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기준이 되게 하라
Notes
Transcript
기준 and κανών
기준 and κανών
세상에는 많은 기준들이 있고, 이러한 기준들은 우리가 생활을 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시간을 표시하는 기준으로서 초, 길이를 표시하는 기준으로서 미터, 통화의 기준으로서 원 등등이 있는데, 만약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불편했을까요? 친구와 약속을 잡을 때를 한 번 생각해봅시다. 시간에 대한 정확한 기준이 없는 세상에서는 아마 이렇게 대화를 할 것입니다. “해가 제일 높이 떠있을 때 소비자마트 앞에서 만나자!” 이렇게 약속한 두 친구가 하늘에 떠있는 해의 움직임을 보고 약속 장소로 출발한다고 할 때, 이들이 정확한 시간에 만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넉넉히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는 여유를 두고 기다려야 서로 만나게 되겠지요. 물건을 거래할 때를 생각해볼까요? 통화에 대한 정확한 기준이 없는 세상에서는 아마 이렇게 거래를 할 것입니다. “저기 있는 원피스 괜찮아 보이는데 어떻게 살 수 있나요?” “쌀 한 말에 가져가시던가 아니면 딸래미가 요번에 학교에 들어가야해서 가방이 필요하니 가방 하나랑 바꿔 가셔도 되겠네~” 이런 세상에서는 물건의 일정한 가격이나 편리한 거래는 꿈도 꾸기 어려운 개념일 겁니다.
이렇게 기준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활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에, 옛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왕들은 기준을 만들어 통일시키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이를 조금 있어보이게 말하면 도량형을 통일한다~라고 합니다. 도량형의 통일을 이룬 왕들이 누가 있을까요? 이들은 하나같이 후세에 길이길이 그들의 업적으로 칭송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을 예로 들어보자면 진시황이 있는데, 그는 부피와 무게와 길이의 기준을 통일시켰습니다. 치, 척, 리, 근과 같은 단위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어렵지 않게 듣는 말들이죠? 또 세종대왕이 있는데, 그는 길이, 넓이, 부피, 무게의 기준을 통일시켰다고 하네요. 그리고 오늘날의 시간의 기준인 초와 길이의 기준인 미터, 무게의 기준인 킬로그램은 대혁명 직후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기준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 생활 속 많은 일들이 가능하는 것을 생각해보니,우리에게 이렇게 정확한 기준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이런 기준과 관련해서 웃지 못할 헤프닝이 미국에서 있었습니다. 1999년 9월 미국의 NASA는 6600억원을 들여 화성 기후 탐사선을 쏘아올렸는데요, 이 탐사선은 목적지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대기권에서 불타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요? 원인은 너무나 어이없는 곳에 있었습니다. 조사 결과 실패의 원인은 서로 다른 단위 기준을 사용한 것에 있었습니다. 이 탐사선을 설계하고 제작한 록히드 마틴사는 미국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도량형인 야드, 파운드법에 따라 탐사선을 만들었는데, 실제로 이를 발사하고 조종한 NASA는 표시된 숫자들을 미터법 단위로 읽고 조종한 것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NASA는 탐사선을 지나치게 낮은 궤도로 진입시켰고, 그 결과 탐사선은 화성에 도착하자마자 터져버렸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실수로 인해 미국 자존심은 바닥에 떨어졌고, 천문학적인 돈이 허공에 뿌려졌습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여러가지 기준들이 혼재하는 이 세상에서 본래 설계하고 제작할 당시에 사용된 기준을 잘 이해하고, 그 기준대로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기준대로 할 때 본래 목표한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성경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정확하게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만, 사도 바울의 시대 이후 교회에서는 성경을 “κανών”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קָנֶה”를 소리나는대로 옮긴 그리스말에서 변형된 단어인데, 이 히브리어 카네는 갈대를 뜻합니다. 고대 중동 지역에서는 이 갈대를 기준으로 길이를 표현하였기에, 이것은 곧 기준, 표준이라는 뜻도 됩니다. 사도 시대 이후 교회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의 기준이 되는 책이라는 의미로 성경을 카논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구요. 성경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알 수 있듯 성경은 신앙 생활의 유일한 기준입니다. 이러한 의미로부터 그리스도인을 정의해보자면, 그리스도인이란 우리 신앙 생활의 기준이 되는 성경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성경
사도 바울은 신앙 생활의 기준이 되는성경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고 증거합니다. 여기에 쓰인 감동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θεόπνευστος”인데, 1차적으로 ‘하나님이 호흡을 불어 넣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죠?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의 코에 하나님께서 호흡을 불어 넣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기록된 성경은 다른 기록된 문서나 책들과는 달리 신적인 기원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녀가 인간의 행동에 의해 태어나듯, 성경은 인간의 손에 의해 쓰였습니다. 하지만 자녀 속에 있는 생명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듯, 성경 속에 있는 내용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만드셨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게 하셔서 만들어졌으며, 성경의 각 부분과 전체에 있어서, 그리고 그 내용과 문구에 있어서 하나님의 감동을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아니 사실 성경만이) 신적인 기원과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유일한 기준이 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을 통해 기록된 것이라고 할 때, 인간은 어떤 역할을 한 것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성경이 정확하고 무오한 것이라고 할 때, 어느 면에서 어느 정도로 무오한 것인지에 대해서 여러가지 논쟁이 있지만, 역사 속의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고백해온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의 신앙과 본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믿음과 실천의 길은 마땅히 성경으로부터 시작되고, 항상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준이 되는 성경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요?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많은 학자들이 성경에 대해 다양하게 평가합니다. 누군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담긴 역사책으로, 누군가는 중동 지역의 신화와 전설이 담긴 고대 설화로, 누군가는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이 담긴 경전으로 성경을 바라보지요. 각각의 관점이 어느정도 맞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성경을 단순히 역사책 중에 하나로, 고대 설화 중의 하나로, 종교 경전 중의 하나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담고 있는가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성경에는 진리가 풍성하게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의 다른 부분에서 바울이 그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가리켜 부를 때 성경이라고도 부르지만 진리의 말씀이라고도 부릅니다(딤후 2:15).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의 언어인 그리스어로 진리는 “ἀλήθεια”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뜻은 ‘본래 감추어져 있다가 밝게 드러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진리(알레세이아)를 깨달았다고 할 때, 인간의 영혼이 망각한 천상의 세계에 대한 기억을 되찾는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철학적인 훈련을 통해 즉,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에 무게가 실려 있지요. 반면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바울이나 요한은 그리스의 철학과는 다르게 진리에 대해 설명합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진리를 안다고 할 때, 인간의 유한함을 넘어 계시는 초월적인 하나님, 그래서 인간 스스로는 결코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인간들이 인식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인간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리스 철학자들과는 반대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즉,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고 여기는 것에 무게가 실려 있지요. 조금 이야기가 다른 길로 흐르긴 했지만 매우 중요한 내용이니 기억해두시면 좋겠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란 무엇일까요? 진리란 하나님에 대한 것들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하나님이 어떠한 일을 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과 함께 하시고 자신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지에 대한 모든 것들이 진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영적인 진리를 풍성하게 담고 있는 유일무이한 책입니다.
성경이 주는 유익
성경이 주는 유익
풍성한 진리를 담고 있는 성경,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우리의 신앙의 기준이 되는 이 성경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줄까요? 먼저 바울은 이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우리에게 준다고 증언합니다(딤후 3:15). 흔히 우리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부르지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성품으로 일어난 세상의 창조,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별한 피조물인 우리 인간, 성경은 인간이 창조주이시며 절대적인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질서를 해치며 살아간다고 단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이라 할지라도 지극히 사랑하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삼으시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믿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은 값없이 죄를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맞아주십니다. 스스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교만하고 가장 탐욕스럽고 가장 어리석은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지혜를 성경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만큼 우리의 절망적인 운명에 대해서 정확하게 비춰내며, 성경만큼 우리의 절망적인 운명에 대한 해결책을 확실하게 건내는 것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수많은 종교들이 나름의 구원의 방법을 제시합니다만, 한결같이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지금껏 살면서 경험해 본 바 그것이 단 1%라도 가능성이 있게 여겨집니까? 정말 우리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자신을 변화시킨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보아도 우리의 마음하나 제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는 타락한 피조물들이 아닙니까? 만약 지금 마음 속에 “나는 그정도로 절망적이고 연약한 것 같지는 않은데?”라고 의문이 든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서 아직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오직 성경에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습니다. 만약 다른 길을 선택한다면 그 길의 끝은 단언하건대 영원한 멸망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길을 성경이라는 기준에서 찾으십시오. 성경이 우리에게 건내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그 길에서 떠나지 마십시오.
또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줄까요? 바울은 성경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증언합니다(딤후 3:16). 이것을 원어의 뜻을 살려 조금 의역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성경은…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훈련하는데에 유익을 줍니다.” 여기에 나오는 네 개의 동사가 제시하는 네 단계는 사실 우리가 상당히 익숙한 것입니다. “제자양육” 많이 들어보셨죠? 여기 계신 분 중에 꽤 많은 수가 제자양육을 받으셨을 겁니다. 어떠한 사람이던 성장을 위해서는 양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목적을 가진 양육이던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훈련시키는 과정은 꼭 필요합니다. 바울은 지금 성경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양육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양육을 받는데 필요한 유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양육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세상의 많은 교훈과 가르침도 우리의 모습을 어느정도 개선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케 하고 완전함에 이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 우리로 더욱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구원의 시작도 성경으로부터 나오고, 우리 구원의 완성 또한 성경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니 이 성경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의 문제
우리의 문제
여기까지 잘 이해한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미 아주 잘 인지하고 있는 내용인 줄도 압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삶에서 이 성경이 주는 유익을 거의 누리지 못하는 채로 살아가는 때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데 필요한 모든 유익을 주는데, 왜 우리 삶에는 이런 유익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요? 레슬리 뉴비긴이라는 유명한 선교신학자가 던진 뼈아픈 말을 한 번 인용해보려 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는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 복음주의에 해당합니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한국교회만큼 성경을 읽는 것에 진심인 교회가 있을까요? 문제는 “읽는 것”에 있습니다. 말그대로 우리는 성경을 읽기만 합니다. 그것도 시간을 내어 집중해서 읽기 보다는 잠시 남는 시간에 인스타나 페이스북 피드를 스윽 내려가면서 보듯, 뉴스를 훑듯 힐끗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성경으로부터 조금의 가르침은 얻을 수 있겠지만, 성경으로부터 꾸짖음을 듣고, 성경을 통해 우리의 잘못을 바로잡고, 성경대로 바르게 살아가도록 훈련하는 데에는 전혀 이를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성경대로 나를 변화시켜가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은채, 그저 힐끗 보는 것으로 우리의 할 일을 다 마쳤다고 하기에는 너무 부끄럽지 않을까요? 마치 하나님께서 근사한 저녁을 풀코스로 준비하셨는데, 에피타이저만 먹고 급히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런 어리석고 민망한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나요?
사람은 분명히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두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성경을 기준으로 삼지 못할 때 우리의 기준은 무엇이 될까요? 세상을 살며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것, 그것 중에서도 우리의 탐욕스러운 마음에 맞는 것들이 우리의 기준이 됩니다. 우리의 기준이 변하는 순간 우리는 점점 세상이 말하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진리를 고수하기 보다는 쉬이 타협하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기 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과 명예와 권력을 쫓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이 그런 모습입니까? 이 세상의 하나님의 기준에 반하는 모든 사상과 가르침과 종교의 배후에는 사실 우리의 원수 사탄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본래 계획하신 기준대로 살아가기보다 우리가 욕심을 내서 바라는 기준대로 살아간다면, 나사가 수천억의 돈과 수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조롱거리가 되었듯이, 우리의 삶도 결국 실패와 조롱으로 마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마지막이 헛된 수고 끝에 얻는 실패와 조롱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영광과 존귀입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모습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라면, 우리를 게으름과 나태함과 안일함에 내버려두지 맙시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가까울 수록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잃도록 만드는 어둠의 권세가 강하여 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1절부터 8절까지를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거센 세상의 도전 앞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새번역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는 그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여기 “거하라”, “머물라”라는 단어에 사용된 그리스어는 “μένω”입니다. 이것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진득하게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을 붙들고 묵묵히 인내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처럼 성경 위에 자리를 잡고 진득하게 머물러 계십시오.성경을 붙들고 묵묵히 인내하십시오. 성경이 진정한 진리를 깨닫게 하고, 죄악된 모습을 들추어 꾸짖고, 깨지고 상한 중심을 바로잡아 성경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되기까지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세상의 거센 도전을 너끈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겨낼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묵묵히 성경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뜻을 다하는 노력을 묵상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 이 묵상이라는 단어는 대표적으로 시 1:2에 등장하는데, 원래 히브리어 단어가 가진 뜻이 참 우리에게 귀한 통찰력을 줍니다. 묵상이라고 번역된 본래의 단어는 “הָגָה”인데, 이 단어는 계속해서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을 뜻합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온통 울릴 때까지, 그래서 우리가 입술이 아니라 이제는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할 때까지,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준이 되기까지 계속해서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 한 번 제대로 큐티를 해봅시다. 바울이 증언하는 그 유익, 성경이 약속하는 그 유익을 우리가 마음껏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큐티를 사수해봅시다.
(시간이 남으면 큐티 간증)
앞으로 몇 주 동안 함께 성경을 우리의 신앙과 삶의 기준으로 삼는 훈련을 해보려 합니다. 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유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두가 맛보아 누리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직접 체험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교회와 사회 위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 비전을 품고 우리 청년부가 다시 힘차게 일어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누가 이 변화의 주인공이 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신앙과 삶의 기준이 되게 합시다.
살전 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