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방법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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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은 사무엘하 6장의 본문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블레셋과의 전쟁 후에 있었던 일을 기 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통치하기 시작했는데 하나님의 궤가 예루살렘에 있지 않고 바알레 유다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것을 기억하고 그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궤를 옮기고자 한 사건 가운 데 있었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궤가 지금 ‘바알레유다’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내용 을 기록하고 있는 역대상 13장 6절에서는 이 ‘바알레유다’를 ‘기럇 여아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땅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변방에 있는 기브온 족속의 주요 성읍 중 하나였습니다. 여호수아나 에스라 서에도 이 지명이 등장하는데 ‘기럇바알’, ‘바알라’, ‘기랴다림’이라는 명칭으로 기록된 곳이 ‘바알레유다’ 라는 땅입니다. 지명들을 보면 ‘바알’이라는 단어들이 들어가 있어서 바알과 관련된 곳임을 암시하고 있 는데, ‘바알레유다’가 오래 전부터 바알 숭배의 중심지였음을 짐작하게끔 합니다. 오랜 시간 바알 숭배지 였던 이 땅을 이스라엘이 정복하고 ‘숲 속 마을’이라는 뜻의 ‘기럇 여아림’으로 바꾸어서 살아가고 있었 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잡기 위해서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다윗을 공격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 이기고 주 변 정세가 사그라들자 다윗은 하나님의 궤, 언약궤가 신경이 쓰였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정복하여서 기럇 여아림이라고 지명을 바꾸긴 했지만, 오랜 시간 바알 숭배지였던 그 땅, 예루살렘이 아닌 곳에 하나 님의 궤가 20년이나 있으니 다윗의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과의 전쟁을 마치자마자 다 윗은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기 위해 움직인 것입니다.
본문 1절은 다윗이 이스라엘 가운데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아서 하나님의 궤를 가지러 가기 위해 길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사건은 사무엘상 5장에 기록되어있는데 블레셋 땅의 아스돗과 가드, 에그론, 벧세메스를 돌며 그 때마다 하나님의 저주가 임해서 블레셋 사람들 이 두려워하며 궤를 기럇 여아림에 보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을 때가 바로 오늘 본문의 시점인 데, 이제야 다윗이 왕이 되고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가기 위해 길을 떠난 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서 특이한 점은 다윗이 그냥 무리 삼만 명을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 삼만 명의 무리를 ‘다시’ 모았다고 말합니다. 앞서 다윗이 왕이 된 후에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갔던 그 무리들을 다시 모은 것입니다. 기럇 여아림이 블레셋과 멀지 않은 가까운 지역이었기에 블레셋과의 군사 적 충돌을 염려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삼만 명이라는 무리는 단순히 군사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장로들, 관리들, 일반 백성들도 포함되어 함께 기럇 여아림으로 이동했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궤를 옮기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옮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백성들과 장로들이 함께 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궤는 단순히 십계명 두 돌판과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든 작은 나무 상자 정도 로 정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시내산에서 강림하신 지극히 거룩 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대표하는 지성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합니다. 본문 2절은 궤를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것과 하나님께 왕적인 통치권이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실제 언약궤 위 시은소 양쪽에 그룹들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곳 가운데 임재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 시고 그들을 통치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궤를 예루살렘 으로 옮긴다는 것은, 비록 다윗 자신이 눈에 보이는 왕의 자리에 있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 이심을 고백하는 신앙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가기 위해 새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새 수레를 준비함으로 하나님께 최대한의 존경과 경의를 표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헌 수레를 사용하면 혹시 그 수 레가 이전에 부정한 일에 사용되었을 수도 있기에 그런 일들을 방지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하 지만 다윗이 자신의 최선으로 새 수레를 준비한 이 행위는 사실 잘못된 행위입니다. 수레를 이용하여 궤 를 옮기는 것은 사실 블레셋 사람들이 궤를 탈취하고 이동할 때 사용한 방법이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방법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도 분명히 그 내 용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궤를 운반하기에 앞서 궤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직접 보아서 죽게 되는 일을 막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고핫 자손들이 채를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고 운반해야 합니다. 궤가 실제적으로 그렇게 크지도 않았고 무거운 것이 아니었기에, 굳이 수레를 끌지 않 는다 할지라도 충분히 고핫 자손들이 그 궤를 메고 예루살렘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레를 사용 해서 결국 이후에 큰 문제가 발생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어찌됐든 기럇 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20년간 있으면서 제한된 지역에서 제의의 기능을 하 던 하나님의 궤가 드디어 수레에 실려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상 7장 1절을 보시면 아비나답이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궤를 지키게 했는데, 엘리아살이 죽자 그 동생인 웃사와 아효가 임무를 대신 수행하며 궤를 지키다가 궤를 옮기는 일에 동원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는 과정은 참 화려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과 이스라엘의 온 족속들이 여 러 악기와 수금과 비파 등을 연주하며 하나님 앞에서 연주했습니다. 함께 온 장로들과 백성들이 열렬히 환호하는 가운데 수레가 이동했습니다. 삼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온갖 악기들이 연주되고 그들의 기쁨의 소리와 함께 이동하는 그 광경은 엄청난 모습이었을 것이고, 기쁨의 상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바알레유다, 즉 기럇 여아림 가운데 아비나바의 집은 산에 있었는데,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자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수레에 있던 궤가 많이 흔들리고 떨어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부득이 한 상황 가운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궤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손을 들어서 궤를 붙들었습니다. 사실 지극히 당연한 반응을 웃사가 보인 것입 니다. 이 궤를 한번 만져보고 싶어서 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눈 앞에서 궤가 땅에 떨어질 것 같으니 무의식적으로 붙잡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보좌를 상징하 며, 오랜 세월 이스라엘 가운데 소중하게 여겨지던, 또 형인 엘리아살의 뒤를 이어 궤를 지키고 있던 웃 사는 분명히 하나님의 궤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궤를 붙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7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웃사의 행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의도가 나쁘지 않으니 한번 정도는 용서해 주실 법도 한데 하 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는 단호했습니다. 하나님도 분명히 웃사의 마음을 아셨을텐데 그럼에 도 불구하고 웃사가 잘못하였다고 말씀하시고, 진노하시며 웃사를 치심으로 인해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 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고핫 자손들이 옮겨야 했는데 그 고핫 자손들도 하나님의 궤는 손으로 만 지지 않고, 고리에 채를 꿰어서 메고 가야 했습니다. 민수기 4장에서 하나님은 궤를 보는 것만으로도 죽 을 수 있으니 보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궤를 손으로 만졌으니 그로 인해 웃사가 죽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다윗과 웃사와 같이 실수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다윗의 전대 왕인 사울 역시 하나님 앞 에서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 족속을 쳐서 그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치라고 하 신 이유는 아말렉 족속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대적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7장에 그 사건이 등장하는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하여서 신 광야의 르비딤에 장막 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없자 모세를 원망했고,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하여서 하나님이 반석에 서 물이 나게 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르비딤에서 이스라엘과 싸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때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며 공격한 이유로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쳐서 그 모든 소유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것들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아말렉을 쳐서 그 모든 것을 진멸 해야 했지만, 아말렉의 왕 “아각과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사울이 진멸한 것은 가치 없고 하찮은 것뿐 이었습니다.
이후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와서 어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탈취하기에 급하였냐고 하자 사 울이 대답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무엘상 15장 21절은 사울이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왔나이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좋은 것들을 보니 하나님께 그것들을 제물로 바쳐 제사드리고 싶어져서 최상품의 양과 소를 죽이지 않고 끌고 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볼 때 사울의 마음이 나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탐심에 의해서 가져온 것도 있었겠지만 좋은 것을 보니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서 다 죽이지 않고 구별하여서 가져왔다는 그 말이 어떻게 보면 잘 못된 것은 없지 않습니까. 사울의 마음이 비록 좋은 의도였다고는 하지만 앞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명령에 불순종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다고 기록합니다.
사울과 다윗, 웃사 모두 우리의 관점으로 볼 때 그렇게 잘못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 하나님을 경외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한 행동처럼 보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가운데 다윗은 언약궤를 운반하기 위해 나 름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삼만 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을 동원했고, 새 수레도 준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언약궤의 운반 과정은 다윗이 이를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를 다 동원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줍니다.
성경 기자가 이렇게 다윗의 노력을 장황하게 기록한 이유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동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결국 준비부족이고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보 여주기 위함입니다. 다윗이 행한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다윗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새 수레를 준비하고 화려한 운송 행렬 모두 자기 만족에 그치는 행위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단순한 열심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아말렉과의 전쟁 이 후에 좋은 양과 소를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서 남겨둔 사울의 모습, 자신이 생각했던 최고의 방법을 동원해 언약궤를 옮기고자 한 다윗 모두 표면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사랑이 빚어낸 결과입 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후반부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의 방법과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판 단에 따라 행동한 결과는 웃사의 죽음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 하시고 가르쳐주신 방법이 아닌 사람의 방법은 결국 헛된 것이라는 교훈이 본문 가운데 분명하게 드러납 니다.
우리 역시 교회 속에서, 또 각자 다양한 삶의 영역들 가운데서 나만의 방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하 나님 앞에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다윗의 실수를 본 우리는 자신의 방법이 올바 른 것인지 확인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혹시 나의 열심과 나의 방법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과는 전혀 상관 없는, 그런 동떨어진 방법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 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성경 속에는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 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에 나타난 방식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열심으로 달려왔던 우리의 모든 모습들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방법과 행동들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맞는지 확인하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초등부 아이들에게도 같은 말을 했었는데, 땅에 돈이 떨어져 있으면 그것을 주워서 경찰서 에 맡기든 해서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맞는 행동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돈을 보고 ‘괜히 경찰서에 맡 기지 말고 교회에 헌금하자’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8계명인 “도둑질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 기는 것이 됩니다. 교회에 헌금하고자 하는 마음은 귀하지만, 잘못된 방법을 통한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 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말로 우리 삶 가운데 있는 많은 습관들과 행위들, 삶의 방법들 가운데서 내 방법, 내 생각들이 있다면 다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해 살기를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그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굳이 저렇게까지 하냐며 손가락질하며 수근댄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방 법대로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