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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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어떻게 배우셨습니까?”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국제미용성형외과 의사협회’에서 매년 전세계의 성형시술 및 수술의 통계를 수집한다고 합니다. ‘이코노 미스트’라는 잡지사에서 이 통계를 가지고 기사를 썼는데 2011년 당시 성형 시술이나 수술의 건수에서 우리나라가 미국, 브라질, 중국, 일본 등의 뒤로 7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 등수는 단순히 수술이나 시 술의 건수로 등수를 매긴 것이고, 인구 수를 기준으로 해보니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쉽게 이기고 1등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런 통계를 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 나라는 성형 공화국이라 불리울 정도로 많은 이들이 성형을 하는 나라로 유명합니다. 어떤 통계에서는 우리나라 사람 10명 중 3명 정도는 성형을 희망한다고 합니다. 아르바이트, 부모님의 지원, 심지어 대출을 받아가면서까지 성형을 한다고 하니 얼마나 성형을 향한 열정 이 큰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형을 원해서 성형외과를 찾아갔을 때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어떻게 고쳐드릴까요?”라고 의사가 물을 때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 다 자 신이 원하는 모습의 사진을 가져와서 “이 사람처럼 고쳐달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수술을 하고 나면 사람들이 만족을 해야 할 텐데 많은 사람들이 만족을 하지 못하고 불 평한다고 합니다. 수술 하기 전에 생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그 얼굴대로 바뀌면 뭔가 완전히 새로운 사람 이 될 것만 같았는데, 수술이 끝나고 나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니 그런 모습이 아닌 것 같으니 불만이 생 기는 것입니다.
성형을 통해서 우리의 겉 모습이 조금 더 나아질지는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이목구비가 뚜렷해 지고, 살 이 빠지고, 더 예쁘고 멋있게 바뀔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바뀌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이 바뀌고, 내면이 바뀌어야 그 사람이 진정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에 사는 그런 옛 사람이 아니라, 오직 의와 생명의 지배 아래에 있는 새 사람을 입으라고 강권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 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 17-19절의 말씀은 ‘이방인’의 삶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분은 이방인들이 그 마음의 무익함 가운데 사는 것처럼 더는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며 오늘 본문을 시작하고 있습 니다. 원래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도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선 2장 13절 이하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가까워진 존재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믿지 않는 이방인들처럼 살아간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서 누리는 새로운 신분과 특권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방인 이었을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의 모습이 그들 안에 있어서 이전의 삶의 모습들 을 온전히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는 믿지 않는 이방인들처럼 살았다고 할지 라도 더는 그렇게 살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특징 세 가지를 본문에서 말하는데 영적 무지, 영적 죽음, 도덕적 타락과 방탕이 그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마음이 무익하며, 지각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원래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하 고 이해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지만, 타락하여 더는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이방 인의 마음이 무익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들은 지각이 어두워져 있어서 하나님을 알지 도 못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 대신 자기를 영 화롭게 하고 자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자들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자는 영적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이방인들이 유일 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영적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무지한 자였 기 때문입니다. 영적 무지로 인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며, 그리스 도의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또한 이들이 영적 죽음의 상태에 있게 된 것은 ‘마음의 굳 어짐’ 때문입니다. 18절에서 ‘굳어짐’이라는 단어는 ‘완강함’을 뜻하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의 진 리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이방인의 마음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방인들이 영적으로 무지하고, 하나님의 진 리를 완강하게 거절하기에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들은 스스로 무감각하게 되어 자신을 방탕에 내버려두고 온갖 더러운 것들을 탐욕스럽게 행하는 자들입니다. 19절 본문에 ‘감각 없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원래 ‘피부가 굳어져서 더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수치를 느끼는 모든 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올지 않 은 어떤 일을 한다 하더라도 더이상 수치를 느끼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한 상태로 살아 가는 것이 이방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 것은 아니었지만, 사도 바울 당시 대다수의 이방인들은 수 치심도 없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더러운 일들을 거리낌없이 행하고 살았습니다. 귀족들은 남자들 뿐만 아 니라 여자들까지도 성적으로 문란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로마의 정치가이며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자신의 책에서 당시 여자들의 이혼 행태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떤 여자도 결혼을 깨고 나서 부끄러워하 지 않는다. 이 저명한 부인네들은 연도수를 그해의 집정관의 이름으로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남편들 이름 으로 헤아린다. 그녀들은 결혼하기 위해 이혼한다. 이혼하기 위해 결혼한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까 지도 성적 문란에 빠지고, 다른 영역에서도 타락한 것이 당대 이방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방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뒤에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매우 단호한 어조로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ESV 영어 성경은 “그 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라고 번역합니다. 이 말은 성도들이 믿지 않는 이 방인들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상기시키는 말이면서 동시에 이방인들처럼 살아서는 안된다고 강하게 경고하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또한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며, 또 그리스도에 대해 잘 아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 다.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단지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해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배운다 는 것은 그의 인격과 삶에 관해 배우는 것이며 또한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 를 배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삶에 반영된 가치와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과 전혀 다른 기준과 전혀 다른 가치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배운 자들의 합당한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은 것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 ‘심령이 새롭게 되는 것’, ‘새 사람을 입는 것’이 그 세 가지 입니다. 이 모든 것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과거에 그리스도에 관해 배운 내용들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세 가지 내용 을 이해하면 “여러분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가르침을 받은 대로 더는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입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 사람이라고 하면 인간이 가진 옛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옛 사람의 의미는 다릅니다. 본문의 옛 사람과 새 사람은 사람이 가진 두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 인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첫째 아담과 연합하여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 사는 존재를 가리 킵니다. 반면에 새 사람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의와 생명의 지배 아래에 사는 존재를 가 리킵니다. 즉 옛 사람이라는 것은 회심하기 이전의 전 존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회심하기 이전의 옛 사람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과거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존재입니다. 22절에서 표현하는 옛 사람의 모습은 과거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이며, 거짓된 욕심을 따라 도덕적, 영 적으로 부패해 가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회심할 때 이미 옛 사람을 벗어버렸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 린다는 것은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심하기 이전 의 ‘나’라는 존재는 모두 십자가에 못박혀 지나간 것입니다. 그 때의 어떤 본성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리 스도를 믿기 이전의 내 모든 존재 자체가 십자가에 못박혀 나에게서 벗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3절에서 성도들이 새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23절의 ‘심령’이라는 단어는 ‘마음의 영’이 라고 풀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의 영’은 새롭게 되는 성도의 심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 안에 거주하시며 성도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도가 ‘성령에 의하여’ 새롭게 된다는 것 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도의 마음이 새롭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마 음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롭게 된다’는 말은 현재 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단회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성령으로 새로워 지는 것은 성도의 전 삶의 여정에서 반복적이며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성령 께서는 새 사람을 입은 성도들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하여 그 본성과 삶에서 온전한 새 사람이 되도록 지속 적으로 도우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새 사람이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참된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새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의와 거룩함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새 사람에게 의와 거룩함의 특성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새 사람 은 의와 거룩함의 존재로서 의와 거룩함으로 하나님을 따르며, 의와 거룩함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경험을 한 자들 입니다. 또한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는 새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일 주변의 압력에 굴복해 옛 사람의 삶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자신들이 새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 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새 사람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더는 이방인들처럼 살아서는 안된다고 말합니 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들은 이미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었으며 내주하시는 성 령으로 새롭게 변화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울의 가르침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며 두 가지 질문을 던져 드리고 싶습니다. 과연 나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성도인가? 둘째로, 나는 새 사람을 입은 성도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한국인들 대다수의 생각과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쾌락과 물질에 대한 탐욕일 것입니다. 남들 보다 더 가지기 원하는 탐욕에 빠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유익을 구합니다. 손쉽게 돈을 벌기 위 해 부동산 투기에 뛰어 들고, 주식 투기, 도박, 복권 등으로 대박의 꿈을 꾸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 인처럼 살지 말라’고 말하는데 우리도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혹시 나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나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들이 가치 있게 여기고 있는 것들을 나도 가치있게 여기며 그들과 다름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성경적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면 사회에서 실패하고 낙오할까 두려워 믿기는 믿지만 그렇게 행하지는 않는 이상한 상태에 빠져있지 않은지 스스로를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너희는 이방인들이 그 마음의 무익함 가운데 사는 것처럼 더는 그렇게 살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심리학 용어 중에 ‘고착 상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과거의 습관들을 버리지 않고 유지함으로써 심 리적 안정을 얻으려고 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고착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변화를 두려 워합니다. 그리고 변화되지 않은 낡은 것에 매여서 거기서 안정을 누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혹시 영적인 고착 상태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이미 새 사람을 입은 자인데 여전히 이전의 상태가 좋아서, 마치 고착 상태에 빠진 사람처럼 믿기 이전의 습관을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마치 습관처럼 옛 사람의 모습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지 우리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새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결단이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 창조의 선물입니다. 우 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새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 리의 전 존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새 사람이 된 우리는 새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엄숙한 도전 앞에 서게 됩니다. 새 사람을 입었 다고 해서 저절로 새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과 제입니다. 우리는 새 사람으로 의와 거룩함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닮아 가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배운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십니까? 오랜 시간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 어오면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배워 오셨습니까?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그저 지식으로 아는 것 에서 그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이 강단에서 매주 선포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고 삶으로 말 씀을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이미 우리는 새 사람을 입었습니다. 더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은 이전의 ‘나’를 다시 찾지 마시고, 단번에 새롭게 하셨고, 또 계속해서 매일 매일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 들었던 것처럼 계속해서 실패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우리가 배운 그리스도를 지식으로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기 위 해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