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4-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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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자의 복
본문 : 롬4:4-7
우효동 강도사
아이둘이 싸웠습니다. 부모가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왜 싸웠어’ 라고 자연스럽게 묻습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로마서 하면 드는 생각은 왜 썻을까? 해야 하는데 ‘어렵다’, ‘신학적이다’, ‘ ‘접근하기가 힘들다’ 라고 외면합니다. 이런 것을 선입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왜 로마서를 쓰게 되었는지 배경부터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다음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행18:2(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 여기에 정보를 보면 당시 글라우디오 로마 황제가 모든 유대그리스도인을 로마에서 추방한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 로마의 4번째 황제로 인데요. 그러니가 ad 49년즘 되는 때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가서 로마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던 거라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초기 로마사회는 다양한 소수민족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을 포용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전하는 유대 공동체가 이제는 로마인, 헬라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면서 다양한 갈등이 일어났고 이런 갈등이 결국 로마 황제 입장에서는 그냥 둘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추방령이 발동을 하고 역사에 의하면 25,000명에 이르는 대다수의 유대그리스도인들이 추방 당할 때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도 포함된 것을 알 수 있죠. 그리고 5년이 지나서야 추방령이 풀렸고 다시 유대그리스도인들은 로마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이때 돌아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남아 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갈등이 더 심하게 발생하여 로마 교회가 거의 분열될 위기 앞에 놓였던 상황입니다. 이미 오랜 시간으로 변했다고 본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관습법 , 안식일과 음식법 특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들이 왜 중요하냐 믿기만 하면 되는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분열을 초래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서로 다른 믿음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던 그들에게 바울이 편지를 하는 이유는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이 다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가 되어야 함을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믿음을 통해 하나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하나됨을 통해 로마를 중심으로 더 멀리 서바나 즉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열망했다는 것입니다.
2022년을 시작하면서 여전히 우리는 코로나 19라는 여파 속에 있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마스크를 쓰는 것이 당연하듯 받아들입니다. 2년여 시간을 보내면서 예배의 방식에 대한 성도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백신을 거부하고 안맞을 권리를 주장하는 교회나 성도들 역시 심심치 않게 언론 매체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때론 우리가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과도하게 분리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보다 더 가까이는 이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성도와 그렇지 않는 분들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나는 어려운 시간에도 교회에 열심히 출석해서 예배를 드렸는데 백신도 맞고 했다면 빨리 예배에 나와야지 뭐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볼멘 소리도 할 수 있고 반면,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아서 나는 인터넷을 활용해서 예배를 드릴 것이라고 하는 분들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편지하면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우리가 어려워하는 것은 바울이 사용한 용어들에 있습니다. ‘의롭게 한다’, 이것을 나타내는 ‘칭의’와 같은 말들에 어려움을 느끼지만 실제로 풀어보면 ‘로마에 전하는 복음 곧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는 서신이 로마서다’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장에 앞서 편지를 쓰는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사도가 되었다고 소개합니다. 따라서 이 편지는 그만한 권위를 가지고 쓰고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선언하고 있는 셈이죠, 1장 1절에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이는 바울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진짜 복음이라는 것이죠. 계속해서 그 내용이 자신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라고 시작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늘 아버지 하나님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입니다.
그런데 1장 후반부에서 이방인을 향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 죄와 이기심이라는 악순환의 덫에 갇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대표적으로 이방인은 우상을 찾고 만들고 그것에 자신을 바치는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되고 이것은 결국 공정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 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어떨까요? 이방인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럴줄 알았어, 너희는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이니까 당연한거 아니야.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셨고 그 중거로 율법을 주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안식일과 음식법도 주셨으니 우리는 너희와 달라’.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니다 오히려 율법을 악용하고 더 우상숭배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사실은 이방인 보다 더 무거운 책임과 심판이 따른다는 것을 2장에서 말합니다.
그 결과 여러분이 로마서 하면 제일 잘아는 말씀이 나옵니다.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지만 이렇게 끝난다면 인간은 절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께서 심판 아래 있는 이방인이나 유대인 곧 모든 사람앞에 ‘ 한 의가 나타났다’고 바울이 선언하는 것입니다.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은혜로 값없이 주셨다는 것을 통해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지키고 안식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해야한다는 주장을 올바로 교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방인에게는 은혜를 통해서 주어진 것을 보다 선명하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28절에 ‘믿음으로 된다’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로 마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시지만 유대인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했고, 이방인은 믿음을 통해서 나아가려고 했던 것이죠. 교회 안에서 저와 여러분이 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양에 여러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예배전에 찬양을 통해서 어떤 분은 기도를 통해서 어떤 분은 말씀을 듣는 시간을 통해서 이런 과정에서 보다 과하게 주장을 하면 나는 찬양시간이 많아야 좋다, 아니다. 기도하러 나와야 은혜를 받지 않냐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중에 드는 위험한 생각은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그렇게 된다는 생각입니다. 유대인들은 선백받은 민족으로써, 율법을 가진 민족으로써, 안식일을 지키는 모습으로써 인 것이죠.
그래서 그들을 향해서 두 사람을 제시합니다.
한 사람은 아브라함이며 또 한 사람은 다윗입니다. 이 두 사람의 특징이 바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아브라함은 자기가 행한 것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믿은 것 때문이라는 것이죠. 바울은 이것을 더 강하게 설명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시작입니다.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은 말 그대로 보상입니다. 그러니 보상으로 받은 것을 은혜와 비교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면서 그로 인해 선민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경건하지 아니한 자가 의롭다는 이야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세리와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니 바리새인들은 울화통이 터진겁니다. 경건하지 못한 자는 결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 보일 수 없는 것이죠. 제사를 통해서 먼저 경건의 상태를 유지하고서야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키고 음식법을 지키고 더 나아가서 할례를 행하고서야 교회 공동체에 들어 올수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가장 으뜸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아브라함이야 말로 은혜로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저와 여러분들은 여기까지는 이르렀습니다. 복음이 우리를 죄가운데서 구원하셔서 이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예배하는 기쁨에 나아가 함게 즐거워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까지 충분히 나아가서 누린다는 사실이 오히려 한국교회에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라고 하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과 지켜 행해야 하는 계명을 말씀을 소홀히 여기기 때문인데요.
앞서 읽었던 3장 마지막절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는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을 통해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닌 은혜로 받은 그 가치에 대해 두번째 다윗을 등장시킵니다. 여기에서는 다윗이 말한 바를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니 증인이 말하는 셈이니 얼마나 강력하겠습니까 ?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다윗은 자신이 ‘불법한 상태’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은혜을 점진적으로 더 강력한 비교를 합니다.
처음에는 행위와 비교를 했고
그 다음은 일하는 자의 삯으로
그 다음은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대상으로
그리고 불법한 자에게 까지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8절에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함과 같으니라 고 말입니다. 일을 하지 않았는데 삯을 받으면 ‘참 고마워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경건하지 않는 자’를 만나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의 마음’을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자에 대해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 까지 나아간다면 어찌 될까요?
여러분 정말 말로 할 수 없는 죄를 짓고 용서를 받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윗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다윗이 한 두가지가 아닌 범죄의 종합선물 세트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야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범함으로 살인하지 말라라 6계명. 간음하지 말라 7계명. 장군을 죽임으로 그의 가정에서 삶을 빼앗는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로 자신의 살인을 숨기고자 했던 행동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10계명까지 결국 이모든 행동은 하나님과의 대신관계를 깨뜨리는 곳 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롬1:29-31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까지 거론된 이방인의 죄와 무엇이 다릅니까? 그 결과는 롬1:32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입니다. 죽어 마땅한 상태의 다윗이 받은 그것이 은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베풀어진 것이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을 다시한 번 들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주의 인자하심 (노래) 이 의의 모습입니다. 인자하심으로 하신 행동이 다윗에게 그의 엄청난 죄를 ‘지우는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쉬운 말로 ‘죄사함’이라고 합니다. 두 그룹 곧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바로 여기 은혜에서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나타난 ‘죄사함’에서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그 장본인이 바로 ‘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는 행13:38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죄 사함을 전한다고 했으며 이어서 행13:39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죄사함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는 바울의 놀라운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다윗에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윗이 받은 복이 이것입니다. 그렇게 의롭다하심을 받은 다윗은 주를 만날 기회를 얻고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시32:6 함께 읽겠습니다.
6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22년 우리 교회는 다시 기도로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께 기도할지라고 했던 다윗은 죄사함의 은혜에서 출발했습니다. 이것이 주를 만날 기회를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