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6수요] 게으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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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60[행군나팔소리에] / 356[주 예수 이름 소리 높여]
349[나는 예수 따라가는]
본문 잠 26:14-15
잠언 26:14–15 (NKRV)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서론 : 게으른 농부 이야기

옛날 옛적에 아주 게으르기로 소문난 농부가 있었다. 그 날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다른 사람들 다 일하러 밭에 나갔는데 혼자 텅 빈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나른한 오후 언제나처럼 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쿵" 소리가 들리는게 아닌가. 무슨 소린가 싶어 비몽사몽간에 게슴츠레 눈을 떴더니, 훤한 대낮에 간큰 도둑이 담을 넘고 있는 것이었다. “쿵" 소리는 이 도둑이 담을 넘다가 벽돌을 떨어뜨린 소리였다. 도둑을 보았음에도 이 게으른 농부는 다시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저 도둑놈, 담을 넘네? 마당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이상한 소리가 났다. 농부가 힘겹게 눈을 떴더니 아까 어설펐던 도둑이 이제는 마당을 살금살금 걸어오는 것이다. 하지만 농부는 다시 밀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이 도둑놈, 집안에는 안들어오겠지. 집안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도둑은 농부가 깊이 잠든 줄 알고 살금 살금 집안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여전히 농부는 잠에 취한 채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어? 저 도둑놈, 안방으로 들어가네? 뭘 가지고 나오기만 해봐라" 얼마 후 도둑은 안방에서 값나갈만한 물건들을 한보따리 챙기고 나와 대문으로 부지런히 걸어간다. 게으른 농부는 당당히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 도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전히 잠에서 깨지 못한 채로 잠꼬대처럼 중얼거린다. “어? 저 도둑놈, 한보따리 챙겨가네? 다시 오기만 해봐라...

게으름이란 무엇인가?

여러분, 이 이야기가 나와는 상관없는 제삼자의 이야기라서 웃을 수 있지만, 이것이 만약 내 자녀나 내 배우자의 이야기라면 어떠할까? 너무나도 답답할 것이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게으른 자가 이와 같다는 것이다. 막상 자신에게 해가 임하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자신이 매우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다. 귀찮기 때문에. 지금 이대로가 좋기 때문에. 뭔가 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뭔가 다른 것에 힘쓸만한 여력이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이 게으름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 게으름이 거듭난 신자라면 마땅히 경계하고 제거해야 할 대표적인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라. 게으름은 단지 천성적인 부분이 아니다. 게으름은 단지 성격일 뿐이라고, 한 사람의 성향일 뿐이라고 포장하지 말라. 게으름은 옛 사람의 부패한 성품으로 우리가 반드시 제거해야 하고, 끊어 내어야 할 죄악이다.

본문설명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라. ‘돌쩌귀'라는 단어가 참 생소하다. 각 가정의 대문 현관을 생각해보면, 대문이 여닫길수 있도록 대문의 가장 위와 아래에 뾰족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 이것을 대문 틀의 구멍에 끼워 맞춰야 대문이 고정된 채로 여닫긴다. 이를 오늘날 대문의 ‘힌지’ 라고 한다. 잠언 본문의 말씀은 게으른 자가 대문이 돌쩌귀를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그의 생활 반경이 침대 중심이라고 말한다. 뭔가 거의 움직임도 없고, 움직인다 하더라도 침대 주변만 맴돌 뿐이다. 내 집에 누가 손님이 찾아와도 침대 주변만 맴돌 뿐이고, 나에게 뭔가 손실이 일어나도 침대 주변만 맴돌 뿐이고, 원수가 찾아와도 침대 주변에서만 맴돌 뿐이다. 마치 서두에서 등장했던 게으른 농부처럼 말이다.
게으른 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자기 생활 주변에서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뭔가를 얻기 위해 자기 속의 무엇을 쏟아내는 일도 없고, 내가 가진 무언가를 소모해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목표도 없다. 그저 하루하루 반복되는 아무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24시간을 허락하신 이유인가? 이렇게 살아가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는 것인가? 그렇게 시간만 축내며 살아가라고 고귀하신 독생자의 피값으로 우리를 구속하셨는가? 과연 그렇게 시간만 낭비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이라 말할 수 있는가?
15절 말씀을 보라.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말씀한다. 본문에서 ‘괴로워하다’ 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의미는 ‘피곤해 하다, 힘들어하다’라는 의미이다. 분명 이 사람은 배가 고프다. 그래서 음식을 먹어야 하는 상태이다. 그렇게 음식을 차렸다. 이제 손을 펴서 그릇 위의 음식을 집었다. 그러나 거기서 그 음식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것 조차 피곤해 해서, 그 정도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도 귀찮아서 다른 누군가가 자기 입에 넣어주길 바라는 것이다. 마치 감 떨어질 때까지 나무 아래에서 입 벌리고 서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미련한 인생인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수단, 소위 은혜의 방편에는 3가지가 있다. 말씀과 기도와 성례이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이 3가지 수단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어떤 사람이 있다 치자. 이 사람이 새해가 되어서 결심을 했다. “올 한해는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는 한해가 되어야지!” 이렇게 결심하고 다짐을 했다면 그 은혜를 충만히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은혜의 방편들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설교도 열심히 듣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세례와 성찬에도 열심히 참여함으로 은혜를 받도록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말씀과 성례와 기도가 일어나는 자리, 예배에 참석 자체를 안하면서 은혜 충만한 한 해를 목표로 두었다면 과연 그 목표를 이룰 수 있겠는가?
여러분, 누구나 말도 안되는 꿈을 꾸며 잠시나마 행복해할 수 있다. 누구나 로또 1등 당첨되면 뭘 사고 어딜 여행하고 어떤 맛있는걸 먹고 하는 꿈을 꿀 수 있다. 허황된 꿈, 망상을 꾸는 데에는 값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데에는 반드시 그에 대한 값이 발생한다. 비용이 발생한다. 내가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해야 할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수험생이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시간을 공부에 소모해야 한다. 운동선수가 좋은 성적을 거두고자 한다면 자신의 시간을 훈련에 쏟아야 한다. 한창 김연아 선수가 피겨스케이팅으로 활약을 할 때 어떤 방송에서 그 선수의 발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가 빙상 위에서 펼쳤던 우아한 연기와는 다르게 그 발은 온통 굳은살 투성이의 소위 못생긴 발이다. 하지만 그 발을 못생기고 무가치한 발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 그녀는 갚진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발을 희생하였다. 영광의 자리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 값을 지불한 것이다.
게으른 자들은 허황되고도 맹목적인 꿈만 꾸기 때문에 정확히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계획이 없다.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상황이 주어지는대로 목표나 계획없이 살아갈 뿐이다. 혹 이런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목사님, 목사님은 교회 안에서만 계시니 잘, 모르죠. 사회생활 해봤어요? 내가 얼마나 분주하게 사는데, 얼마나 여유없이 쫓기듯 사는 것도 모르니 그런 소릴 하죠. 누군들 영적으로 부지런하고 싶어하지 않겠어요?” 저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었다. 출퇴근길, 소위 말하는 지옥철을 타며 회사를 출퇴근 했었고, 회사는 무역업 회사로서 당시 사업을 확장하면서 거래처도 대폭 늘어나던 때였으며, 부서는 해외영업부로 주말도 휴일도 없이 거래처를 만나고 영업을 하며 밀린 서류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거의 매일 야근으로 보냈던 적이 있다. 저는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그 시절 그 누구보다 바쁘게 살았다. 하지만 일상이 바쁘다는 핑계로 영은 메말라가던 때였다.
성도분들이 주중에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 잘 안다. 나도 경험해봤으니까. 다양한 환경과 상황에서 참 분주하게 살아가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또 다른 게으름이 있으니 그것은 ‘부지런함을 가장한 게으름'이다.

부지런함을 가장한 게으름

다시 14절 말씀을 보라. 돌쩌귀에 고정된 문짝은 쉬질 않는다. 은행 현관문을 생각해보라. 쉴세 없이 드나드는 손님들로 인해 문은 계속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한다. 또한 우리 교회 본당 문을 생각해보라. 예배때마다, 새벽기도회마다 얼마나 분주하게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는가? 엄청 바쁘게 산다. 그러나 변화가 없다. 성숙이 없다. 성장이 없다. 우리의 인생이 이처럼 쉴새 없이 바쁘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할찌라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부지런하다고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육적으로는 바쁘게 살아가는 것 같아도 영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사는게 바쁘게 산다는 핑계로 하나님 앞에서 영적 게으름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조금 더 말씀드린다면, 지금 이 자리에 나아온 분들 대부분은 주일낮예배, 저녁예배,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안빠지고 다 나오시는 분들일 것이다. 예배때마다 빠지지 않고, 기도때마다 그 누구보다 본인의 자리를 지키시는 분들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만약 그저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서 아무런 도전도 없고, 변화나 성숙도 없이, 그저 형식적인 스케줄에 따라 참여만 하는 것이라면 어떠한가. 숫한 예배의 자리에 참석은 하지만 내 영혼의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아니하고, 성숙하고 자라가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며, 더욱 거룩을 향한 성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떠한가? 열매맺지 못하는 나 자신을 향한 진지한 염려도 없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심도 없으며,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없는 것은 형식적인 종교생활이지 참된 신앙생활이 아님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그저 돌쩌귀를 따라 문이 도는 것처럼 일정한 상태가 계속 반복은 되지만, 더이상의 진전이 없다면 그저 삶에 끌려다니는 것 뿐이다. 뭔가 열심히 살긴 살았는데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 없다. 뭔가 정말 바쁘게 살았는데 마음에는 괴로움과 불안함 뿐이다. 남들 보기에는 미쳤다고 할 정도로 교회를 오갔는데, 정작 마음의 허전함이 채워지질 않는다. 시계추 처럼 왔다갔다는 했지만 정작 그 마음이 주님을 향하여 불타올랐던 적이 없고, 주님을 위하여 뭔가 내가 가진 것을 소모했던 적 조차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우리의 몸은 하나요, 주어진 시간도 모두에게 동일하다. 우리의 분주한 일정들 가운데에서도 영적으로, 육적으로 부지런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에게 무엇이 가장 가치있고,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재정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빠질 수 있는 유혹은 무엇인가? 상황이 좀 더 좋아지면, 뭔가 좀 여유가 생기면 부지런히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환경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환경은 영원히 우리의 편이 아니다. 오히려 환경은 우리가 이 땅에서 끊임없이 극복하고 싸워야 할 상대이다. 우리 인생을 무너뜨리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게으름임을 기억하라.
되풀이되는 고단한 삶을 살고 바쁘고 분주히 살지만 정말 그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지 면밀히 살펴보라. 뭔가 내가 하나님의 일들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매순간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사모하고 있는지, 나의 열매들을 살펴보며 나 자신을 점검하는 일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지, 더욱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모함들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지금 정신없이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 삶은 하나님 앞에서 부지런한 삶이 아니다. 너무 바쁘니 그렇게 못 사는 것이라고 핑계하지 말라. 일이 바쁘니 영혼을 위해 노력할 시간과 여유가 없다는 말 밖에 안된다. 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의지가 없다는 불순종의 표현이다.

은혜 한탕 주의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한 때 로또 열풍이 불었었다. 한 조사에 의하면 로또 1등 당첨될 확률이 800만분의 일이라고 한다. 이 확률은 1년간 연속으로 벼락 2번을 맞을 확률이라더라. 왜 사람들이 로또에 열광적인가? 허황된 꿈이라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다. 성실히 노력하며 매 순간마다 부지런히 사는 것이 귀찮기 때문이다. 차곡차곡 내가 열심히 내 열정과 노동력을 쏟아 부어 재산을 증식하기 싫증이 나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이나 주식 투자, 부동산투기와 같은 것들은 성실하게 노력하며 모으지 않아도 한 방에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내 열정과 노력과 시간을 희생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은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하루 하루 주어진 시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부지런히 성화의 단계를 걸어가기 보다, 뭔가 예상하지 못했던 큰 은혜가 주어져서 한 방에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해결되길 바라는 것이다. 날마다 거룩한 삶을 위한 자기 헌신과 희생 없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고자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은 없고, 그저 큰 은혜 한방 주어져서 모든 절차과 순서들을 생략하고 단번에 뛰어 오르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의 영적 게으름이 이러한 은혜 한탕 주의를 꿈꾸게 한다. 그러나 여러분, 이 또한 하나님 앞에서의 게으름이라는 죄임을 기억하라.

게으름의 싹을 자르라

우리는 지속적으로 나 자신을 살펴 게으름이라는 죄악을 잘라 내어야 한다. 게으름이라는 악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다양한 종류로 자신을 숨기고 포장하여 발견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지속적으로 마음을 살피지 않는다면, 그래서 게으름이라는 죄가 마음 속에 뿌리내리도록 만든다면, 이 악은 결국 우리를 쓰러뜨릴 것이다. 우리를 완전히 패망하게 만들 것이다.
옛날 왕을 죽이기 위한 방법으로 자객을 보내거나 쿠테타를 일으켜 왕을 직접 살해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보다 더 은밀하고 쉬운 일이 무엇인가? 음식의 독살이다. 조금씩 왕의 진미에 독을 타서 서서히 중독시켜 죽이는 일이다. 게으름이 이와 같다. 당장 뭔가 표가 나질 않는다. 그래서 다른 열심있는 성도들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서서히 우리를 병들게 한다. 서서히 우리를 말라가게 한다. 서서히 우리를 죽게 만들어서 결국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만든다.
여러분, 당연히 이 무서운 죄를 싹부터 잘라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애초부터 게으름이라는 죄가 우리 안에 파고들지 못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 하루하루 나의 성도로서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몸부림을 쳐야 하지 않겠는가? “내일부터 할게요, 다음주 부터 할게요. 내년부터 그렇게 할게요” 미루지 말라. “상황이 뭔가 잘 풀리면 그렇게 할께요, 좀더 준비되면 그렇게 할께요" 이러한 사탄의 상투적인 수법에 여러분 자신을 내어주지 말라. 게으름은 우리를 안일하고 이기적이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지 않도록 우리를 완악하게 만든다. 결국 영적 싸움에서 패배하게 만든다.
게으름은 날마다 우리를 유혹하여 “좀더 자자 좀더 쉬자”고 우리 마음 속에서 속삭인다. “네 일상을 돌아봐바. 영적 부지런함을 위해 노력할 시간이 어딨니?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벅찬데 성도로서 부지런하게 살 여유가 어딨니?” 라고 우리 마음을 미혹한다. 그러나 여러분, 게으름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찾아올 때마다 우리 주님을 생각하라.
주님은 짧은 생애 가운데 단 한번의 게으름도 피우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그리스도의 의무에 태만하셨던 적도 없고, 그 의무를 저버리셨던 적도 없다. 예수 그리스는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와 동일한 연약한 육신을 입으셨다. 그분 역시도 피곤해 하셨고, 배고파 하셨다. 그러나 마치 뒤가 없는 사람처럼 할 수 있는대로 이곳 저곳 다니시며 복음을 전파하셨고, 육신의 피로함에도 불구하고 병든 자들을 찾아다니시며 그들을 고쳐주셨다. 그분도 쉬고 싶으셨다. 그러나 단 한 순간도 그분은 게으르지 않으셨다. 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은 전도, 병고침, 축귀, 기도, 말씀전파 등 짦은 생애를 최선을 다해 사셨다.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자신의 모든 것들을 쏟아 내셨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물과 피를 다 쏟아내시기까지.

결론

말씀의 결론이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잡을 수도 없다. 우리의 몸은 하나 뿐이다. 주어진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상황과 환경이 바뀌기만을 기다렸다가는 우리의 젊은 날은 들의 꽃처럼, 풀들처럼 말라버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뭔가 하려면 너무 늦다.
우리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삶이, 주님의 뒤를 쫓는 제자의 삶이 결코 쉽다 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좁고 협착한 길로 따르는 것이며, 좁은 문을 통과하는 길이다. 당연히 우리가 부지런히 그분을 좇지 않는다면 언제든 게으름의 죄로 떨어져 나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게으름을 버리고 성실과 부지런함으로 살라. 내 삶이 단지 환경의 분주함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하여, 신자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열매맺는 삶을 위하여, 은혜받은 자 답게 살아내기 위하여, 주님을 따르는 제자된 삶을 위하여 살기로 결단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성실과 부지런함으로 결단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돌이켜보면 우리는 정말 셀 수 없는 많은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던 순간은 턱없이 짧다. 하나님께 받은 복은 너무나 많은데,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렸던 적은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돌봐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심이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 앞에 부지런했던 적이 언제였는지, 과연 있기는 했는지 기억도 안난다. 여러분, 게으름은 죄이다.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주어진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는 주님의 충성된 일꾼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씀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하자.
주님, 이 시간 나의 불충함과 게으름을 고백합니다.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음에도 여전히 내 인생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으로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내 몸도, 내 소유도, 내 삶도, 내 시간도 다 주의 것이온데 말만 그렇게 했지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하신 아들의 피를 희생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나는 주를 위하여 내 작고 사소한 것 조차 아까워하며 올려드리지 못했습니다. 주여, 말씀을 통해 다시금 결단하길 원합니다. 나의 몸과 마음, 시간과 소유, 모두 주님의 것이오니 주어진 모든 시간 속에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지 않길 원합니다.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어 내게 허락하신 모든 것들을 주를 위하여 희생하며 올려드리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 이시간 이러한 제목으로 간절하게 주여 외치며 기도하자.

기도

주님, 지난 날의 게으름의 죄를 회개합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다시금 주님의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주를 섬기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주어진 시간을 부지런히 사용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내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계속해서 코로나를 비롯하여 상황과 형편이 우리를 옥죄려 하지만, 주의 종들이 상황과 형편에 제한받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환경을 뛰어넘어 우리 주를 위하여 나 자신을 뜨겁게 불태우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아낌없이 올려드리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위하여 단 하루도 게을리 살지 않으셨던,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친히 자신의 모든 것들을 쏟아내셨던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우리의 모든 시간과 정성과 마음과 몸을 바치는 주의 종들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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