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온 내용증명서

이사야서 설교 1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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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우리 자신만 바라보는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 행함 없는 믿음의 행위는 그저 경건 놀이이며 기도 퍼포먼스입니다. 이제는 그 퍼포먼스를 중단할 때가 되었습니다. 3.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Notes
Transcript
안녕하세요, 헤브론 가족 여러분.
여러분 앞에서, 제 첫 설교를 내어놓습니다. 제가 한 주간, 고민하고 씨름하던 문제에 대해서 함께 나누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 내용은 이제 갓 전도사가 된 애송이가 하기에는 제가 생각해도 참으로 무겁기도 하고, 건방져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내용인 듯합니다.
목사님께서 설교를 부탁하셨을 때, 그리고 본문을 중간중간 뽑는 것이 아닌 특정한 책을 주욱 읽어나가는 식으로 설교를 이어주었으면 한다고 하셨을 때, 눈 앞이 새하얗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자주 있어서는 안 되는데 말이지요.
어쨌든, 기도하는 마음으로 어느 본문을, 정확히는 ‘어느 책을’ 가지고 말씀을 나눠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던 순간, 이사야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쉽게 읽기 어려운, 그렇지만 너무 중요한 책이 이 책이니, 이렇게라도 이 책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아, 그런데 첫 장부터 해야 했었지, 하는 마음으로 1장을 쳐다보는 순간, 눈 앞이 또 하얗게 변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제 내가 처음부터 교인들을 혼내야 된다는 건가? 하는 마음으로, 그 전에 하나님이 나를 엄청 혼내시는 건가? 하는 마음으로, 이 본문을 읽어나갔고, 그 마음으로 이제부터 여러분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자신만 생각하는 신앙을 결코 옳다 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가 이 글을 적은 시점은 학자들에 따르면 대략 웃시야 왕이 다스리던 말년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아사랴라고도 기록되어있는 왕이지요. 그런데 내용이 조금 특이합니다. 웃시야 왕은 성경에서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왕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인 아마샤 왕 역시, 한 때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왕입니다. 아마샤는 말기에 하나님을 버리고 에돔의 신을 섬겼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버려지고 북이스라엘에게 전쟁에서 패하고, 결국에는 반란군에 의해 타지에서 살해당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웃시야 왕은 그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찾았고, 스가랴 선지자가 사는 동안에는 (성경을 쓴 스가랴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그를 형통하게 하셔서 그의 이름이 이집트 변방에까지 퍼졌다라고 역대하 26:8에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6:8 NKRV
암몬 사람들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
유다 왕국은 이렇게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의 통치 말기에는 그가 율법을 어겨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아 나병환자가 되고 그렇게 죽고 말지만, 나라가 번영한 것이 어디 쉽게 사라질 일은 아닐 것입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대는 간다고 하는 옛 말이 있듯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아주 강력한 비판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사 1:4-6)
이사야 1:4–6 NKRV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분명 왕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칭찬하셨는데, 그리고 그의 왕국이 형통하도록 인도하셨는데, 왜 백성에 대해서 이렇게 신랄한 비판이 이어지는가 말이지요.
여기에 대한 힌트는, 웃시야가 죽은 뒤 기사를 보면 조금 나오게 됩니다. (대하 27:2)
역대하 27:2 NKRV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
백성이 부패했는데, 어떻게 부패했다고 말하고 있는지요? ‘여전히’ 부패했다고 성경은 기술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부패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멸망의 예언’으로 응답하십니다.
사실 이 단락은 하나님께서 법정에서 원고로 서 계신 장면을 연상하도록 합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소단락 제목으로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지극히 평이한 제목을 달았지만, 2절에서 등장하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신청하는 이 말씀은 신명기에서 모세가 설교할 때 등장하는 특징적 단어였습니다. (신 30:19-20, 신 32:1)
신명기 30:19–20 NKRV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신명기 32:1 NKRV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하늘과 땅이 증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법적 질서’로 선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증인이 다시 소환된다는 것은 그 법이 어겨진 것에 대해 하나님이 추궁하시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이미 선포된 맹세가 어겨진 것에 대해 증인을 불러 증언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무엇이 어겨진 걸까요? 하나님과 나누었던 언약 중에서 깨어진 건 ‘그의 말씀을 청종한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의 내용을 자세히 보겠습니다. (사 1:2-3)
이사야 1:2–3 NKRV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하나님의 소장 타이틀은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애들을 내가 키웠는데, 효도를 안 합니다. 음, 이렇게 축약해보니 꼭 요즘 나오는 불효소송같군요. 어쨌든, 이 내용에서 중요한 것은 ‘거역함’과 ‘알지 못함’, 그리고 ‘깨닫지 못함’입니다.
거역함을 뜻하는 단어 פשׁע pasha는 ‘언약을 깸’이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특히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섬을 가리킨다, 라고도 적혀있지만, 이 언약의 불이행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소장에 더 적혀있는 것이겠지요. ‘계약 불이행’이라고 말입니다.
알지 못하다라는 단어는 יָדַ֔ע lo yada’입니다. ‘알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정확히는 “관계적 앎”에 해당합니다. 이는 이 yada라는 단어가 남녀가 동침하는 장면에서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상대방에 대해 ‘속속들이, 관계적으로 알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Byn입니다. 이해하다라는 뜻을 지녔지만 본문에서의 형태는 hitphael. 재귀, 상호, 반복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다, 스스로 이해하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즉 이 계약 불이행은 하나님과의 관계적 앎에서 떠나가 있는 자기 자신에게도 집중하지 못하고, 그 불이행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고소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분명 이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겠다고 선언했는데 말이지요.
그러므로 이들은 죄악된 백성이요, 부패한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멀리 갔죠. 어디로 갔을지는 자명합니다. 우상에게 갔습니다. 겔 14:5를 보면 명확합니다.
에스겔 14:5 NKRV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이 마음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라
우리에 대해서 생각해보려 합니다. 우리는 이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가 그 ‘남은 자’이기를 원하며 읽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남은 자는 하나님의 그 신실한 약속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그 남은 자라고 해서 잘못되었다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 기사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을 대입해서 읽고는 합니다. 우리는 성한 데 없이 터지고 상하고 또 맞고, 그러나 누구도 우리를 위로할 자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위의 내용을 다시 묵상하면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이는, 왕과 백성의 이 불협화음은 굉장히 이상합니다. 보통 왕의 행동에 따라 왕국의 행방이 결정되었는데, 지금은 왕이 그리 잘못한 듯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오늘 본문 4-6절에서는 유다 백성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반역을 행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왕이, 자기 자신만 하나님을 찾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혹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피해자로만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어나가는 것은 아니었을까? 혹시 내가 남은 자라고 생각하고 동일시했던 이 인식 자체가, 기독교적 선민사상에 취해서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이 질문은 이러한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나는 자기 그룹, 즉 이 교회 안에서만의 생활에 만족한 것은 아닌가요?

나는 남들보다 경건한 생활을 했으니 됐어, 하고 만족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내 앞길만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면 됐어, 라고 남과 나를 구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나 자신이 그 남은 자이기만 하면 된다고, 남은 어찌 되든 상관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겔 33:8입니다.
에스겔 33:8 NKRV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기도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손은 어디에 있었나요?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손에 집힌 펜을 통해 유다 백성들에게 강한 질책을 이어나가십니다. 그들을 ‘소돔의 관원과 고모라의 백성’이라고까지 표현하시지요.
1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기 싫다고 말씀하시는, 그냥 들으면 굉장히 이상한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이사야 1:11–14 NKRV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실 여기서 이야기된 예배 형식은 모두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것입니다. 무수한 제물도, 숫양의 번제도, 짐승의 기름도, 수송아지, 어린양, 숫엽소의 피도, 전부 하나님께서 제물로 지정하신 것이지요.
내 앞에 보이러 온다는 이 말씀도, 사실 출애굽기에서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요구하신 것이었고, (출 23:17, 출 34:23) 분향도, 월삭도, 안식일도, 대회도, 절기도 전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다 싫다고 하시는 그 뒤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 내용이 조금 더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일단 우리 성경과 원어 성경에서 이 뜻을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12절의 표현을 히브리어로 보면,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는 앞에 붙는 말이라기보다는 뒤에 붙는 말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올 때, 내 마당을 짓밟는 이 짓은 대체 누가 가르치더냐? 라고 말이지요.
13절에 하나님께서 그 절기들을 싫어하시는 이유들을 조금 언급하십니다.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비슷한 이야기는 예레미야 선지자도 언급합니다.
예레미야 7:9–10 NKRV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조금 더 내려가볼까요, 15절입니다. 이 모든 일에 더해 기도도 듣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에는 그 이유가 정확히 드러납니다. 우리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피에 젖은 손으로 기도를 하고 있으니, 보지도 듣지도 않으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당장 그 장면을 상상해봅시다. 누가 우리에게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비는데, 옆에는 시체가 놓여있고 아무리 봐도 그 시체에서 나온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손으로 빌고 있습니다. 생각만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이 간청이 진심으로 느껴지실까요?
하물며, 우리보다 더 깊이, 심지어 외면만 보는 우리와 달리 사람의 깊은 내면까지도 통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겠습니까?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 15절의 기도를 ‘기도 쇼’라고 표현합니다. 행실이 따라오지 않는, 악행을 지속하는 상태에서의 기도도 예배도 절기도, 모조리 다 쇼고, 예배 시늉이라는 겁니다.
미가 3:4 NKRV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
분명, 기도라는 행위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 없이는 기도라는 것을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고 응답하실 거라는 순수한 그 믿음 없이, 어찌 기도가 되겠습니까.
그 믿음 없이 ‘기도한다’고 하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소원을 들어준다며 하는 모든 미신적 행위, 예컨대 돌탑을 쌓는다는지, 108배를 한다든지,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빈다든지, 심지어 점집을 가고 무당에게 굿을 부탁한다든지 하는 그 모든 행위를 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영적으로 삭막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일에 대해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으리라는 세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사람은 그렇다 치고,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거라는 그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 행위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행위를 하는 이들에게 있는 믿음은 건강할 수가 없으며, 그 믿음이 그를 살리지도 못합니다. 에스겔 33:12입니다.
에스겔 33:12 NKRV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바울 사도 역시 비슷한 논리로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8:7입니다.
로마서 8:7 NKRV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그의 행위가 악한데, 생각이라고 선할 수 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일 뿐입니다. 육신대로 사는 사람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더이상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소장에 적힌, 피고에게의 요구 사항은 지극히 단순했습니다. ‘네 손을 씻어라’였습니다. 악에 물든 그 손을 씻고, 선행을 배우고, 정의를 구하고, 학대받는 자, 고아, 과부를 위하여 일하라, 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고아와 과부, 나그네 등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시는 말씀은 구약 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신명기에서만 해도 11번이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언급하시지요.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자기 자신만 잘 먹고 잘 살도록 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그들은 의무적으로 타인과 약자를 돌보아야 하는 의무를 손에 들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16:11 NKRV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신명기 14:29 NKRV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게다가 이 의무에는 예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안 해도 된다는 등의 예외 규정도 없고요, 이 고아나 과부와 나그네가 어느 민족인지를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저 ‘네 성 중에 있는’, ‘너희 중에 있는’이라는 상황적 단서만 주어집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따져보려는 마음은, 최소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내용에는 없습니다.
행위가 선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런 숨겨진 뒷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이 따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생활은, 모든 생활을 통틀어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하는 일만이,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 일이 아니라요.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야고보서 2:14–17 NKRV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하나님은 마지막까지도 기회를 주십니다.

지엄한 심판의 예고, 그리고 죄악의 고발 이후 하나님의 고소장에는 고소의 취소 요건이 적혀 있습니다. 사실 이 ‘변론’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는 역시 법정의 모습을 상상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원고-피고의 관계에서 한 번 다퉈보자는 이야기이지요. 이 변론하다라는 단어인 יכח YAKAH 동사 자체가 ‘다투다,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에 그 단어의 뜻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한편 이 동사의 기본적인 뜻은 ‘다투다 생각하다’에서 한 걸음 더 나가 ‘무엇이 옳은지 결정하다’에 있으므로, 이 내용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서로 극단적으로 다르니, 거기서 맞춰나가는 작업을 하자는, 초청의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토론해보자고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조금 막막해집니다. 어찌 감히 우리가 하나님과 토론할 수 있는가, 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공소장 맨 처음부분을 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않음’이라는 죄목으로 기소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분을 향해 아예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논쟁이라도 해 보자는 이 말씀은 오히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관심을 두고 계신지를 거꾸로 보여주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그 회개는 단순한 인식적, 의식적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삶을 사는 것에까지 이어지는 것이 회개임을 또한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끊고 싶어하시지 않습니다. 벌로써 끝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언제든지 다시 기회를 주고 자신과의 ‘yadah’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원하십니다. 바뀌길 원하시고, 용서의 은혜를 언제든지 주고 싶어하시죠.
그 용서의 은혜가 주어지는 조건은 명확합니다. 이전의 ‘반역’에서 돌아서는 것이지요. 이전의 ‘죄’의 얼룩으로 주홍빛으로 물든 손을, 하얗게 씻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눈보다도 더 희게 씻어주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씻음이 아니라, 죄악을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겠다는 표현입니다. 시 103:11-13
시편 103:11–13 NKRV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우리의 앞에는 선택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순종과 불순종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주실 것이고, 그 은혜를 끝까지 거부하는 자에게는 ‘칼에 삼켜짐’이 있는 것이지요.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이 사실이 조금 더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는 것, 칼에 삼켜지는 것이 모두 같은 동사인 axal (먹다) 의 능동태/수동태로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즉, 정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고 해석하면 될 것입니다.
헤브론 가족 여러분, 우리 앞에는 하나님의 공소장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공소장에 답해야 합니다.
1. 우리는 우리 자신만 바라보는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 행함 없는 믿음의 행위는 그저 경건 놀이이며 기도 퍼포먼스입니다. 이제는 그 퍼포먼스를 중단하고 말씀의 핵심을 실천할 때가 되었습니다.
3.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허락하시고, 우리에게 내어놓으신 이 기소장을 통해 당신의 뜻을 보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나 혼자만의 신앙’에서만 멈춰 있다면, 이제 그만 그 붙들고 살아가는 것을 벗어나게 하시고, 우리가 선한 행실로 주를 드러내지 못하고 살고 있다면, 우리의 행실을 고쳐 주사 주의 진리로 살게 하소서.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고 계신 주님의 은혜를 늘 생각하며, 순종함으로 당신의 뜻을 살피게 하여 주소서. 그럼으로써 당신께서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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