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0UNLIKELY
Disgust
0UNLIKELY
Fear
0UNLIKELY
Joy
0UNLIKELY
Sadness
0UNLIKELY
Language Tone
Analytical
0UNLIKELY
Confident
0UNLIKELY
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0.29UNLIKELY
Conscientiousness
0.27UNLIKELY
Extraversion
0.54LIKELY
Agreeableness
0.6LIKELY
Emotional Range
0.29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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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91 오 놀라운 구세주
본문 겔34:11-16 (구p.1204)
자비의 하나님, 늘 언제나 선한 것으로 우리에게 공급하시고 인도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늘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과 계획보다 앞서 가시며,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돌보심을 믿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을 날마다 의지하는 우리가 되게 하시며, 주님의 날개 아래에서 늘 안전함을 누리는 우리가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기원전 589년, 예루살렘은 바빌로니아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다.
그때로부터 3년 5개월 동안의 포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극적으로 몰락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들은 성경 안에서도 자세하게 발견할 수 있다.
예레미야애가의 기록에 따르면, 젖먹이들이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고, 어린 것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하여도 한 술 떠 주는 이가 없었으며,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다보니 자애로운 어머니들이 제 손으로 자식들을 삶아서 먹었는 지경에 이르렀고, 젊은이와 늙은이가 길바닥에 쓰러지고, 처녀와 총각이 칼에 맞아 넘어졌다고 기록하며 당시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함을 묘사하고 있다.
열왕기하의 기록에 따르면, 바벨론 제국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파괴하고 백성을 유린하였으며, 건물을 모두 불태우고 성벽을 헐어 버렸다.
또한 도주하다 사로잡힌 시드기야 왕이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은 처형당하고,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묶여 바빌로니아로 끌려 갔다고 기록한다.
본래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에 젖어 살던 이스라엘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예루살렘이 있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삶의 뿌리였다.
이들은 삶의 터전과 신앙의 전통을 상실한 채 그 땅에 유랑자처럼 남겨지거나 바빌론 유배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한때는 제사장 나라로 일컬어지던 이스라엘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이사야를 비롯한 많은 선지서들에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데, 가장 주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방 강대국들의 신들과 신문물을 함께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는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던 이스라엘이 저들의 진정한 왕을 저버리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어 그것들로부터 자신들의 평화와 만족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버렸기에 더이상 하나님의 말씀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하나님께 드려왔던 모든 종교예식들도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하나님 한 분 만을 향한 신앙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더이상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성품인 공평과 정의가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지경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들을 바르게 지도해야 했을 지도자들 때문이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공평과 정의 대신 뇌물을 통한 편파적인 재판을 하기 시작했고, 할수만 있거든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약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기 시작한다.
백성들이 다른 신앙으로 흔들려도 지도자들은 그들을 바로 잡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앞장서서 하나님을 외면했다.
당연히 그 땅의 약자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을 괴롭게 만들기 시작한다.
이러한 내용들이 함께 읽진 않았지만, 겔 34:1-6 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2절을 보면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이 목자들은 어떠한 자들인가?
2절 중반부부터 이어서 보면,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 이라고 말하고 있고, 3-4절을 보면,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이처럼 자기 배만 불리며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들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로 자신들의 배만 불리려 하다보니, 그 결과에 대해 5-6절에서 말씀하시니, 목자가 목자의 일을 하지 않음으로 양들이 흩어져 들짐승들의 밥이 되었고, 하나님의 양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는데도 찾는 이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목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배만 불리기 위해 형제들을 억압하고 착취하여 양떼가 흩어져 주변 강대국들의 약탈 대상이 되었고, 결국 포로로 끌려가게 생겼는데도 그 백성들을 돌볼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심판하신다.
7-10절의 말씀을 보라.
하나님께서 저들의 손에서 하나님의 양들을 찾으실 것이기에 기존의 목자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도 먹이지 못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배도 불리지 못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저들의 직위를 하나님께서 빼앗으실 것이라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양떼들을 이끌만한 목자 자리가 이제 공석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이 자리에 앉혀야 한다.
그러나 후패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그 누가 목자 자리에 올라간다 할지라도 결국 동일한 죄만 번복할 뿐이다.
그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키시며, 그분의 양떼들을 능히 보호하고 선한 길로 인도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배경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양떼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목자가 필요한데, 그 누가 하나님을 만족시키며 그분의 양떼들을 하나님께로 바르게 인도할 것인가? 그렇기에 11-16절 말씀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셔서 그분의 양들을 찾으실 것을 말씀하신다.
12절에 ‘내가 내 양을 찾아서 ...그것들을 건져낼 것’을 말씀하시고 13절에서 ‘내 양떼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본토로 데리고’ 오실 것이며, 14절에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어 들짐승들의 위협에서 안전하게 보호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제 15-16절을 보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앞전의 목자들처럼 자기 배만 채우기 위하여 자기 양들을 잡아먹는 삯꾼 목자들 대신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실 것을 말씀하신다.
잃어버린 양을 하나님 친히 찾으시고, 언제 원수의 공격이 올지 몰라서 서서 경계하던 자들에게 평안을 주어 누워 있게 하실 것이며, 쫓기던 자들을 돌아오게 하시고, 상한 자를 싸매주며, 병든 자를 강하게 해주실 참 목자가 되어주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쯤되면 우리에게 자신을 ‘참 목자’로 드러내신 분, 사랑하는 양떼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진정한 ‘선한 목자’ 되신 분을 연상할 수 있다.
누구이신가?
바로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요10:11 말씀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라고 말씀하셨다.
세상 어느 목자도 자기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없고, 모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불법을 자행하며 하나님의 양떼들을 고통스럽게만 할 뿐이다.
결국 사랑하는 양들을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셨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에게 인도함을 받는 그분의 교회는 언제나,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이와 같이 고백할 수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완전하신 분께서 친히 우리를 먹이시고 인도하시는데 우리에게 뭐가 더 부족할 수 있을까.
사랑과 자비의 목자께서 우리를 친히 다스리시는데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 가운데 친히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우리를 그분의 품에서 뒤흔들 수 있겠는가.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연약한 목자들 대신 친히 우리를 돌보시기 위하여 우리의 삶 가운데 내려오신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라.
우리의 신앙 여정 가운데 늘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목자의 손길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기에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고,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안위하시기에 그분의 품 안에서 안전을 누릴 것이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우리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는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붙들라.
이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충만한 만족을 누리는 복을 누리시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도하자.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목자가 되어주심에 감사.
날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이끄시는 주님을 더욱 신뢰하는 우리의 신앙 여정이 될 수 있길, 선한 목자께서 나를 다스리시니 잠시 잠깐의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선한 목자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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