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은혜의 풍성함

에베소서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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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우리 아버지되신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내가 예배는 제일 열심히 드리고, 전도도 열심히 하고, 주신 달란 트대로 봉사까지 열심히 했는데, 내가 보기에 예배만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가 아는 그 사람보다 은혜를 덜 받아서 하나님께 원망이 나온적이 있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런 피해 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의 지 극히 풍성함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이시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고,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풍성한 것인지, 또한 그 은혜를 받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알아 가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주셨습니다.

1-3절 말씀은 구원받기 이전의 인간의 상태에 대해 숨김 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에는 구원 받 기 이전의 이방인의 모습에 대해서, 3절은 구원 받기 이전의 유대인의 모습에 대해서 속속들이 말하고 있 습니다.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할 것 없이 구원 받기 이전의 상태는 모두 비참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자였습니다. 그들은 죄와 허물 가운데 행하면서 세상의 원리와 가치를 따라 살 았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게 종노릇하던 자였습니다. 이방인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하나님을 알 고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조차 자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고 살았습니다. 그 래서 바울은 유대인 역시 이방인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합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 구원 받기 이전에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었으며, 악한 영을 따라 살며 자기 육체의 욕심대로 행하는 그런 존재로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영적 생명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영적 생명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 이며,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영적 죽음을 ‘허물과 죄’와 관련시켜서 말합니다. ‘허물’은 ‘정해진 경계선을 넘거나 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사람이 어떤 잘못을 행하거나 실패하여 하나님의 뜻과 법의 범위를 넘어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죄로 인해 영적 죽음의 상태에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성도들의 비극적인 과거의 상황은 그들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는 사실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는 공중에 거하며 하나님을 대적할 뿐 아니라 타락한 인간 사회 안에서 역사하는 마귀를 가리킵니다. 2절 마지막에서는 이 공중 권세 잡은 자를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다시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모든 인간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 라는 것입니다. 사실 마귀가 이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 자가를 통해 결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패배했으며, 그리스도께 굴복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 마귀는 완전히 힘을 상실하지는 않아서, 최후 패배의 날이 오기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회를 공격합니다. 구원 받기 이전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이런 마귀의 영향력 아래에서 거짓과 악을 행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3절은 유대인 성도들을 향해 한 말인데 이들 역시 이방인과 다름이 없음이 선포되어 집니다. 본문 가운데 ‘육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을 떠난 인간의 더러운 본성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음’은 ‘생각, 의 향, 사고의 과정’을 가리키는 말로, 인간은 감정 뿐만 아니라 이성과 의지까지도 죄에 오염된 존재로 육체 나 마음이 원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대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이런 상태에 있던 것이 율법을 가지고 있던, 하나님을 알고 있던 유대인이라는 점입니다. 이방인을 부정한 죄인 으로 간주하고, 그들과 한 식탁에 앉는 것조차 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이방인들과는 구별된 자 라고 생각하던 유대인의 상태가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죄를 행하며 살아온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 세상의 정신을 다르고 악한 영들의 종노릇하며 육체와 마음의 욕심대로 살아가는 존재로 그립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 르던 이방인이었고, 율법만 가지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유대인들이었지만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원래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죽은 존재였고 악을 행하던 자였습니다.
라스트 폰 트리에 감독이 만든 ‘도그빌’이라는 영화는 인간의 야만성과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어느날 폐광촌에 총소리와 함께 그레이스라는 이름을 가진 미모의 젊은 여자가 숨어듭니다. 동네 사람들 은 회의를 거쳐 그녀를 받아들였고, 주민들은 그레이스에게 친절을 베풀고 따뜻하게 대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동네에 경찰이 찾아오고 그레이스가 쫓기는 범죄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주민들의 태도는 돌변합니 다. 그레이스의 약점을 안 주민들은 그녀를 숨겨주는 대가로 그녀에게 중노동을 부과합니다. 어린아이들 까지도 그레이스를 협박하고, 소경이나 노인들도 그녀에게 치근거리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그녀를 겁탈 하는 사람까지 생겨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레이스는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 레이스에게 돈을 받고 탈출을 돕기로 한 트럭 기사는 그녀의 돈과 몸을 빼앗고는 다시 폐광촌으로 데려옵 니다. 이제 동네 주민들은 그녀의 목에 무거운 쇳덩이를 메달아 도망치지 못하게 해버렸습니다. 무거운 쇳 덩이를 메달고 그녀는 계속해서 중노동을 하러 집집마다 다니며 노예처럼 일했고, 밤마다 동네 남자들은 그녀의 집을 드나들며 자신의 욕정을 마음껏 채웁니다.
이처럼 약자를 철저하게 이용하고 짓밟는 도그빌이라는 폐광촌 주민들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마을의 주민들보다 더 선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탐욕과 자기중심성에 주목해보면 우리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 리도 구원 받기 이전에는 영적으로 죽은 존재였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이처럼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폐광촌 주민들 처럼 죄인을 대하듯이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셨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4절을 바로 시작하지만 원문은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유대인이고 이방인이고 할 것 없이 다 영적 죽음 이라는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너무 커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와 함께 일으키셨으 며, 그와 함께 하늘에 앉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은 단순하게 죽음에서 생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와 함께 일으키시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살아나고, 일으켜지고, 하늘에 앉혀진 것이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행해졌다고 말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과 연합하여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귀에 동참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승귀에 동참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성령의 능력과 믿음 을 통해 그와 연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될 때에만 그의 죽음과 부 활과 승귀가 우리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시고, 그들을 그리스도와 함 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혀 주셨습니다.
성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입니다. 구원은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 님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성도들은 구원에 대해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를 구원하신 목적이 본문 가운데 나타나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를 오는 세대에게 입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그의 자비하심에 나타 났습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 값없이 받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은혜를 값없이 받는 것으로만 생각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 해 치르신 엄청난 희생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독일의 신학자인 본 회퍼는 은혜가 값 싼 것이 아니라 비싼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대가로 세운 하나님의 희생이 담긴 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은혜란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베푼 자기희생적인 사랑 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거저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 값 비싼 하나님의 은혜를 오는 세대들에게 입증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 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하늘에 앉는 특권을 주신 목적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 개개인과 교 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런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둘째로, 구원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알리고 선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하신 그의 작품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작품이라 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작품 이든 작품은 그것을 만든 이의 솜씨를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작품인 구원받은 성도들 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지혜를 온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일을 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선한 일들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작품으로 창조하신 목적은, 구원받은 우리가 선한 일들 안에서 살게 하기 위함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를 찬양하는 것은 입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선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그분의 영광과 능력을 온 세상에 드러낼 수 있고, 이를 통 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선한 일들을 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작품이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선한 일들 가운데 살아야 합 니다. 이 말이 선한 일들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은 반드시 선한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르칠 때 우리는 선행도 가르친다. 그대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붙잡았고 그분으로 인 하여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그대는 이제 선행을 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 님께 간구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고백하라. 이웃을 선대하며 섬기 라. 그대의 직무를 다하라. 이러한 것들은 참다운 선행으로서 마음 속에 알고 있는 이 믿음과 기쁨으로부 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루터의 말처럼 성도들이 선한 일을 행해야 하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 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선한 일이라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이기에 하나 님의 속성인 의와 거룩과 사랑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며, 이방인처럼 행하 지 않으며,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선한 일에 대해 확실히 말해 주지는 않지만, 성도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본받는 삶이 되어야 하며,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이 되 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부인하 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한 일은 참 많습니다. 2주 뒤에 꽃초대 초청주일이 있는데 이를 위 해 우리가 주변의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전도의 말을 건네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하 나님을 모르는 자를 위해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전도하는 것만이 선한 일은 아닙니다. 주변의 약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위로하 는 것도 중요합니다. 종종 만나는 나그네 된 자들, 가난한 자, 병든 자, 헐벗은 자, 목마른 자, 고통당하는 자들을 돌아보는 것 역시 교회와 성도가 행해야 할 중요한 선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과 염소 비유를 통해 이들에게 행한 것이 곧 자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원래 구원받은 자,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허 물과 죄로 인해서 죽은 자였습니다. 세상을 따라 살아가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죄를 행하는 본질상 진노 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의 풍성함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4절이 ‘그 러나’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기 이전이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된 자였고 하나님을 배반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풍성하신 긍휼하심과 사랑을 인하여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왜 하나님은 나에게는 이런 것들은 안주시고 저 사람에게만 좋은 것을 주시냐고 종종 따지곤 합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예배드리고 헌신하면, 내 평생 헌신했는데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왜 고난과 어려움이냐고 따지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죄로 물 들어 죽어가고 있던, 아니 이미 죽었던 우리를 우리의 어떤 노력이나 공로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우 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을 은혜가 풍성하신 하 나님께서 다시 살려 지극히 영광스러운 구원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헌신하고 전도하는 이 모든 일들은 그저 우리에게 주신 구원에 대한 반응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저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무나도 큰 댓가를 치르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죄인 된 우리, 원수 된 우리를 위해 희생 시키신 그 놀라운 사랑, 엄청난 희생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은 자인데 그냥 마음대로 살아서 되겠습니까. 그저 세상의 관점에 따라 왜 내게 복을 주지 않으시냐고 불평할 수 있 겠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그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오는 세대에게 나타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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