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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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무리들과 제자들을 향해 하신 산상수훈의 말씀 가 운데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그렇고 본문을 찾으시고 본문 바로 위에 작은 소제목을 보신분은 아시겠지만 오늘 본문은 구제에 관해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구제에 대해 한편으로 경 고하시며, 어떻게 구제를 행해야하는지 본문을 통해 명확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구제를 ‘자연적인 재해나 사회적인 피해를 당하여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 주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성경은 구제에 관해 ‘구제란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하지는 않지만, 성경 말 씀을 볼 때 ‘가난한 사람이나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는 자선 행위’를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저 자신에게도 부끄러웠던 질문이기는 합니다만 성도 여러분은 평소에 구제를 하고 계십니까? 구약시대부터 시작해 예수님께서도 강조하신 이 구제를 얼마나 우리 삶 가운데 실천하고 계 십니까? 구약성경에서는 구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드물지만, 사회적으로 가난한 자나 약자에 대해 관심과 도움의 손길을 줄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십일조에 관해 말하는 본문은 매 3년 끝 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면 그것을 저축하여 기업이 없는 레위인이나 성에 거류하던 객과 고아 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또한 경작지와 포도원, 감람원 등은 7년마다 묵혀 두어 가난한 자들의 구제거리로 삼도록 명령합니다. 이런 전통들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 형식화, 습관 화가 되어서 구제가 매우 외식적으로 흘러갔습니다. 구제가 하나님의 명령에서부터 시작해 마땅히 행할 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구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그런 수단으로서 행해진 것입 니다. 당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경건 생활의 중요한 기둥으로 생각하던 구제와 기도, 금식 모두 형식화 시켜서 그 원래 의미를 다 퇴색시켜 버리고 그저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제에 대해 말씀하시며 먼저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구제에 관해 우리에게 하시는 첫번째 명령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제에 관해 우리에게 하시는 첫번째 명령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제에 대해 말씀하시기에 앞서 1절에서 제자들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1절은 사실 구제뿐 만 아니라 당시 경건 생활의 중요 기둥으로 여기던 기도와 금식에 대한 경고도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래 서 오늘 본문 뒤에도 기도와 금식에 대한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향해 “사람들에 게 보이려고 너희의 의를 그들 앞에서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하라’는 이 경고 의 명령은 주의하지 않고 이를 행하는 일이 죄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자신의 의 를 행하는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앞 5장 16절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 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의 말씀이 미처 끝나기도 전 에 하신 이 말씀과 오늘 본문의 말씀이 달라도 너무 다른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자세히 보면 이 두 말씀이 다른 말씀이 아니라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장 16절 말씀 가운데 성도들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치면 사람들이 그 착한 행실을 보고 행위를 한 사람에게 집중하 지 않습니다. 그 행위를 보는 사람들이 ‘성도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1절에서 예수님께서 경고하고 계신 사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1절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너희의 의를 그들 앞에서 행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행위의 의도가 전혀 다른 것입니다. 5장에 나타난 사람의 행위는 그 행위의 의도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에 있었습니 다. 하지만 1절에서 예수님의 경고를 받는 사람의 행위의 중심은 자신의 의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입 니다.
저의 대학교 지인 중에 ‘송주현’이라는 형이 한 명 있습니다. 성도님들 가운데 이름을 한번쯤 들어보신 분도 계실 수 있는데 인터넷에서 한 때 나름 유명했던 사람입니다. ‘나눔 전도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사역을 했습니다. 대학교가 부산 영도라는 곳 산 중턱에 있었는데 학교 주변에 어려운 할머니, 할아버지 들께 연탄도 나눠 드리고 필요한 음식거리도 나누고 이야기 상대도 해주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부산역으 로 사역의 범위를 넓혀서 활동했는데, 부산역을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주변에 노숙하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저도 자주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다녔었는데 그 근처를 지나기만 해도 노숙자 특유의 좋지 않은 냄새들이 코를 찔러서 인상을 찌푸리게 되는 그런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전도사님은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먹거리를 사주고, 방을 잡아 드리고, 심지어 겨울에 추우니 침낭과 패딩을 맞춰 드 리고, 여름에는 여름이라고 얇은 옷들을 다 맞춰서 드리는 등 많은 구제의 활동을 했습니다. 몇 년전에는 결혼을 했는데 그 식장에 그 분들을 불러서 함께 그 잔치 음식을 나누고 축하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전도사님이 돈이 많아서 이런 구제의 사역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사역했 고, 하나님의 채우심을 통해서 구제하던 분이었습니다.
이 전도사님의 구제는 주변 사람들은 다 알았고 심지어 그를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는 이들도 인터넷과 TV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구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영광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입 니다. 전도사님이 항상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는데 “오직 예수”입니다. 자신이 잘나서 구제하는 것도 아 니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예수님 때문에 자신은 이런 일들을 한다고 말 하고 다녔습니다. 어려운 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도 “예수 믿는 청년인데...”라는 말로 시작해서 그들 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렇게 구제하는 자가 앞서 5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이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의 구제는 은밀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제했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라는 것 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구제함에 있어서 자신의 영광을 위한 모습을 띄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 람이 자주 모이는 교차로와 넓은 광장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조그만 바구니를 건네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이런 구제 행위를 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구제에 대한 증인으로 삼기 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구제하는 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구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팔까지 불 었습니다. 그들은 나팔을 불어서 미처 구제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이 그 소리를 듣고 와서 필요한 것을 얻어가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팔을 부는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진짜 의 도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박수를 보내고 인기를 얻기 위한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부르시는데 이는 다른 말로 ‘위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위선 자라는 말은 원래 세속 작가들이 사용하던 단어인데, 극장이나 무대에서 활동하는 ‘배우’를 가리키는 단 어였습니다. 배우는 무대에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상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사람 을 말합니다. 남들에게 보여서 자신이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던 유대인의 회당과 거리에서 구제를 행한 자들이 이런 배우들과 같은 자라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구제라는 좋은 일을 하니 대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내면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구제를 악용하는 그런 위선자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보여져 영광을 받으려고 구제를 행한,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한 자들에 대한 결과 로 예수님은 1절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2 절 마지막에 나타나는데 “그들이 ‘자기의 상’을 전부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상’이라는 말은 그것 이 하나님께서 구제하는 자들에게 주신 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에 예비하실 상 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상을 전부 받았다’라는 이 말은 ‘완전히 영수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물 건을 구입하고 그 대금을 지불하면 영수증을 받는데, 영수증은 우리가 그 물건에 대한 가치를 다 지불했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영수증이 가지는 의미와 같이 우리가 구제로 인해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으면 우리는 구제한 것에 대한 상을 전부 받아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은 받아보지도 못하고 한 낱 세상의 영광을 잠깐 받아서 누려보다가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구제의 목적이 하나님께 상을 받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경고를 받았으니 사 람들에게 보이려고 구제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구제에 대해 우리에게 하시는 두 번째 명령은 “은밀함 가운데 구제하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제에 대해 우리에게 하시는 두 번째 명령은 “은밀함 가운데 구제하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와 무리를 향해 “구제를 행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구제를 은밀하 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 을 문자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말도 안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만, 이 말씀은 ‘구제할 때 다른 사람뿐 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은밀하게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인지라 구제를 행하고 나면 우리 마음 가운데 여러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져 칭찬받고 영광 받는 것에 대한 유혹에 이긴다 할지라도, ‘내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을 구제했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서 구제했으니 난 참 착하고 대단한 사람이야’ 이런 마음들이 우리 안에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예수 님은 이런 마음조차 들지 않도록 스스로에게도 은밀하게 구제를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 눈에 보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은밀하게 무언가 지속적으로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구제와는 상관이 없지만 대학생 때 다니던 교회에서 찬양팀으로 섬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팀원이었 던 동생들이 마이크 선을 마음대로 던져놓고 가서 선이 종종 고장도 나기도 하고, 주일에 예배 준비할 때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집이 교회와 가까워 주중에 종종 교회에 나와 선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주중에 교회에 나와서 잠시 선 정리를 하고 가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찬양팀원들 역시 무엇이 달라졌는지 잘 몰랐습니다. 시간이 제법 지나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무언가 변화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은밀하게 무언가 계속 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결국 은밀히 하던 일 들을 다 그만두고 포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처럼 무언가 은밀히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돈 한푼 들지 않고 단지 시간 30 분 정도를 투자하는 것 뿐이었지만 그것조차도 은밀하게 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구제는 일단 기본적으로 우리의 재정이 어느정도 소비될 수밖에 없는 행위입니다.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구제하려면 무언가 먹을 것이나 입을 것, 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는 재정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 문입니다. 돈 들지 않은 일도 은밀히 지속적으로 행하기 힘든데 나의 재정이 들어가는데 그것을 은밀히 행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내 재정이 넉넉하지도 않은데 그 재정 중 일부를 다른 자를 구제하기 위해 사용하니 얼마나 그 구제를 남들에게 보이고 싶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보시는 것은 외식하는 자, 위선자에게는 두려운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구제가 남들에게 보여져서 칭찬을 듣고 영광을 얻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된 우리에게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은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은밀히 구제할 때 내가 지금 아무도 모르게 하는 이 구제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그 때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우리를 주목하고 계시다는 그 사실은 참으로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밀히 구제를 행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은밀함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보상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위선자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아버려서 더이상 아버지께 청구할 것이 없지만, 은밀히 구제한 자들은 말하지 않아도 하늘 아버지께서 은밀히 보시다가 갚아주시고 보상해 주실 것이라 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종말의 때에 관해 말씀하시는 부분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 인들에게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의 인들이 ‘언제 우리가 예수님께서 그러신 것을 보고 먹이고 입히고 영접했냐’고 말하자 예수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우리가 구제의 행위를 하는 것이 결국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뒤이어 예수님은 형제 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들을 부르시는데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저주를 받은 자들아”라 고 그들을 부르십니다. 저주 받은 자라고 부르시며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 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이렇게 구제에 대해서 말하면 우리는 ‘나 살기도 빡빡하고 힘든데 지금 내가 누구를 도와줘’라는 마음 이 곧장 올라옵니다. ‘지금은 아이도 키워야 하고 노후 대비도 해야하니 조금 있다가 형편이 좀 나아지면 그 때 해야지’라는 마음이 분명히 마음 한켠에 드실 것입니다. 그런 생각과 마음은 분명히 사단이 주는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털어서 남을 도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형편 에 맞게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돈이 많으시면 좀 더 크게 구제해 보시고, 없으시면 빵 하나, 우유 하나 주위의 굶주린 자들에게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시면 분명히 우리보다 어려운 이웃들이 있을텐데 그들을 보실 때마다 ‘예수님이 저기 굶주리고 계시네, 예수님께서 헐벗고 계시네, 예수님이 병들어 힘들어 하고 계시네’라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우리의 관심과 사랑을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2장은 “만일 너희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 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로만 그들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실제 행위로 그들을 도우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물 론 우리의 행위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면 마땅히 그에 합당한 행위 가 뒤따르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을 구제하 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시대부터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수많은 말씀은 하나님의 관심이 고아 와 과부로 대표되는 어려운 자들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들에게 우리의 사랑과 관 심을 보내야하지 않겠습니까? 당장에 돕기 힘들 것 같다는 그런 마음이 우리 안에 든다고 할지라도 은밀 함 가운데 보시는 하늘 아버지가 계심을 기억하시고 구원받은 자로서 합당하게 힘써 구제하는 저와 여러 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