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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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이 가지는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라는 연대의식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세계에 많은 민족들과 국가들 가운데 한국 사람만큼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쓰는 민족이 드물다고 합니다. 심지어 지금 한국이라고 일부러 말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한국을 말할 때 보통 한국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나라’라고 부릅니다.
서양의 경우를 보면 이름을 쓸 때 이름이 먼저 나오고 성을 말합니다. 제 이름을 서양식으로 부르면 진관 박 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이 집단보다 앞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성이 먼저 나오고 이름을 뒤에 붙입니다. 집단이 먼저 있은 후에 개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소개할 때도 이런 성향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외국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이름을 말한 뒤에 어느 회사나 어느 조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느 회사에 다니는 아무개, 어느 교회의 어떤 집사라고 소속을 먼저 밝힙니다. 제가 어디 가서 저를 소개할 때 ‘저는 박진관이라고 하고, 대구청구교회를 섬기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구청구교회를 섬기는 박진관 강도사’라고 소개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는 특징 가운데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은 우리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공동체를 강조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공동체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의 ‘정’을 이야기하고, 그 공동체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이런 문화는 우리에게 좋은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공동체가 가지는 좋은 모습이 우리에게 그렇게 많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속하지 않은 다른 공동체에 대해서는 배척하려는 성향을 보이고, 또 그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하나되지 못하고 비판하는 그런 모습들이 우리 안에 많이 보입니다.
대구청구교회라는 교회도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 나라 사람들이 모여 대구청구교회라는 한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예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한 공동체 된 우리 교회는 얼마나 사랑의 공동체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까. 누가 보아도 정말로 저 교회 공동체는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시간 말씀을 통해서 사랑의 공동체는 무엇이고, 그 사랑의 공동체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우리 모두가 사랑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Link. 우리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모습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첫째, 사랑의 공동체는 문제를 사랑으로 함께 바라보아야 합니다.
첫째, 사랑의 공동체는 문제를 사랑으로 함께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 즉 요한일서, 이서, 삼서는 모두 사도 요한이 썼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드러났는가를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요한서신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기록한 편지입니다.
요한서신 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서신서들은 교회에 보낸 편지인데, 교회의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보낸 것들입니다. 종종 신학적인 이유로 보내진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보내진 것들이었습니다.
여기서 현실적인 문제라고 말함은 어떤 문제에 관한 것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현실적인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의 차원도 아니고, 성도가 세상을 향해서 해야 하는 그런 차원의 문제를 말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는 다름아닌 공동체 안의 문제들로 인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이며 골칫거리, 신앙에 대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영지주의’였습니다. 영지주의라는 것은 그리스 철학에 바탕을 둔 철학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육체와 정신을 나누는 이원론적인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을 육체와 정신이라는 이 두 가지로 나누어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육체를 악하고 타락한 것으로 보고, 정신만이 선하고 순수하다고 보았습니다. 영지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하는 성육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신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처럼 보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가현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육신으로 오시지 않고 그냥 그렇게 보이기만 한 것이라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큰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 속죄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데 육신이 없으니 죽을 수가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니 당연히 부활도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없으니, 우리의 구원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인 영지주의로 인해 공동체의 근간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 요한은 편지를 쓰고, 그 주장을 하나씩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의 말씀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아멘.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듣기도 하고, 눈으로 보기도 하였으며, 자세히 보았고, 심지어 손으로 만졌노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분명히 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듣고, 보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가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반박하는데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만졌다’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의 성육신을 강조한 것입니다. 2절에서도 계속해서 예수님이 나타나셨고, 사도인 자신은 이를 보았고 증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영지주의가 주장하는 가현설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편지를 보냄과 동시에 다른 말 없이 바로 반박하며 예수님의 성육신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의 공동체를 향해 사랑의 마음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스며든 잘못된 생각들을 사랑으로 바로잡으려 애쓰는 마음이 요한일서라는 이 편지에 묻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사도 요한의 마음으로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바라보고 사랑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자신의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를 사랑으로 바라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현실적인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코로나19로 인해 여전히 걱정하며 고민하여서, 또 여러가지 상황으로 인해 함께 예배드리지 못하는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을 보면서 어떻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당장 나의 일이 아니라 여기고 무관심하게 있지는 않습니까. 안전이라는 민감한 문제가 있으니 나의 구역원들과 전도회 회원들의 보이지 않음에 그냥 손놓고 방치하고 있지는 않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라는 곳이 그냥 어쩌다보니 같은 교회에 다니게 되어서 알게 된 사람들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는 대구청구교회라는 이 교회 공동체를 나의 가족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로 이 교회 공동체가 우리의 가족이라면 우리 안에 어떤 문제가 생길 때 우리가 비판의 칼을 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그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그랬듯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위해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말뿐인 신앙이 아니라, 내가 믿는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신앙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Link. 이처럼 우리는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를 사랑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또 어떤 모습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둘째, 사랑이신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합니다.
둘째, 사랑이신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합니다.
요한서신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사랑’입니다.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쓰여진 이 편지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왜 사랑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동체가 시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의 편지를 받는 신앙 공동체가 같은 신앙을 고백해 놓고도 사랑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오래 참는 것입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시면 아무리 어떤 사람에게 많은 은사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다 헛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랑이 공동체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없는데 입바른 소리와 이상주의적인 비평과 공격들이 있으니 공동체가 시끄러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잠깐 육신을 빌려 입고 다녀가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메시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기 위해서 육신으로 오셔야만 했지만, 그것이 성육신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렇게 살아가라고 모범을 보이시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우리 삶의 모범이 되며, 삶의 표준이 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실체를 보이시기 위해서 이 땅에 성육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실천할 것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라는 이 말씀을 우리는 계속해서 기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모습,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면서 사는 삶,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그 삶을 살아내는 그런 삶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당신을 본 받는 삶을 살아내라고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그렇게 살아 보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분, 섬기는 자로 오신 분, 우리의 주인이시되 우리를 강요하거나 억누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섬기러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으로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하는 것은 구원 받은 사람 그의 전존재가 하나님이 목적하신 사람으로서의 변화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로 하는 신앙이 아니라 그의 전인격과 전존재로 보여야 하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되면 우리 안에 생기는 문제와 다툼들은 대부분 없어질 것입니다. 전인격으로, 전존재로 보이는 신앙을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입바른 소리나 이상주의적인 그런 비평들이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누구의 자녀입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땅히 누구를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본 받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지난 부흥회 기간에 윤치영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우리 집 자녀가 옆집 아저씨 닮으면 곤란해 진다는 그 말씀이 기억나십니까? 한 가정에 자녀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자라가면서 부모를 닮는 것이 아니라, 옆집 아저씨를 닮아간다면 그것만큼 당황스럽고 어이없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희 가정을 돌아보면 정말 ‘유전자가 강하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에게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유전자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 똑같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고모들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도 시간이 지나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종종 받고는 합니다. 지난 주일에 목사님께서 가정에서 감정을 마음대로 드러내지 말라고 하시긴 하셨지만, 아버지의 젊은 시절의 성격을 본 받아서 집에서 종종 젊은 혈기를 토해내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녀라면 그 부모를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닮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닮아가는 것처럼, 어찌되었건 자녀는 부모를 닮아가고, 본받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당신을 본 받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으니 이 땅에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게 하셔서 그 예수님을 본 받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추상적으로 하나님이 아버지니 ‘그를 본받자’라고 말하면 보이지도 않는 분을 본받을 수 없으니,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 땅을 살아가게 하시고, 그 예수님의 삶을 본 받도록 우리를 배려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당신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자녀삼아 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닮지 않고 계속해서 사탄의 모습을 닮아가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인데 어떻게 삶을 살아가면 살아갈 수록 나의 모습이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사탄 마귀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의 말씀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요한일서 말고도 성경의 많은 말씀들은, 아니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랑의 모습이 없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사랑의 모습, 사랑의 능력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모습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른다고 고백하는 그 신앙고백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나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실제와 무관한 책에 적힌 좋은 내용, 좋은 교훈정도로 생각하고 끝내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본 받는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예수님이 보이신 낮아지심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의 연수가 높아지면 높아질 수록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오래 신앙 생활 했고, 신앙의 선배니 더 높아지는 삶을 살고 싶은 그런 욕구가 우리에게 있지는 않습니까?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만으로도 얼마나 낮아지신 건데, 거기다 제자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겸손의 모습을 분명히 보이셨는데 우리에게는 정말로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본 받는 모습이 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말하고 예수님이 가신 그 길, 그 삶을 본 받는다고 말하면서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사랑의 본을 보이시며, 겸손의 본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말로만 너희가 이렇게 살아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땅을 살아가시며 삶의 본을 보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처럼 낮아져서 사랑으로 섬길 부분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교회에 종종 새가족이 오거나 안내가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올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나는 새가족부가 아니니까, 귀찮아서 모른척 그냥 지나치지는 않으셨습니까.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하겠지 하고 그냥 지나친 섬김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는 일들은 하기 싫어하고 내가 돋보일 수 있는 곳에서만 섬기려고 하지는 않았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모습은 얼마나 예수님을 본 받고 계십니까. 제 삶의 모습을 보니 얼마나 부끄러운 삶인지 여러분에게 예수님 닮으라고 말하기 힘든 그런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를 제 마음 속에 다 가지고 살아가면서 얼마나 완악하게 예수님 닮기를 멀리하고 사탄 마귀 닮기에 열을 올리고 살았는지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그 사랑의 모습, 섬김의 모습, 겸손의 모습은 원래 있기는 했던 것인지 다 사라져 버리고, 정말 입바른 소리들, 이상주의적인 그런 비평들이 제 안에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옆집 아저씨, 옆집 원수와 같은 사탄 마귀를 닮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그런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입바른 소리만 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머리만 커져서 그렇게 살아가지도 못하면서 남들을 향해 이상적인 비판만 늘어놓는 그런 사람도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우리도 행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우리의 본이 되신 예수님, 삶의 모범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그 삶을 본받아 정말로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대구청구교회 가족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