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개정 증보 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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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도신경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2. 찬송가 : 95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3. 합심기도

위드 코로나를 위해 기도합시다.
나라를 위해 기도합시다.
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선교지 교회와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오늘 예배를 위해 기도합시다.

4. 성경봉독

John 1:1 NKRV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5. 설교

본론

요 1:1창 1:1 의 연결

오늘 본문은 ‘태초에'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마치 요한복음을 듣고 읽는 청자로 하여금 어떤 사건을 기억하게 하면서, 그 사건을 통해서 오늘 본문을 이해하도록 연결짓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태초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본문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저는 지금까지 성경을 1독해야 겠다라고 마음 먹었을 때 가장 먼저 시작하게 되는 창세기 1:1 이 떠오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구절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지금 ‘태초에'라는 단어를 통해서 창세기 1:1 의 본문을 떠올리도록 하고, 그 본문을 통해서 오늘 본문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우리에게 말해주는 듯, 의도적으로 ‘태초에'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구절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왜 요한은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와 듣는 청자에게 창세기 1:1 을 의도적으로 떠올리도록 했을까요?
그것은 ‘태초에'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 때문입니다.

본문 주해

1. 태초에(Ἐν ἀρχῇ)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태초에'라는 단어를 원문에서 살펴보면, Ἐν ἀρχῇ라는 전치사와 명사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사전적 의미 : Ἐν ἀρχῇ
이 Ἐν ἀρχῇ 라는 단어의 의미는 ‘~안에’, 혹은 ‘~의’ 라는 소유를 나타내는 전치사와 ‘시작’, ‘근원’, ‘처음'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가 합쳐진 말로, 시작 안에, 처음 안에, 근원 안에 혹은 시작의, 처음의, 근원의 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이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작’, ‘처음', ‘근원' 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 세 단어는 하나의 동일한 의미 그러니까 하나의 동일한 현상을 표현해 내는 단어인데, 이 ‘시작'과 ‘처음', 그리고 ‘근원'이라는 단어는 “무엇인가가 변화되기 시작하려는 그 찰나”를 의미하는 점에서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있던 정적인 상황에서 무엇인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변화되기 시작하는 그 찰나의 순간, 아무것도 없던 상황에서 무엇인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시작' 혹은 ‘처음'이라 하고, ‘근원'이라 말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달리기 시합에 참가했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출발선에 서서 ‘시작'이라는 신호가 떨어지기 전까지 우리는 달리기 위한 준비 자세를 취한 채 숨을 죽이고 기다리면서 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작'이라는 신호가 떨어짐과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다리와 팔을 움직여서 땅을 박차고 나가며 우리는 동적인 자세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태초에 라는 말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그 첫 순간의 찰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단어적 의미: 창세기 에서의 의미
그렇다면, 요한에게 있어서 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그 찰나의 순간, 그러니까 태초에 라는 말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요한이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사용한 이 ‘태초에'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창세기 1:2-2:1 까지의 내용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1:2-2:1 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1:2 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Genesis 1:2 NKRV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창세기 1:2은 아무것도 없었던 상태에 대해서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라고 묘사하며 설명해 줍니다.
그런데 창 1:3-2:1 에 이르러서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그 말씀을 시작으로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던 땅은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빛이 생기고, 빛은 낮으로, 어둠은 밤으로 나뉘고,
물 가운데 궁창이 생겨 물과 물이 나뉘어 궁창은 하늘이 되었으며,
궁창 아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바다가 되고, 드러난 뭍은 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드러난 땅에는 각양 각색의 풀과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로 채워졌고,
하늘에는 광명체들이 생겨서 낮과 밤을 나누고,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며, 해를 통해서 낮을, 별을 통해서 밤을 관장하며 빛을 비추게 되었습니다.
하늘에는 각종 새들이, 바다에는 바다 짐승들과 각종 물고기들 및 바다 식물들이 가득이 채워졌고,
땅에는 살아 움직이는 각양 각색의 가축과 짐승들이 가득히 채워졌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창조되어 하나님의 뜻을 대신 이루는 대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셨을 때, 심히 좋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창세기 1:2-2:1 까지의 본문을 살펴 볼 때 발견되어지는 의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그 찰나의 순간인 태초에 라는 말의 의미는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던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지금 우리가 바라보며, 놀라움과 감탄을 자아내도록 하는 이 자연만물의 시작점 그 찰나의 순간이 혼돈과 공허,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라는 이 부정적이고 어두운 이미지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순간,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그 순간 보기에 매우 좋은 상태로 뒤짚어 지는 그 순간이 바로 태초에 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던 어떠한 움직임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던 그 정적인 상황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흑암이 깨어지고, 혼돈하고 공허했던 땅이 동물과 식물을 비롯한 하나님의 작품들로 가득 채워진 동적인 상황으로 바뀌는 그 순간이 바로 ‘태초에’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다라는 것입니다.
3) 용례적 의미: 마가복음 1:1, 12-13 에서의 의미
다음으로 우리는 ‘태초에’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떠올려야 하는 이미지는 바로 마가복음을 통해서 드러나고, 이해되어져야 할 이미지입니다.
마가복음 1:1 을 원문에서 보면,
막 1:1 “시작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의”
이라고 기록하며, 요 1:1 에서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과 같이 ‘시작’이라는 단어를 먼저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가도 지금 이 ‘시작'이라는 단어인 ἀρχὴ라는 명사를 제일 앞에 두면서 요 1:1 에서 요한이 그랬던 것과 같이 비슷한 의도를 가지고 ‘태초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가복음의 서론 그러니까 마가복음 1:1-13 의 마지막에 위치한 마가복음 1:12-13 을 통해서 우리는 요한이 의도했던 ‘태초에’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2-13 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Mark 1:12–13 NKRV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어떤 의미가 보이십니까?
마가는 지금 창 1:2-2:1을 통해서 드러나는 ‘태초에'라는 말의 의미를,
“혼돈하고 공어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던 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됨으로 인하여 흑암은 깨어지고, 혼돈하고 공허했던 땅에 동물과 식물, 사람을 비롯한 하나님의 작품들로 가득 채워지는 그 변화가 시작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지금 마가복음 1:12-13에서 ‘광야’, ‘들짐승’, ‘천사들이 수종든다’라는 이 세가지의 단어와 문장을 통해서 아주 짧지만 굵게, 그리고 강력하게 재 진술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게 광야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싫어 하는 것을 넘어 우리는 광야와 같은 곳을 지나는 것이 굉장히 힘들고 버거운 일입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들짐승들을 만나는 것과 같은 상황 또한 싫어합니다.
러시아와 같이 집에서 밥을 먹고 있는 갑자기 문이 쿵하고 넘어지면서 곰이 불쑥 들어오는 것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야말로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기 바쁠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있어서 광야와 들짐승이란, 거부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너무나도 많은 이미지를 가진 말로서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거부할 수 밖에 없는 요소가 가득한 광야와 들짐승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어떤 이미지로 바뀌냐면, 바로 “천사들이 수종드는” 이미지로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마4:11 을 보면, 조금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요.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라고 기록하면서 마가복음 1:12-13 에 기록되어 있는 ‘광야'와 ‘들짐승'의 이미지를 사탄과 연결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4:11 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40일간 사탄에게서 시험을 받으시고 그 시험에서 승리하시면서 사탄의 손에 놓여 얽매여 부정적이고 두려움을 주는 광야와 들짐승이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서 예수님의 것으로, 예수님의 소유로 바뀌게 되면서 천사가 수종드는 모습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마치 창세기 1:2-2:1 에서 드러나고 있는 ‘변화가 시작되는 그 찰나의 순간’이 지금 마가복음 1:12-13 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사야 11:1-9 에 의해서도 확증됩니다.
Isaiah 11:1–9 NKRV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1-9 은 이 땅에 왕으로 오실 예수님을 암시하는 본문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나게 될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신 예수님 그런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그 때, 이사야 11:6-9 의 기록이 성취된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마가복음 1:12-13 에 나타나는 이미지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광야와 들짐승과 함께 하실 때, 다시 광야와 들짐승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 순간 그곳은 천사들이 수종드는 곳으로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곳에 임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던 땅이 하나님의 그 말씀으로 인하여 채워지고 빛이 비추이며 모든 것이 만들어지고 채워져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곳으로 변했던 것처럼 지금 광야와 들짐승이 가득한 그 부정적인 이미지가 예수님에 의해,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천사들이 수종드는 천국으로 바뀌는 그 시점 그것이 바로 “태초의"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이다 라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요한복음을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하며 마치 그 놀라운 역사가 이제 요한복음을 읽기 시작하려는 너에게 시작되었고, 시작되며, 시작될 것이라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2. ‘그는 ~이다/~있다’ (ἦν = εἰμί 미완,능,직,3,단)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는 ‘(말씀이) 계시니라’, ‘(함께) 계셨으니', ‘(하나님) 이시니라’라는 하나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동사를 원문에서 살펴보면, εἰμί라는 동사로, 과거에 있었던 한 사건이 종료되지 않고, 완료되지 않은 상태 그러니까 과거의 사건이 끝나지 않은 상태로 과거에서 미래까지 계속 지속될 것을 나타내는 미완료 형태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말은 말씀이 과거에서부터 미래에까지 계속 존재하실 것이라는 의미이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말은 그 말씀이 과거에서부터 미래에까지 하나님과 함께 계실 것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 또한, 그 말씀이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 과거에서부터 미래에까지 동일한 존재로 계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왜? 미완료의 형태를 쓰고 있을까요?
굳이 미완료의 형태를 쓰지 않고 그냥 “말씀이 계셨었다.,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었다.,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셨다"라는 과거형 혹은 완료형, 조금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현재형으로 써도 될 것 같은데, 왜 요한은 미완료 형태 그러니까 끝나지 않는 상황, 마치 불변의 법칙을 다루듯 영원한 상태를 설명하는 미완료 시제를 쓰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 우리가 다루었던 그 창조의 순간을 통해서 아무것도 없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어둠만이 짙게 깔린 그 상태에서 동물과 식물, 사람을 비롯한 모든 자연만물을 만들어 가득 채우셨던 그 존재, 바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우리의 머리로 가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1) 사람의 존재: 제한적 존재
우리에게 영원함이란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고, 추구하며, 가장 행복을 줄 수 있는 요소라 인정받는 사랑 또한 변해버립니다.
내가 꿈꾸고 이루려고 했던 것들도 바뀌고, 심지어 가장 중요한 모든 것의 기준으로서, 척도로서 빠질 수 없는 나 자신 조차 갈대와 같이 흔들리며, 변한다는 것입니다.
즉,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한 속에 있는 우리는 환경에 따라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아 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내가 사랑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하는 ‘이별'이라는 것을 늘 옆에 달고 살아가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는 모든 것이 나를 떠나 버릴 수도 있다는 그 불안정한 상태로 인하여 사람들은 늘 불안함이라는 감정과 함께 벗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미완료 형태의 동사를 사용함으로 우리와는 달리 시간과 공간 밖에 존재하시는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우리로 가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과거에서부터 미래에 까지 말씀과 함께 계시고, 그 말씀이 곧 과거에서부터 미래에까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는 그 불변성을 미완료 동사를 통해서 드러내면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과 늘 변하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모습과 대조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살폈던 것처럼 ‘태초에'라는 말에 가장 걸맞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고, 모든 것의 시작이 되실 수 있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우리로 확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존재하시며, 말씀과 함께 계시는 곧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존재: 영원한 존재
그렇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와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시작하실만한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요한은 ‘태초에' 라는 말 뒤에 ‘말씀에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라고 말하며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없던 것에서 모든 것이 생기는 그 시작점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우리로 하여금 가늠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태와의 비교를 통해서 말이죠.
우리는 무인도와 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을 피우고, 사냥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며, 음식을 만들어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생각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놀라운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라며 감탄을 자아내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아무것도 없던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상태에서 말씀하심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창조해 내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경이로운 사건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바로, 창 1:2-3f 에서 기록된 것처럼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있었던,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었던 그 시절에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신 그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가?하는 것이고,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존재하셨다는 그 사실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도 계실 그 하나님, ‘태초에'라는 말의 원인이자 동기였던 그 하나님의 능력을 어리석고 무지한 우리에게 나타내기 위해서 요한은 미완료 형태의 동사를 사용했다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요한은 지금 미완료 형태를 사용하면서 너희들이 보고 있는, 이 땅 가운데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우리의 존재를 결정하실 그 기준이심을,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누리고 살아가야 할 이유이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이라 선언한고 있는 것입니다.
노예가 되어서,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가는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박탈당했다라고 좌절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희를 회복하실 하나님,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시는 그 능력의 하나님께서 지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니 그 하나님을 믿어라 라고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을 눈으로 목격하고 확신 가운데 믿음 위에 우뚝 서라!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삶에 공허 함이 있고, 내 삶에 혼돈이 있으며, 내 삶에 흑암이 짙게 깔린 것과 같은 상황이 놓여 있다면 우리는 이것에서부터 빛을 만드시고, 모든 세상만물을 만드셨던 그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시작되어지는 그 변화의 찰나의 순간을 기대하고 바라며, 갈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모순과 논리 사이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은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하며 모순적인 두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함께'와 ‘이다' 입니다.
이 두 단어는 함께 쓰일 수 없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A가 B와 함께 있는데, A는 B이다 라는 문장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이야기 하면, 지금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있는데, 저는 여러분들입니다 라는 말, 말장난이나 하는 듯한 그런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A와 B가 함께 있으면 함께 있는 것이지, 어떻게 함께 있는 A와 B가 같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마치 의도적으로 모순적인 두 단어를 하나의 문장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을 원문에서 보았을 때, ‘그 말씀이 그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라는 문장과 ‘그 말씀 그는 하나님이었다’라는 문장이 개역개정에서는 ‘~셨으니’라고 번역되고 있는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모순 되는 두 문장을 ‘~과’라는 의미로 번역되는 ‘그리고'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두개의 문장을 하나의 동등한 의미를 가지는 문장으로 묶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 둘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과 기름처럼 썩일 수 없는 이 모순 되는 두 단어를, 이 모순되는 두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 두 문장을 요한은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통해 묶으면서 이 둘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존재를 가리키는 설명 마치, 기쁨과 슬픔이 하나이고, 좋고 나쁨이 하나이며, 장점이 곧 단점이고, 단점이 곧 장점이라는 말과 같이 말이죠. 그러면서 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요소를 발견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즉, 우리와 같이 시간과 공간 속에 살아간다는 것은 곧 우리가 떨어져 있으면서 동일하게 함께 있다라는 것과 같은 모순이 적용 될 수 없는 상태라면, 지금 하나님께서는 모순되는 두 단어를 하나의 문장으로 묶으면서 우리와 같이 시간과 공간 속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달리 시간과 공간 밖에 계시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떨어져 있으나 동일하게 함께 있다라는 것이 가능함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입니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가 아니다. 성부도 하나님이시요. 성자도 하나님이시며, 성령도 하나님이시다라는 이 신학적 진술,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지금 요한복음 1:1 에 담겨 있고 이를 읽는 우리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한은 요한복음 1:1 을 시작하며 태초에라고 기록하면서 이 말을 읽고 듣는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 1장과 2장의 그 창조 사역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요한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그 하나님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우리로 보고 인식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 위대하신 하나님과 연약한 우리의 모습,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시는 하나님과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우리의 모습, 빛이신 하나님과 어둠에 놓여 있는 우리의 모습을 비교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머리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뚜렷하게 이해되지 않는 이 모순적인 요소를 통해 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 1:2-2:1 에 기록되어져 있는 그 대변혁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대변혁의 사건이 될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으로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에게서 삶의 존재 이유를 찾으려하고, 자신에게서 모든 것의 기준을 찾으려하는 사람의 습성을 요한은 버려라라고 말한다는 것이죠. 자신들이 지키고 싶어 했던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린 그들에게 요한은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이킬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변혁이 필요한 우리의 삶에 대변혁을 일으키실 수 있는 그 하나님을 보게 하고, 그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대변혁,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우리의 마음에, 광야와 같은 우리의 인생, 들짐승들이 득실 득실거리며 곤핍함만이 가득한 우리의 인생을 천국으로 바꾸시며 우리의 존재를 가득 채우시는 그 하나님의 변화의 찰나의 그 순간을 바라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1 은 복음의 총체를 다루는 복음서로서 그야말로 가장 훌륭한 서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 속에 품고 누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살아가는 자들로 우리의 인생이 변화되기 시작했던 그 찰나의 순간을, 그 변화의 시작을 가능케 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복음을 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요한복음을 통해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던 그 창조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깨어지고 무너진 이 땅을 천국으로 재창조하셨던 그 대변혁의 사건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던 삶에서 천사들이 수종드는 그 천국의 삶으로 변화되어 재창조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던 광야와 들짐승들의 모습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천사들이 수종드는 곳, 천국을 소유한 자들로서 재창조되었습니다.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우리의 마음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채움받고, 새롭게 재창조되며, 변하지 않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렇게 바꾸신 것은, 아무 쓸모 없는 우리를 재창조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모습과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 깨어지고 무너졌던 모든 것들을 회복시키시는 그 하나님의 대변혁의 사건을 드러내시겠다는 그 크고 놀라운 뜻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옥에서 천국으로의 대변혁의 사건을 경험한 우리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며,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어찌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이사야가 말했던 그 천국의 모습을, 마가가 말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하여 모든 것들이 회복되어지고 변화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상상하고 바라 볼 수 있겠습니까? 어찌 모든 것이 회복되어서 더이상 해됨도 없고, 슬픔도 없으며, 아픔도 없는 그 천국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의 총체를 소유하신 여러분들, 예수님을 만난 자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들,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여 줄 때에야 비로서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통해 이 세상 가운데 대변혁을 일으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의 삶 하나 하나를 통해 그 대변혁의 기적이 흘러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깨어진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며 우리에게 주신 그 믿음의 소망을 따라 이 땅 가운데 회복을 선포하시며, 이 땅 가운데 소망을 노래하시는 귀한 복음의 총체의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6. 찬송가: 455장 주님의 마음을 본 받는자

7. 교회소식

8.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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