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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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가운데 잠깐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도 있고, 오랜 기간 동안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얼굴만 보고 끝나는 경우도 있고, 많은 대화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굴을 많이 보더라도 대화는 거의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 아가며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또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대화를 하느냐에 따라서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대부분 공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경우에 우 리는 그 사람의 말투를 닮아갈 수도 있고, 모습을 닮아갈 수도 있고, 생각하는 것이 닮아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평소에 관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그 사람의 모습들에 영향을 받는 존재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각자 그 기간은 다르다 할지라도 대부분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해왔는데, ‘우리 는 왜 예수님의 모습은 쉽게 닮아가지 않는 건가?’라는 궁금증이 들게 되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자라오며 이제 30년 가까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나는 얼마나 예수님께 영향을 받 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께 영향을 받는 삶을 살 아가고 계십니까? 오랜 시간 동안 그분을 믿었고, 오랜 시간 동안 성경을 읽었고, 정말 오랜 시간동안 말 씀을 들었을 텐데, 잠깐 만난 사람에게는 영향을 받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 만난 예수님께는 왜 영향을 잘 못받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부분들이 있는지
확인하고, 예수님께서 어떤 일들을 행하셨는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간 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 성도들에 대해서 기록한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을 향 해 너희가 이전에 어떤 존재였는지, 어떤 상태에 있던 자인지 기억할 것을 말하며 본문을 시작하고 있습니 다. 11절과 12절에 이 내용이 등장하는데 그 상태는 정말 암울하고 해결책이 없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속 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는데, 이방인 성도들의 이전 상태, 즉 그저 이방인이었던 그들의 상태는 솟아날 구멍은 없고 죽음만을 기다리던 상태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이방인의 과거를 다섯 가지로 요약합니다.
먼저 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방인들은 메시아에 대 한 생각이 없던 자였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나라에서 분리된 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합법적 백성이 아니었기 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영적인 복과 특권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약속의 언약에 대해 외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를 통한 구원과 복을 유대인에게 약속하셨지만, 이방인들은 이런 하나님의 언약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외인 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백성이 소유하는 특권에서 제외된 자들이었습니다.
넷째로, 그들은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방인들도 인생의 성공이나 번영과 같은 나름의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참 소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에 근거한 것만이 참 소망이기 에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참 되신 하나님이 그들에게 없기에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본문의 ‘하나님이 없다’는 부분은 원문 에서 ‘신이 없다’라는 말인데, 사실 그들은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참 신이신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참 신이신 하나님이 없는 그들에게 삶의 의미나 목적이나 참된 소망이 있을 수가 없 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방인 성도들의 과거는 처참했습니다. 12절 한 절에 담긴 이방인 성도들의 과거는 예수를 믿기 전의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고, 약속의 언약에 대 해 외인이었으며,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던 자였습니다. 정말로 솟아날 구멍이 없는 그런 처참 한 상태, 답이 없는 상태가 이방인들의 상태이며 우리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13절에 접어들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바로 내용이 시작하지만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11절과 12절에서 “그 때”라는 말로 이방인 성도들의 과거에 대 해 말하는데, 13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말하며 내용을 이어갑니다. 이전의 상태와 지금의 상태를 극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방인 성도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이스라엘이 누리던 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께 가까이 와서 영적인 복과 특권을 누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던 그들이 이제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 때문입니다. 원래 이방인들은 유대교로 개 종할 때 할례의 피를 흘림으로 이스라엘의 일원이 될 수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할례의 피가 없어도, 그리 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새 백성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번역하지 않았지만 14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 때에 멀리 있던 이방 인들이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가까워진 이유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이시 기에 에베소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단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화해의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은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셔서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평화를 이루셨으며, 이 둘을 하나님과 화해 시키셨습니 다.
본문에서 ‘화평’이라고 번역된 단어에 대해 길성남 교수는 ‘화평’보다는 ‘평화’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합니다. ‘화평’은 ‘마음이 평안함’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물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마음의 평안함을 누립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화평’은 단순히 걱정이나 탈이 없는 개인적이고 내적인 평안이 아니라 는 것입니다. ‘화평’을 번역한 단어인 ‘에이레네’라는 단어는 본문에서 ‘불화나 적대 관계가 해소됨으로써 이루어지는 화합과 교제와 일치의 상태’를 뜻합니다. 본문 가운데 이 단어는 서로 적대적인 유대인들과 이 방인들이 미움과 증오를 버리고 화해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관계적이며 사회적인 차원의 평화를 의미하기 에, ‘화평’보다는 ‘평화’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 ‘중간에 막힌 담’이라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 되었던 상태’를 나타냅니다. 유대인 들은 이방인들을 부정한 죄인으로 간주하며 그들과 교제하거나 함께 식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적 대감은 유대인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종교 우월주의에 분 개하여 적대감을 가졌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가지고 있던 이 적대감, 즉 원수 되었던 상태가 ‘중 간에 막힌 담’으로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작년 초에 신대원 프로그램으로 이스라엘 답사를 갈 기회가 있어서 다녀왔었습니다. 그 중에 ‘통곡의 벽’ 에 가서 있었던 일이 본문을 묵상하는 가운데 떠올랐습니다. 통곡의 벽에 가면 정통 유대인들이 찬양팀이 악보 보려고 쓰는 보면대와 비슷한 나무로 된 받침 위에 율법책을 두고 읽으며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저희는 관광객의 입장이니 주위를 둘러보고 그 모습들이 신기해서 멀리서 보고 있으면 유 대인들은 이방인인 우리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곤 했습니다. 저는 다른 곳을 보느라 있는줄도 몰랐는데 통곡의 벽 한쪽에 나름 구별된 공간이 있어서 궁금해서 다녀온 동기 전도사님이 영상을 찍어온 것을 보았 습니다. 그곳에는 더 유대인스러운 유대인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율법책을 보고 있는데 이방인들이 들어오 니 ‘너희가 왜 여기에 들어왔냐’는 눈빛으로 노려보고, 정말 경멸하고 거부하는 느낌이 들어서 오래 있지 못하고 잠시만 둘러보고 나왔다고 합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해서 경멸하며 하나님의 언약백 성이 아닌 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라고 여기며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며 지금까지도 살아가고 있습니 다. 그들은 예수님을 실제로 보았지만 예수님을 배척하였고, 예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지지 않았기에 예 수님으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자가 되었습니다. 평화를 선포하신 예수님의 모든 사역들을 무시 하며, 여전히 막힌 담 저편에서 그들만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평화의 근원이신 예수님은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이 모 든 장벽이 허물어지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무력하게 하심으로 써 적대감을 제거하시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하나 되게 하셨고, 그 결과 한 몸이 된 그 둘을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화목하게 했다는 것은 원래 관계가 소원하거나 적대적인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하나님과 원수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던 적대감을 소멸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해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심판 을 받으심으로써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셨고, 그 결과 원래 원수 되었던 자들이 하나 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18절에서 ‘나아감’이라는 단어는 원래 왕을 알현할 허가를 받고 왕 앞에 자유롭게 나아가는 권리를 나타 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소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성전에서 이방인은 담을 넘어 유대인의 뜰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방인의 뜰과 유대인의 뜰 사이의 벽에 헬라어와 라틴 어로 쓰여진 경고문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방인은 성소와 구내를 둘러싼 방책 안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 누구든지 그렇게 하다가 붙잡히는 자는 죽음을 당해도 자기의 책임이다” 이런 상태에 있던 이방인이 이제 유대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모든 막힌 담을 허무시고, 그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으로 이런 일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본문은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이 일일 실제로 가능해 진다고 말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하여금 평화를 깨닫게 하시고, 서로 형제 자매로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 로 이제 이방인 성도들은 외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니고,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 었습니다. 앞서 12절에서 말한 이전의 상태, 그 때의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영적 성전의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모퉁잇돌’이라는 것은 건물에 기초에 놓여져서 두 벽 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건물 토대의 모서리에 놓여져서 건물 전체의 기초와 형태를 결정짓고, 벽을 세우는 기준이 되는 것이 모퉁잇돌입니다.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시는 예수님을 교회가 붙잡지 않고 연결시키지 않으면 교회는 와해되어지고 성장 역시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방인 성도들은 과거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던 자들 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피로 말 미암아서 이제 한 몸으로, 한 공동체로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게 하기 위해 함께 지어 져 가게 되었습니다. 성전의 일부를 이루는 놀라운 은혜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한다”라는 유명한 속담이 있습니다. 한 작가는 이 속담의 뜻을 ‘전날 미천하 던 사람이 전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잘난 듯이 행실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합니다. 본문의 의미를 온 전하게 담아내지는 못하지만 이 속담이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바울의 마음을 어느정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만을 기억하고 살아갑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전 에 어떤 존재였는지 기억하라고 강조합니다. 구원 받기 이전의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자였습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존재가 없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소망도 없었고 어떤 특권도 주어지 지 않았습니다. 그저 죽음으로 끝날 인생이었고, 허무하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던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한줄기 빛으로 다가와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생명을 준 것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 의 피로 말미암아서 전에는 멀리 있던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것이 소멸 되어지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던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의 일부가 되는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과 함께 살았지만 예수님의 영향을 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피 로 모든 담이 허물어지고 평화가 선포되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박해하는 죄악된 삶을 살아갔 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지 못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무시한 결 과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모습은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실제 우리 삶으로는 살아낼 수 없는 것으로 여 김으로 우리 스스로 벽을 쌓아올려서 예수님을 본받지 않는 삶을 스스로 택해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평화를 선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닮아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끄시며,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게끔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예수님,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함께 지어져가게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 하며 예수님 닮아가기를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