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을 굳게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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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여러분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녀의 교육을 위해 세 번씩이나 이사를 하면서 아들을 가르친 내용입니다. 맹자는 이사를 하는 곳의 특성을 따라했습니다. 묘지로 이사를 했더니 곡소리 꾼을 따라했던 맹자였습니다. 다음 장소인 시장에 가니 장사아치들을 따라했던 맹자였습니다. 다음 장소는 공자를 묘시는 문묘에 갔더니 비로소 맹자가 관리들의 성품과 행동을 따라했고, 그때에야 비로소 공부에 관심을 갖던 맹자였습니다.
코칭 : 이 내용은 자녀의 교육을 위한 부모의 교육열을 나타내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있는 곳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타내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스펀지와 같아서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에 따라 우리의 마음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발을 밟고 서있는 곳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 가득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이 삶에 드러남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거하고 계신가요? 여러분은 지금 마음에서 무엇을 나타내고 있으신가요?
도입 : 미국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특색이 있습니다. 돈이 어느 정도 생기고 나면 좋은 지역으로 이사를 갑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는 곳은 이런 특색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바로 학군입니다. 그리고 안전해야 합니다. 교통이 좋아야 하구요.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 있는 한인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의 특색이라도 갖춰져야 이사를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지역은 누구나 환영할 만한 장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갖춰졌는데, 이 곳에 사단을 숭배하는 예배당/ 사단교가 있다면 여러분은 가시겠습니까? 다 좋은데 사단교가 있는 지역입니다. 어떻게 하십니까?
본문 : 오늘 말씀을 나눌 버가모 지역이 이런 지역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버가모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습니다. 버가모라는 이름은 높은 곳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처럼 높은 고지대에 거하여 뛰어난 절경이 있었고, 고지대에는 언제나 신전이 있었습니다. 절경이 정말로 뛰어나 많은 헬라신의 신전이 버가모 지역에 세워졌습니다. 제우스와 디오니소스신전이 세워져 사람들의 종교심을 끌어 올렸습니다. 무엇보다 황제에게 충성된 지역이다 보니 황제숭배 신전이 소아시아 7개의 지역에서 제일 먼저 지어진 장소였습니다.
사단의 권좌 : 황제 숭배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보니 황제는 버가모 주민들을 어여쁘게 여겨 많은 문화적 혜택을 누리게 해주었습니다. 세금감면혜택과 경기장, 수많은 문화적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20만권의 장서로, 로마에서 제일 많은 도서관을 세워주었습니다. 이 도서관에는 당대 제일 유명한 헬라철학이 구비되어 주민들의 이성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버가모 지역 주민들은 이성적이었고, 문화적으로 윤택했고, 정치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삶을 유지 시켜 주는 것이 황제숭배 덕분이라 생각하며, 그들은 최고의 충성을 다했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마음과 마을의 한 복판에 이교신전과 황제 숭배 신전은 그들을 다스리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황제의 총애를 잃을 것을 두려워한 주민들을 교회의 교인들을 미워했습니다. 교회를 향해 적대적이었습니다. 이교를 믿지 않는 교인들 또한 미련한 자라했습니다. 주민들의 마음은 황제와 이교 신들로 가득찬 지역이 버가모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과 문화, 종교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지역이 버가모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버가모 지역을 사단의 권좌라고 부르십니다.
버가모에는 치유의 신전인 아스클레오피스 신전이 있었습니다. 신전에서 치유 기도를 마치고 나면 밖에서 신에게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신전의 문양은 지금도 존재합니다. 구급차를 보면 왠 장대에 뱀이 달려 있죠? 네 이게 모세의 지팡이로도 보이지만, 아스클레피오피스신을 나타내는 것이라 합니다. 이 신전의 신은 뱀이었습니다. 이 뱀이 인간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신이라는 것이죠. 요한계시록/성경은 뱀을 사단의 상징으로 보고 있는데, 뱀을 숭배하며, 찬양하는 지역이야 말로 사단의 권좌라 불릴 만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치유하며 구원할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사람들은 뱀을 믿고 있었습니다.
코칭 :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누가 우리의 참된 통치자인가?’입니다. 버가모의 주민들은 우리의 통치자는 황제라고 외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는 우리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심을 주장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통치자이시니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더욱 믿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치료자-구원자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통치자는 누구십니까? 우리는 풍요로운 세상 속에서 결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1) 좌우의 날 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러한 버가모 지역의 교인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좌우의 날 선 검을 가지신 이”로 묘사됩니다. 본문에서 나타난 검은 장검으로 조사가 됩니다. 말에서도 공격이 가능한 제일 센 칼이었습니다. 이 칼은 대개 총독이 가지고 있었고, 이 칼을 가진 사람은 즉결심판이 가능한 심판권을 나타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에 대한 비유는 심판하시는 주님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버가모의 반 기독교적 세력과 싸우시며 그들을 심판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또한 사람의 생사는 적대적인 대적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검은 말씀으로 해석이 됩니다. “히 4:12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주님은 사람들을 말씀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정당하며, 거룩하기에 심판당하는 그들의 결과는 옳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며, 쪼갤 것입니다. 믿는 자나 아니 믿는 자나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이 말씀은 믿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아닙니다. 사랑의 채찍입니다. 주님은 좌우의 날 선 검으로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시며, 세속적이며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누가 참 통치자인가? 누가 참 구원자-치유자인가? 당신은 어디에 거하고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2) 순교자의 교회, 충성된 증인 안디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버가모 교회는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순교자를 낳은 교회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박해가 따르더라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순교의 자의 피, 순교자의 열매는 교회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순교의 열매는 안디바였습니다. 안디바의 죽음은 놋으로 만든 송아지에 사람을 넣고, 불태우는 사형의 방법을 썼습니다. 너무나도 극심한 사형의 방법이었습니다. 이 안디바는 누구일까요? 안디바는 주석 속, 교회의 전승에서는 버가모 교회의 리더 혹은 담임목회자로 조사가 됩니다. 사도바울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며 자신의 후임으로 세운 담임목사입니다. 안디바는 타협을 하면 박해를 면하고,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 거절하였고,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증인으로 입을 열지 아니하고 신의를 지키는 충성된 신하의 모습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무엇이라 부르시나요? ‘충성된 증인’이라 부르십니다. 이 충성된 증인은 아무에게나 쓰이는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이 칭호는 예수님에게 쓰인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계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런데 이 충성된 증인의 칭호에 언제나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본문을 다시한번 봐주세요. 주님은 충성된 증인으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안디바는 2:13절의 말씀을 보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충성된 증인으로 믿음을 지키다 죽임을 당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충성에는 언제나 죽음과 대가가 따릅니다.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디바는 자신을 아끼지 아니하고 충성스럽게 자신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충성을 하다보면, 자신의 죽음(상처와 낙심)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을 부인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그때 여러분 피하지 마십시오. 충성을 경험할 때입니다. 자신의 깨어짐을 경험할 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생명을 경험할 때입니다.
적용 : 안디바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담임 목회자의 죽음은 교회 공동체의 큰 와해를 가져왔습니다. 영적 지도자의 부재는 방향과 힘을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 속 리더의 죽음은 와해보다는 생명의 풍성함을 가져왔습니다. 왜냐하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었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영적인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를 따라 안디바는 믿음을 지키며, 자신을 아낌없이 죽기까지 내어주었습니다. 그는 순교하며 희생하는 리더였습니다.
이처럼 리더/목회자의 자기 부인/ 자기 죽음에 부서와 교회의 생명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내어 놓지 못하는 목회자, 죽지 않는 공동체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버가모 교회의 교인들은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안디바처럼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도 자신을 포기하며, 자기 자신을 내어 놓는 일에 아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담임 목회자가 죽음에 이르러도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도들 자신도 환란 속에서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코칭 :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자기 자신을 내려놓으실 수 있으신가요? 여러분은 성도와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포기하고 내려놓으실 수 있으신가요? 우리 자신이 살아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은 현재 어떻게 주님을 따르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적대적이며, 고난의 상황 교회 공동체들을 어떻게 대하고 계신가요? 이 질문은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진리 가운데서 갈팡질팡하는 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질문 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대가를 지불할 믿음이 있으신가요?
3)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이 질문은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에게도 정말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도 또한 사람을 사랑하기보다 나를 주장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기하기보다 저를 위한 삶을 살아가는 죄인입니다. 날마다 반복되는 죄악 된 마음은 참된 주님의 증인인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저는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을 살펴보며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금 주님을 붙들었습니다.
이 충성된 증인은 안디바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한 것은 날마다 매일 주님의 이름을 붙잡은 것입니다. 이것이 한번만 잡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단어는 현재형으로 단어가 사용이 되어 반복적으로 매번, 매순간 주님의 이름을 붙잡았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붙잡았다는 단어는 사도요한을 체포했을 때 사용되었던 단어와 같습니다. 그리고 2:1절에 손에 주님께서 일곱별을 쥐고 계시는 단어와 같습니다. 끝까지 놓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듯이 그들도 주님을 붙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으로 우리를 책망할 것이 아닌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수 없이 넘어져도, 주님을 굳게 잡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기억하며 붙듭시다.
적용 : 여러분 우리의 삶에는 많은 환란과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건강의 문제, 가정의 문제, 회사와 사업의 문제가 있습니다. 한 순간도 우리를 가만히 놔주지 않습니다. 이제 좀 살만해졌나 싶으면 다시금 우리를 넘어트립니다. 성도로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 우리의 삶에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 라고 질문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너무나도 많고, 넘어진 세월이 너무나도 많아 자신에게 성도로서 자랑할 만한 것이 있는가? 주님 앞에 자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난의 극심함으로 무엇을 내어드리기도 힘듦이 실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과 굴곡 가운데서 없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모습을 충성되다 부르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자신의 말씀을 이루실 것입니다. “롬 8:28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증인의 능력은 큰 능력이 아니라 신실함과 충성됨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붙들고 사랑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도 “너희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배반하지 아니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붙드십세요.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세요.
4) 결론 및 적용 :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지 않는가?)
이 말씀을 전하며 현대의 우리는 심한 핍박을 받지 않고, 박해가 없는 이 시기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현재의 우리는 이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유효하며, 우리에게 의미가 있고 역사할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의 우리는 다른 의미에서 복음을 붙잡지 않을 때가 있고, 부끄러워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끄러워함은 우리의 믿음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않고, 믿지 않고, 증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믿음을 다른 의미로 부인하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에 대해-교회에 대해 세속적이며 적대적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지키며 살아갈 때 우리는 손해를 볼 때가 있습니다. 증인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직하고, 대가를 지불하며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을 속이는 것을 우리들은 많이 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부끄러워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속이면 돈을 더 벌고, 타협하면 명예와 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여러분은 정직하게 자신을 희생하며, 포기하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자신이 있으신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