이들과 함께 가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끈질기게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집니다.
이런 면에서 모세의 기도 모습은
하나님과 밤새도록 씨름을 했던 야곱과 닮았고,
산 위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를 원하고 계십니다.
모세가 거대한 진노의 칼을 드신 하나님의 앞을 막아설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가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있는 자비하심을 알았고 경험했기에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17절입니다.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마침내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임마누엘’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가운데 구별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 ‘임마누엘’을 통해서입니다.
주일설교 가운데 사탄이 모든 권세를 다준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고개숙이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을 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바꾸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전부이시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부이다.
우리의 오늘의 삶, 우리의 목표들도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고 동행하기 위한 것들이 되어야 한다.
3.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마지막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에게 보여주소서”
이 기도는 어떤 것을 요구하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 경험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요새 집 근처에 무인편의점이 새로 생겨서 퇴근하고 며칠 동안 먹을 것을 사서 들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현관 비밀번호를 띠띠띠띡 누르고 들어가면, 큰 딸 하연이가 어떻게 할까요? “아빠~~~” 하고 달려옵니다. 아빠하고 달려오면서 안기거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제 손을 봅니다. ‘오늘은 또 뭐 사왔나?’ 바라보고, 봉지를 가져가서 좋아합니다.
어느 날 이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하나님께 그러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하나님께 나아가면서도 주님의 얼굴이 아닌 손만을 바라본 것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모세는 하나님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도 구하는 사람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체를 경험하는 것 /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진정한 삶의 기쁨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시죠.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시간 우리의 첫 목표가 하나님의 얼굴, 임재를 구하는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도 좋고,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시는 가나안 땅도 좋고,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는 것도 좋지만,
저는 하나님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싶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싶습니다.
라는 고백이 흘러나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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