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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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친아, 엄친딸이라는 말이 한 때 유행 했었습니다. 엄마 친구 아들, 엄마 친구 딸이라는 말을 짧게 만들 어서 불렀던 말입니다. 왜 이런 말이 유행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녀들이 이런 말들을 많이 들었기 때문 입니다. 엄마 친구 아들은 이번에 시험을 그렇게 잘 쳤다던데…. 엄마 친구 딸은 엄마 생일이라고 좋은 백 을 하나 사줬다던데…. 엄마 친구 딸은 이번에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던데… 등 이런 말들을 자녀들이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학창 시절 엄친아, 엄친딸들의 이야기를 들었었습니다. 당시에는 왜 엄마 주변에 는 저런 대단한 아들 딸들이 많은지 화나고 마음도 좋지 않은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 말들이 생긴 이 유는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습관들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엄친아, 엄친딸 말고도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많은 비교를 하며 살아갑니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동 료와 자신을 비교합니다. 대중교통을 타고 가며 나와 비슷한 나이의 사람을 보며 비교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할 때 우리는 어떤 사람과 비교하게 됩니까? 자격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보다 조금 못한 것 같은 그런 사람과 자신을 비교를 합니다. ‘나는 교회학교에서 봉사하는데 저 사람은 왜 안하지?’, ‘나는 전도하러 나가는데 저 사람은 왜 전도하지 않지?’, ‘나는 아침에 일찍 나와 이런일 저런 일 하는데 저 사람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지?’ 라는 식의 비교입니다. 내 모습을 비출 때는 잘하고 있는 것 들, 남을 비출 때는 못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나는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이런적이 한번도 없어’라고 자신있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아마 단 한 분도 계시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연약한 인간이 가지는 대표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 시하는 자들” 즉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사람들에게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리 새인이든, 세리든, 일반 유대인이든 누구든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하루에 두 번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오전 9시, 오후 3시였는데, 유 대인은 하루에 한번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해야 했습니다. 중요하고 또 매우 규칙적으로 지켜졌던 이 기 도시간에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종교 지도자였고 또 율법 학자였던 바리새인이 기도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는 것은 당연하 게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의 기도는 듣는 자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내용이 었습니다.
11절에서 말하는 바리새인의 기도 자세는 어떻습니까?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기록된 헬라어 원문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바리새인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분리시켜 자신과 관련하여 기도하였다”입니다. 즉 바리새인은 지금 성전에 기도하기 위해 올라온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를 잘 듣고 또 자신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도록 사람들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보 다는 자신과 관련하여 기도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바리새인의 기도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원어를 통해 살펴보면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바리새인은 그의 짧은 기도 가운데 자신을 강조하는 ‘나는’ 이라는 말이 네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고, 나는 이렇고, 나는 이렇 고, 나는 이렇다 라고 네 번이나 강조하면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해 말하며 기도 같지 않은 기도 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신데,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기도의 대상이 되어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의 기도에 하나님에 대한 기도나 이웃에 대한 기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면서 자신은 이렇게 하지 않았고, 또 이런 것은 잘 했다고 자신을 자랑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기도 가운데 첫 마디가 ‘하나님께 감사한다’라는 말이기는 했지만 그의 기도 내용을 보 면 그것은 그저 형식적인 구호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로만 감사한다고 말했 지 그 기도 내용을 보면 그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의 기도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께 감사하다고 말하는 자의 기도 내용이 자신의 자랑과 교만이 가득한 내용으로 가득 찰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자신의 삶이 자신의 힘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 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가 나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그저 교만 만이 가득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름을 자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남의 재산을 훔치지 않았고, 율법의 계명을 어기는 불의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간음을 하지 않 았다며 자랑합니다. 쉽게 말해서 십계명의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시간 옆에서 기도하고 있던 세리를 콕 집어서 저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님을 자랑합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 여 긴 자신의 삶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 기준에 미달인 세리를 정죄한 것입니다.
이제 바리새인은 자신이 행한 것들을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자랑합니 다. 또한 자신의 소득의 십일조를 잘 드리고 있음을 자랑합니다. 예수님 당대 유대인들은 보통 일 년에 한 번씩 대속죄일에 의무적으로 금식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자랑 합니 다. 거기에 더해 자신이 가지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잘 드린다고 말합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자신의 밭 이나 농장에서 나오는 곡식이나 짐승에 관해서 십일조를 내었습니다. 반면 시장에서 사오는 것들은 이미 주인이 십일조를 한 것이기에 십일조를 따로 하지 않았고 집에서 키우는 채소들에도 십일조는 요구되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이 바리새인은 시장에서 사오는 것도 십일조를 하고, 자신의 집에서 키운 것들에 대 해서도 십일조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원어에서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립 니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바리새인의 강한 자랑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 죄 사함에 대해서는 어떤 간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런 바리새인의 기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자신의 힘으로 이 땅에서의 삶 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스스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지 않 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을 너무나 신뢰하여서 자신 안에 하나님이 계실 자리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 저 자신의 자랑이나 들어주는 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이웃들에 대한 마음도 바리새인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웃들의 어려움이나 아픔, 죄악에 대해서 함께 슬퍼하고 기도하지 않았습니 다. 이웃의 죄악을 보고 슬퍼하며 기도해주기는 커녕 그들의 죄악을 정죄하며 자신의 자랑을 위한 도구로 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종교 지도자의 기도가 이럴 수 있느냐는 생각이 드십니까? 하지만 솔직하게 우리의 모습을 되돌 아보면, 우리가 기도했던 것을 돌아보면 우리 역시 바리새인처럼 기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 인처럼 말씀을 잘 지킨다는 자랑은 하지 못하겠지만 나를 위해서만 기도를 많이 합니다. 이웃의 어려움이 나 죄악을 보고 그들을 위해 슬퍼하며 기도하지는 않고, 때로는 그들의 연약함을 정죄하기도 했을 것입니 다. ‘나는 이렇게 했는데 너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냐’는 식의 말들로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 음을 솔직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도 이전에 이런 생각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도로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바리새인과 같은 생각 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뭐 특별히 잘난건 없어서 ‘말씀 잘 지켰습니다’라는 생각은 차마 못했지 만 나의 모습과 다른 이들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스스로는 교만해지고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을 참 많이 가졌습니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 다녔던 교회에서 찬양팀으로 섬겼는데 찬양팀 연습을 할 때 연습에 늦게 오는 사람 들을 보며 속으로 그들을 많이 깎아 내렸습니다. 물론 그들이 시간을 지키지 못한 것도 있지만 그들의 잘 못과 내가 시간을 잘 지킨 것을 비교하며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을 품었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예배 후 에 찬양팀이 사용한 마이크 선 같은 것들이 정리되지 않아서 개인적으로 선 정리를 자주 했었는데 선 정리 를 하면서도 왜 이런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할까 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를 많이 비교 했었습 니다. 다른 이들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하고 고쳐보려 하지 않고 그저 비교 했었습니 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줄 생각보다는 그들이 제대로 하지 못함에 대해 화내며 정죄하는 마음만 가졌었습니다.
별 다른게 바리새인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이런 저의 마음들이, 이런 우리의 모습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같 은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을 보며 비판하기보다는 저런 모습이 내 안에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저런 모습에서 돌이켜 바른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 에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바리새인의 기도와 달리 세리의 기도는 달랐습니다.
세리는 바리새인처럼 성전 뜰 중앙에서 기도하지 않고 사람들과 떨어져 멀리 서서 기도했습니다. 바리새 인처럼 당당하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그저 죄스러운 마음에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은 죄인 된 사람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할 수 있겠냐는 그런 부끄러움과 회개하는 자세였습니다. 곧바로 기도하는 그의 기도 제목이 이를 잘 뒷받침 해 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나열하며 자랑했던 그런 십계명의 말씀들을 올바로 지키지 못한 자신의 부끄 러운 삶을 돌아보며 그저 가슴을 치며 회개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니 너무나도 부끄럽고 죄악 된 모습 밖에 있지 않아서 하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했습 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아무런 조건이나 공로가 없음을 깨닫게 되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이 죄인인 것을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유대인들에게 충격적인 것으로 다가 왔습니다. 자신들이 존경해 마지 않던 바리새인은 나쁜 사람으로, 로마 앞잡이로 사는 인간 같지도 않은 세리가 뭔가 제대로 하는 것처럼 보여 졌기 때문입 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선뜻 동의가 되는 것입니까, 되지 않는 것입 니까? 안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유명하다고 해서 기껏 찾아 왔더니 지금 저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 야?!’ 라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심지어 기도 내용이야 어쨌든 바리새인은 율법을 잘 지켰고, 세리 는 스스로도 죄인이라고 말했는데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고 말씀하시니 도저히 인정할 수 없 고, 동의되지 않는 말씀이 선포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이 잘못하고 세리가 잘 했으니 세리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리를 이상적인 모델로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리는 결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사람이 아닙 니다. 세리 스스로 인정했듯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얼굴조차 들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세울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자비롭고 은혜로운 분이심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여 하나 님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서 율법에 따라 사람을 판단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율법 에 흠이 없는 자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태도와 생각을 가졌기에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자는 다 정죄 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세리는 하나님을 율법을 뛰어넘어 용서하시는 자비로운 분으로 보 았습니다. 이런 상반된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두 사람 중 세리가 의롭다고 예수님께 인정받았 습니다. 세리가 비록 죄인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바른 태도를 가지고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유 대인들에게는 본문의 바리새인도, 세리도 본받을 만한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켰지만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바리새인이나, 하나님께 인정받았다 하더라도 세리는 당시 사람들에게 본받을 만 한 대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도대체 무엇을 선포하려고 하신 것입니까? 대부분의 비유가 그렇 듯 본문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선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비유 의 끝에서 세리를 향해 의롭다고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지금까지 사람 들이 잘못 알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잘 지 키는 사람을 의롭다고 말씀하실 것이라 여겼던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이 바뀌길 원하셨습니다. 바리새인보 다 세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명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 람을 더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즉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이며, 하나님 나라 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스로 나는 의인이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말하며 다른 이를 멸시하는 자는 거부되고, 세리와 죄인들과 소외된 자들이 오히려 초청을 받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들, 하나님의 자비가 절실하게 필요한 자들, 하나님의 용서를 간절히 구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 님이 죄인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자신의 자녀 삼으시며, 그들을 통해 구원과 사랑이 넘쳐나는 그런 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필요한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리새인은 율법주의에 얽매여서 율법만 잘 지키면 된다고 생각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필요 없는 사람처럼 살아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지 않는 다면 결국 우리도 바리새인과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나 잘난 맛으로 살아가고, 신앙생활 오래 하면서 특별히 큰 죄도 안짓고 살아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하나님의 용서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바리새인 같은 태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리를 본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는 세리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용서를 구 하는 자의 것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님 나라가 필요하십니까. 정말로 하나님 나라가 필요하다고 생각 하신다면 내가 하나님 나라가 필요한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의 태도처럼 교만에 빠져서 나 잘난 맛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우리의 기도 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그런 기도보다 그저 나의 소원을 비는 그런 기도로만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절실히 필요 한 사람에게만 하나님 나라는 허락됩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간절히 구하여서 하나님 앞에 바른 태도로 나아가는 삶,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