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이름 찬양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470 viewsNotes
Transcript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매월 마지막 주가 되면 제 마음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여러 모로 많이 부족한 제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또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이신 여러분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날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는 그 거룩한 부담감이 몇 배로 밀려왔습니다. 오늘의 설교가 2022년 1월 첫 주 금요일의 설교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전하고자 하는 말씀이 하필 욥기입니다. 그래서 여러 고민들이 있었습니다. 이 잔을 목사님께 넘겨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두려운 마음 반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를 통해 행하실 일들과 위로를 기대하는 마음 반을 품고 열심히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밤 저와 여러분에게 주실 풍성한 은혜와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함께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2022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한 해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넓게하시는 해, 넓어지는 해’입니다. 송구영신 예배 때에 목사님을 통해 들은 창세기 26장의 말씀을 따라 저희가 함께 보낼 2022년, 저와 여러분의 마음과 삶의 지경이 넓게 되는 풍성한 은혜가 가득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넓어지다의 단어에는 반댓말이 있습니다. 좁아지다 이지요. 우리의 마음과 삶의 지경이 넓어지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를 좁게 하고 좁아지게 만드는 것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실까요?
우선은 우리보다 훨씬 커 보이는 상황과 환경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했을 때에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정탐꾼들을 보냈습니다. 이 때에 정탐꾼들이 거대한 아낙 자손들을 보며 스스로를 메뚜기와 같이 여기며 그들의 마음이 좁아진 것을 봅니다. 아마 그대로 두었다면 그들의 삶의 지경 또한 좁아진 채로 가나안을 정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무엇이 있을까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봄으로써 스스로의 마음과 삶의 지경을 좁히게 되는 경우를 많이 소개합니다. 이 경우의 몇 가지 예는 우상을 섬기거나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욕하고 미워하며 시기와 질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눈앞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며 끊임없이 비교함을 통하여 자신의 삶의 지경과 마음을 좁게 만듭니다.
성경뿐만이 아니라 우리 실생활 속에서도 마음이 좁은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말들은 아니지만, 저 사람은 참 옹졸하다. 저 사람은 참 좀생이다. 라는 말들이 그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말 대신 저 사람 참 너그럽다. 저 사람 참 넓다와도 같은 말을 듣는 2022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와같이 성경은 우리를 작아지게 만들고 우리의 삶의 지경과 마음을 좁아지게 만드는 것들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며 어떻게 우리의 삶의 지경과 마음을 좁게하는 것, 좁아지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넓게할 수 있을까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욥.
욥.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야 할 때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성경을 통해 성경 속 사람들을 만날 때에도 그렇습니다. 성경을 읽다 참 반가운 사람이 나오는가 하면 묵직한 한 방을 품은 사람들이 있어서 만나기가 꺼려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게 누군가가 성경을 읽을 때에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을 꼽으라면 저는 ‘욥'을 꼽습니다. 욥이라는 인물은 고난의 대명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욥과 같은 자를 심방하라고 한다면 눈앞이 깜깜할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에게 아침마다 권징을 당하고 순간마다 단련을 당한다고 느끼는 욥. 그 가운데 침을 삼킬 때마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주시하시는 은혜(?)를 느끼는 욥. 저는 그래서 욥기를 읽을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과 함께 참 무거운 마음과 눈물을 가지고 읽게 됩니다.
욥기의 본문은 욥이라는 사람을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굉장히 착실하게, 잘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들에게는 복을 주십니다. 그는 자녀의 복을 받았습니다. 열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는 물질의 복도 받았습니다. 건강의 복을 받았고 지혜와 지식의 복도 받았습니다. 그는 명예의 복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들로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혹, 자신이 심지어는 자신의 자식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까 하여 항상 자신의 행동을 살피는 자였습니다. 성경은 한 일화를 소개하는데요, 자녀들의 생일잔치를 했는데 그 때마다 혹시나 자녀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보니 욥은 태어남을 감사하며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하늘에 회의가 열리는 날이 있었습니다. 사탄 또한 그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이는 참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사탄이 감히 하나님과 함께 있다니 말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척을 진 사이라고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오히려 사탄이 하나님의 통치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어주고 있습니다. 사탄이 이 장소에 있다는 것은 사탄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어디에서 무얼하다 왔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하나님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노라고 답합니다. 사탄은 굉장히 바쁩니다. 아마 제일 부지런한 존재 중 하나일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을 것이니까요. 성경은 그를 속이는 자 혹은 참소하는 자라고 지칭합니다. 두루 다니며 여기저기에서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일을 하면 참 좋았으련만, 그는 속이고 유혹할 자를 찾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탄은 속이고 유혹하고 참소함으로 사람들을 좁히기 위해 두루 다니고 있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사탄에게 틈을 내어주어 좁아지거나 사탄과 같이 누군가를 좁게 하는 역할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넓어지고 또 우리를 통해 우리 주변도 넓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을 자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누군가에게 자식을 자랑하는 부모님처럼 욥을 자랑하십니다. 욥은 그 자체로도 하나님께 있어서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창조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전하려 노력하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얼마나 예뻐보이셨겠습니까? 우리 양 옆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어떤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 온전하려 노력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계시지 않습니까? 아멘. 이럴 때 아멘으로 우리의 마음을 넓히십시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으로 인해 온전하게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저와 여러분에 대하여 욥을 자랑하심과 같이 자랑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 그 마음으로 서로를 자랑하고 또 칭찬하고 축복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에 맞서서 하나님께 대꾸합니다. 굉장히 얄밉게 이야기했을 것 같습니다. Give and Take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하셨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소유를 모두 쳐 보십시오 아마 그가 하나님을 향해 욕을 할 것입니다. 사탄의 생각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주객이 전도된 질문이었고 동시에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경외를 했던 이유는 그가 생명이라는 복을 받았기 때문이었지, 물질과 자녀의 복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외적인 축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근본적인 이유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탄의 잘못된 이 생각은 세상 가운데에 널리 퍼져있는 것을 봅니다. 주객이 전도된 물질주의의 기브 앤 테이크가 세상에서는 이미 당연한 것으로 자리가 잡혔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내가 가진 것들을 비교하며 자신의 존재를 넓히기를 원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도 내가 이것을 가지면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하는 기도를 하는 자들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생각은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우리를 좁아지게 만듭니다. 우리를 넓게 하시는 분, 넓어지게 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기억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탄의 도전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사탄을 향하여 그의 몸을 빼고는 마음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아니 왜요? 하나님께 이렇게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께서 그토록 자랑하시던 욥을 보호하지 않으셔도 되는 것입니까? 하는 궁금증과 억울함이 불쑥불쑥 솟아오르시지 않으십니까? 만약 욥이 의인이 아니라 악인이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겠지만 고작 사탄의 도발 한 마디에 허락하시다니요! 그리고 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핵심은 욥이 얼마나 의인이었나가 아닙니다. 오히려 욥의 고난과 그 고난을 받았을 때의 욥의 태도에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우리를 넓혀갈 수 있는 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욥은 자신의 소유와 자녀들을 잃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립니다.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다는 것은 부끄러움과 수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는 굉장한 슬픔을 느꼈다는 표현입니다. 욥은 한 순간에 닥친 이유모를 고난들을 마주했을 때에 슬퍼했습니다. 욥은 그냥 슬퍼한 정도가 아니라 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슬픔의 끝에 욥은 한 가지 의아한 행동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예배'를 합니다. 그 예배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였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내게 주신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사오니 그것을 거둬 가시는 권리 또한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한 것입니다. 이는 사탄의 참소를 욥이 멋지게 이겨낸 에피소드이기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2차적으로 올 고난의 복선을 의미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선 오늘 본문에 집중하여 욥의 이 고백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0절 부터 22절까지의 욥의 태도는 우리가 가져야 할 이상적인 태도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주 이름 찬양이라는 곡이 바로 이 욥기에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잉글랜드 출신의 예배인도자 매트 레드맨이 작곡한 이 곡은 오늘 본문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주시며 주님은 찾으시네 라는 가사는 You give and take away로 써져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구원자이시며 그런 주님이 예배자들을 찾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주시고 또 가져가신다는 욥기에서의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의 삶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새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세 번 유산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 고난 속에서 그가 붙들고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인물, 그가 예배하기로 선택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 인물이 바로 ‘욥'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저주의 말들을 내뱉을 수 있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였습니다. 이유 모를 고난들이 갑자기 닥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욥의 고백에는 자신이 아무것도 없는 자였으며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남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복이 도덕적인 인과율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전적인 계획하심과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그 섭리 안에서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받아들였고 이에 주신 이가 여호와이시니 거두신 이도 여호와라 고백한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한 이유와 원인을 하나님 앞에 묻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욥의 고난에 이유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욥은 왜 고난을 받아야만 했고 욥의 소유와 욥의 자녀들은 왜 죽어야 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도덕적인 인과율'에 따라 욥기를 이해하려고 애씁니다. 이는 사탄이 하나님께 말했던 잘못된 기브 앤 테이크의 적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잘못이 있어야 벌을 받고 잘 한 것이 있으면 복을 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인과율을 적용하면 결코 욥기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이후 욥의 몸을 치는 고난 앞에 욥의 세 친구도 욥의 상황을 인과율로 이해하려 애를 씁니다. 그의 친구들은 분명히 욥과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의롭게 여겼기 때문에 징계를 받고 있다고 욥에게 어서 회개할 것을 권합니다. 하지만, 욥은 끊임없이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며 하나님 앞에 읍소하며 하나님 앞에서 그 고난의 이유를 알기 위해 하나님과 변론합니다.
여러분, 실제로 욥은 죄가 없었습니다. 고난을 받을 만 한 이유도 없었습니다. 욥의 고난 받은 이유와 원인 대하여 말하라고 하면 저는 ‘모른다'라고 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답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의 당사자였던 욥 또한 결백함을 주장하며 하나님과의 변론을 신청하였으나, 하나님과의 변론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나서 태도를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은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다고 하며 그의 모든 말들을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한다고 고백합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도덕적인 인과율을 벗어나서도 고난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상황 가운데 욥은 이해보다는 믿음을 선택하였습니다. 내게 주어진 고난의 원인을 파악하거나 고난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고 예배를 선택했고 찬양을 선택하였습니다. 욥기 내내 욥은 하나님을 향한 욕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좌절하며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하고 자신의 결백함을 계속해서 내비칠 지언정 결코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정금과 같이 나왔고 그의 삶의 지경과 마음은 이전보다 더욱 넓어지게 되는 것을 욥기의 결론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적용
적용
여러분, 욥기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혜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 삶의 지경을 넓어지게 하는 분, 우리의 삶의 지경과 마음을 넓어지게 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 부, 명예 등과 같은 외적 축복 자체는 우리의 삶과 마음을 넓게 할 수 없으며 넓음에 대한 기준이나 본질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명예, 부, 건강과 우리의 상황과 환경 같은 것들이 우리의 삶의 지경과 마음의 기준이 된다면 우리는 결코 넓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순식간에 우상이 되어 되려 우리를 좁게 만드는 요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가운데에 욥과 같이 우리의 태어남에 감사하며 ‘당연한 것'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으며 우리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성도는 잘못 없이도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도덕적인 인과율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 없이도, 그러니까 죄 없이도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예로 우리는 지금도 바이러스로 인한 고난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고난을 겪어야 할 이유를 말하라고 한다면 아무도 쉽게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 또한 그 이유를 알고 속 시원히 여러분과 나누고 싶으나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고 이 또한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주권적으로 진행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오늘 예배 가운데에 나아왔으며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또한 이 같은 상황 뿐 아니라 어떤 시련과 고난 그리고 환난 가운데에서도 그렇게 계속해서 나아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셋째로 욥은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욕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삶의 지경과 마음을 좁아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 때에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고 스스로를 그 섭리 안에 맡기며 예배와 찬송함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연단하시고 넓히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자기가 정금같이 나올 것이라 욥은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 가운데에 슬픔을 느끼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욥 또한 자신의 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며 자신의 슬픔을 토로하였습니다. 자신의 고난 앞에 욥은 솔직히 자신의 결백함을 고백하고 심지어는 자신을 죽여달라고까지 하나님 앞에 절규합니다. 그러나 욥은 좌절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태어난 자신에게 모든 것을 주셨고 또 취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고백하고 찬양하고 예배했습니다. 이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계속 무거운 주제로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욥기의 이러한 지혜는 매트 레드맨에게 그러하였듯 우리에게 위로와 힘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의 고난과 상황이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도덕적 인과율이라는 세상의 틀에 여러분을 맞추지 않기를 원합니다. 세상은 인과율의 논리 속에서 고난과 재앙이 있을 때 그것이 자업자득이라 말합니다. 고난은 수치요 희망없음임을 말하고 무력함 앞에 스스로를 좁히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고난이나 아픔, 질병, 가난, 장애 등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징계를 받는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러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과 시련들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게 될 도구가 될 것이라 말씀해 주십니다. 이것이 세상 속에서 고난을 맞아 고군분투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욥의 고난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큰 위로가 되는 이유입니다.
혹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시련의 광야 가운데에 계십니까? 어려운 상황과 환경 가운데에 계십니까? 아니면 평안함 가운데에 계십니까? 풍족함 가운데 계십니까? 어떤 시기에 있던 그 시기를 통해서 우리 삶의 지경 그리고 마음이 넓어질 것을 기대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만약 어려움 가운데 계시다면 지금 당장은 내게 닥친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끊임없이 예배하고 찬송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의를 드러내시고 우리의 삶의 지경과 믿음을 더욱 넓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들 속에 의심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기에는 하나님을 믿을만 한 근거가 정말 많기에, 그 근거들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시고 예배함으로, 찬송함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넓어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예수
마지막으로 제가 성경 속에서 만나기 싫은 인물을 한 명 더 살펴보려 합니다. 이 분은 참 만나기가 반가우면서도 싫습니다. 고난의 대명사 정도가 아니라 고난 그 자체이신 분,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저는 예수님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참 마음이 어렵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도 그렇지만, 성경을 읽으며 그분의 삶을 함께 따라가는 과정이 감사함과 동시에 괴롭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욥의 것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심방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세례 요한은 그 위대한 일을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담담하시지만 그 주변에서는 어쩔 줄 몰라 했던 것처럼 아마 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삶 자체가 고난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께서 이 땅 가운데에 인간으로 오신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상상조차 안 되는 고난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시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배가 고프셨을 때 음식으로 고난을 준다는 것은 정말 사탄의 사탄됨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매를 맞으셨고 채찍질을 당하셨으며 침뱉음을 당하시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고난에 이유와 원인이 있었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이라고 고발하였고 반란죄를 적용하여 예수님을 처형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 부분에 있어 무죄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을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분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을 이유도 그 원인도 없으셨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였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시자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유없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의 이유이자 원인이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요, 저와 여러분이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죄 없이 고난을 받은 예수님, 예수님의 삶의 지경과 마음은 항상 넓으셨을까?에 대한 질문을 감히 한 번 던져봅니다. 에이 당연히 하나님이시니까 넓으셨겠지라는 생각이 있지만 저는 예수님께도 위기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결코 넘어지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면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일은 애초에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이신 예수님께서는 넘어지실 수 있으셨고 고난과 환난 앞에 좁아질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라는 고난 앞에 자신이 두려움으로 인해 계속해서 좁아지려고 하는 자신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이겨내기 위해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기도했고 제자들에게 중보를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의 뜻이거든 혹은 하실 수 있으시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요청하십니다. 예수님은 땀이 피가 되기까지 애써 기도하십니다. 여기에서 십자가는 인간이신 예수님께서 감당하시기에 버거운 일이었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끝내 자신 앞에 펼쳐진 고난의 상황, 환경 앞에 좁아지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과 힘을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당하지 않아도 될, 이유없는 십자가의 처절한 고난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비밀이 풀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모두가 좁아졌습니다. 사탄은 내기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삶의 지경을 넓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넓히셨습니다.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주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더욱 넓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셨고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우리 가운데에 오셔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아멘.
적용
적용
예수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분을 따르기 위해 모인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이유 없이 그분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넓어짐의 지혜의 키워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를 따르는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각자에게 맞는 십자가가 있을 것이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 골고다 언덕을 올라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자기 부인과 죽음은 당장에는 우리를 좁아지게 만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오히려 우리의 삶의 지경과 마음을 넓히는 것이 된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진리는 머리로는 알아도 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는 고난도 받기 싫은데 이유없는 고난은 당연히 받기 싫습니다. 욥은 모르고 고난을 당했다고 해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알고서도 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던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우리를 사랑하시며 구원하시기 위해서이시겠지만 인간 예수에게 그것을 가능케 했던 힘은 습관적인 기도와 비록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할 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믿음에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그리고 예수님에게 저와 여러분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저는 이 고난을 우리를 믿음으로 ‘맡기신다'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을 고난으로 주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을 맡기시는 이유는 우리를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은 하나님께서 막으십니다. 욥을 치려는 사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몸은 건들지 마라 하셨으며 이어 목숨은 건들지 말라고 제한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를 지게 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각자 주어진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통하여 얻기를 원하시는 것이 있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난에 대해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정말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강조하시며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주는 자가 없고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는 자가 없으되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이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님을 따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모의 의도와 뜻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고난 가운데 우리의 위로가 되며 동시에 고난을 받아들이고 통과할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고난들을 통과하며 마침내 우리의 삶의 지경과 마음을 넓히게 될 것입니다.
정리
정리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욥기 1장과 예수님을 통하여 삶의 지경과 마음이 넓어지는 2022년을 위해 저와 여러분은 우리를 좁아지게 만드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넓힐 수 있는가에 대한 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욥은 이유 모를 고난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찬송함으로 고난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외부적인 축복이 결코 경외의 이유와 넓어짐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 그리스도인에게도 이유없는 고난이 닥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탓하고 원망하지 않는 것, 우리의 고난의 이유가 결코 징계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이유 없는 고난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믿음을 구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고난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를 따르는 우리에게도 각자의 십자가가 주어진다는 것, 그 고난을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상황과 환경 가운데 또 우리의 삶 가운데 이유와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발자취를 따라가야 하는 매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믿으심으로 우리 앞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고난과 십자가를 맡기십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욕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내려놓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욥과 예수님께서 그리하였듯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려하기 보다는 그분의 선하신 뜻과 섭리하심을 믿으며 나를 죽이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예배하고 찬송하며 기도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마침내 하나님의 때에 삶의 지경과 마음이 넓어지는 풍성한 은혜의 열매를 맺는 저와 여러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두려움과 부담이 아닌 힘과 위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