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따르는 사람들

요한복음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27 views
Notes
Transcript

[서론]
옛날에는 신화란게 이런 거 였습니다.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되었다 등.
이런 우리나라 신화도 있고, 그리스 신화같은 것도 있습니다.
잘아시죠?
제우스, 아프로디테 등등.
그런데 요즘은 과학과 학문이 많이 발전해 신화가 다시 나오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신화는 태어납니다.
57만원에 산 비트코인 50개, 10억찍고 파이어족 선언!
주식이나 코인이 대박나 30대에 직장 그만뒀다.
또는 부동산 갭투자로 스타벅스 건물주됐다.
창조주보다 건물주가 더 위대하다.
배우자 잘 만나 신분이 떡상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가 듣는 신화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화는 비단 세상에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에도 존재합니다.
사업하다 망해 자살하려고 했다가 주님이 도우셔서 다시 성공했다.
기도열심히 하고 성경 많이 읽었는데 서울대 갔다.
암 말기였는데 기도중 환상보고 암이 사라졌다.
저같은 목회자에게도 신화는 존재합니다.
성도 한명없이 상가 지하에서 교회를 시작했는데 기도 열심히했더니 초대형교회가 됐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런 신화가 있어 빡빡한 세상에서 그나마 소망이 있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말씀에도 이런 신화가 등장합니다.
과연 우리는 수많은 신화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본론]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은 유대인의 명절입니다.
무슨 명절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9절에 그 날이 안식일이라고 밝힙니다.
명절이라서 사람들이 많이 붐볐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 날은 기쁘고 신나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외롭게 소외된 자들이 있습니다.
눈먼 자들, 다리 저는 자들,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병자들입니다.
모두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병이 든 이유가 죄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하면 자신들도 죄 짓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피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유일한 소원은 몸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여있던 연못이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베데스다’란 ‘자비의 집’이란 의미입니다.
왜 이 사람들은 여기에 모여있는 것일까요?
3절 중간 괄호 부분에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사회는 우리나라처럼 목욕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는 간혹 온천물이 용솟음치는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우연히 병이 나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사가 내려와 치료해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만 치료받는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신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어떻게든 먼저 연못에 들어가려다 그 곳은 아비규환이 되었습니다.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꼬꼬무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수백억원의 범죄 수익금을 밭에 묻었습니다.
김치통에 오만원권을 넣어서 여러 군데에 묻어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찌어찌 밝혀져 수백억의 돈이 경찰에 회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줄 아십니까?
전국에 있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밭을 파볼 것 같죠?
아닙니다.
땅기운이 좋다며 그곳에 무당들이 몰려와서 누웠답니다.
그 곳에 무릎꿇고 비는 사람도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게 사람들이 신화를 만드는 방식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신화에 따르면 베데스다 연못에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만 병이 낫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건 경쟁이 일어납니다.
이런 경쟁이 일어나면 자비의 집, 베데스다는 무자비한 곳이 됩니다.
제일 먼저 들어가기만 하면 인생 대역전의 순간이 옵니다.
그러니 목숨을 걸게 됩니다.
그러나 경쟁에서 지면 비참합니다.
여전히 낙오자로 살아야합니다.
과연 이런 시스템을 하나님이 만드셨을까요?
천사들이 내려온다니까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런 무자비한 시스템을 만드셨을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만든 신화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신화를 꿈꿉니다.
자신이 신화 속 주인공이 될거라 착각합니다.
세상도 그렇게 우리를 속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보며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이 생각났습니다.
오징어 게임도 신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456억, 꿈에서라도 갖고 싶은 돈입니다.
거기에 나온 인물들도 모두 오늘 말씀처럼 눈먼자, 다리저는 자, 중풍병자들 같습니다.
세상에서 패배한 사람들, 다 잃고 절박한 사람들 뿐입니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 신화는 속임수입니다.
그 신화에 속아 수많은 자들이 죽어갑니다.
그 시스템을 만든 이가 있습니다.
그는 단 한명의 신화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습니다.
그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동안 병을 앓아 누워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38년이란 도저히 소망을 품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헤매던 기간과도 같습니다.
이 병자는 수십년을 움직이지 않아 뼈도 굳어버렸고, 근육도 굳어버렸습니다.
자포자기한 상태입니다.
오랜 세월 경쟁에 치여 연못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삶의 의지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그는 낙오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주목하셨습니다.
그에게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은 ‘낫고 싶으냐’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당연히 살고 싶었겠죠.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런 당연한 질문을 그에게 하신 것일까요?
그의 대답도 이상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질문에 그는 ‘예, 아니오’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물에 넣어주지 않아 치유를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원망과 불만만 가득합니다.
모두 남탓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기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와주는 사람을 못구한 건 자기탓입니다.
그는 천사를 욕하지 않습니다.
그런 신화를 만든 이를 탓하지 않습니다.
신화는 그의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날 제대로 서포트해주는 부모님이 없어서 내가 이 모양 이꼴이다.
내가 좋은 학교 안나와서 그런거다.
내 외모가 이래서 그렇다.
모두 나에 대한 불평, 불만뿐입니다.
신화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시스템 안에 시야가 갇혀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왜 이런 불평, 불만을 했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자신을 좀 연못에 빨리 넣어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고쳐줄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예수님이 필요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도우미일 뿐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1등하기 위해 도우시는 분일 뿐입니다.
이 점에서 38년된 병자와 우리의 인식이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분은 도우미가 아니라 삶의 구원자입니다.
38년된 병자는 움직이는 물이 자신을 구원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물 자체는 신화에 불과합니다.
그 물이 그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신화가 아닙니다.
그의 안에는 진정한 생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입니다.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오늘 이 38년된 병자도 말씀 하나로 그를 고치십니다.
8절, 9절입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가지고 걸어가거라.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38년동안 굳어있던 뼈와 근육이 한순간에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창조의 역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 시스템속에 떠도는 신화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진정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생명은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물이십니다.
그래서 바로 앞장에 나온 사마리아 여인을 예수님이 찾아가신 것입니다.
타는 듯한 삶의 목마름을 가진 그녀에게 생수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우리도 찾아오셨습니다.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세상의 여러 신화들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돈과 명예, 성공, 쾌락의 신화가 우리를 속입니다.
심지어 교회들도 온갖 성공 신화들로 우리를 속이려 합니다.
예전에 신림동 어떤 교회는 사법고시 배출자가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수많은 고시생들이 몰렸다고 합니다.
어떤 교회는 병고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하고, 치유받는 신화의 주인공을 만드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속지마십시오.
이러한 신화는 우리를 채찍질하여 더욱 피곤하게 만들 뿐입니다.
한병철 교수가 쓴 ‘피로사회’라는 얇은 책이 있습니다.
그는 만성피로사회가 된 것은 긍정성의 과잉때문이었다고 지적합니다.
신화가 우리의 긍정성을 자극합니다.
Yes, I can do it, Yes, You can do it.
그러나 이런 구호들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 뿐입니다.
실패하면 우울증환자나 낙오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시스템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 분이 주는 선물은 구원이며 쉼과 안식입니다.
무자비한 세상 속에서 그 분이 진정한 베데스다, 자비의 집이 되십니다.
물론 이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 경쟁시스템을 아에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경쟁은 좀 다릅니다.
올라가기 위한 경쟁이 아니고, 섬기기 위한 경쟁입니다.
혼자만 잘사는 경쟁이 아니라 함께 잘사는 경쟁입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경쟁 자체를 피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경쟁의 목적과 방향이 바뀌면 피곤하지 않고 자유해집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꿈꾸시던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세상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꿈을 이루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성공간증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신화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청년들을 모이게 하려면 이런 성공 간증이 필요합니다.
소위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이 간증하면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닙니다.
한편 유대인들에게 구원은 종교적 규율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얻어지는 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많은 종교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필 예수님이 기적을 행한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 날에는 누구든지 일을 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누가 일을 했을까요?
38년된 병자가 일을 한 것입니다.
오랜세월 깔고 앉았던 자리를 걷어가지고 걸어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만든 안식일 법에 따르면 그 날에는 무엇인가를 들고 가면 안됩니다.
그런데 그가 자리를 들고가서 안식일 법을 깨뜨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보며 그렇게 만든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그 다음날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38년동안 병자였는데 하루 늦게 고쳐준다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 날을 선택하셨습니다.
왜 일까요?
안식일의 궁극적 목적이 생명을 회복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안식일은 처음에는 창세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 1-3절에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비롯한 천지만물을 6일동안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칠일째 되는 날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칠일째 되는 날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안식일의 본래의도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일을 하지 않고 쉬는 날이 아닙니다.
그 날은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물질과 소유에서 벗어나 하나님만이 내 삶의 주인이심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런 점에서 안식일은 이 세상 시스템에 저항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주님 안에서 쉼을 얻으며 우리의 생명을 회복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6일째날 창조되고 난 후 첫번째 맞이한 날이 안식일이 된 것입니다.
먼저 주님 안에서 안식하고 난 후 일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달력보면 빨간색 일요일이 첫번째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일예배는 바쁜 세상에 나의 생명을 챙기는 필수적인 일입니다.
세상 속에서 흐트러졌던 삶의 초점을 재조정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명을 가장 크게 갉아 먹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죄입니다.
죄는 안식의 최대 적입니다.
죄가 있으면 내 육체와 영혼이 쉴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안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가 해결되어야 내 안에 진정한 쉼이 이뤄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4절에서 38년된 병자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실현하고 계신 것입니다.
베데스다, 자비의 집에서 자비를 베풀어 그에게 안식을 주신 것입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자비의 집, 베데스다에서 무자비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면서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깨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때에 우리 한국교회가 보인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코로나가 매우 심각한데 몇몇 한국교회는 주일날 대면예배를 고집했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목숨이라면서 대항했습니다.
안식일은 이제 우리에게는 주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일날의 근본정신 역시 생명의 회복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앞장서서 비대면예배로 바꿨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못했기에 한국교회는 엄청난 욕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교회에 대한 핍박이라고 우겼습니다.
그들과 유대인들이 다를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베데스다, 자비의 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자비의 집이 되어야만 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신화들이 돌아다닙니다.
일명 판타지입니다.
그 판타지들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아니 미혹합니다.
그러나 그 판타지들은 우리를 죽고 사는 경쟁에 집어넣고 희망고문할 뿐입니다.
오징어 게임 세상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런 판타지들이 판을 칩니다.
하나님 열심히 섬기면 세상에서 1등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판타지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속에서도 교회 속에서도 우리에게는 쉼이 없습니다.
피곤한 세상이고 피곤한 교회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피곤한 세상 속에서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영혼의 안식과 쉼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베데스다, 자비의 집이 되십니다.
세상의 헛된 소망을 붙들며 삶을 낭비하지 맙시다.
그래서 로마서 12:2 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 ‘본받다’는 영어로 conform입니다.
세상의 흐름과 시스템에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를 받다’는 영어로 transform입니다.
세상의 틀, 시스템을 변화시켜나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게 바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신화에 갖힌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이를 통해 치열한 세상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