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절정을 앞둔 예수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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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은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말이 쉬워서 그렇지, 교도소에 몇 달 혹은 몇 년씩 갇혀 징역, 곧 원하지 않는 노동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암담한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죄를 짓지 않고서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하루 빨리 석방되기를 원할 겁니다. 그리고 국가는 그런 사람에게 그 시간의 값어치를 매겨 보상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삶의 기회가 생기는 것이죠.
자, 이제 상상해 봅시다. 여러분이 만약에 억울한 일로 교도소에 갇혔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마도 어려분은 밤낮으로 고대하고 열망하는 것이 있다면 하루 빨리 석방되어 출감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도관으로부터 석방선언을 듣고, 출감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관물을 챙겨 이제 교도소 쭉문을 통해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때 어려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당하게 걸어 나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저 문이 왜 열렸지 하고 우두커니 서 계시겠습니까? 아마도 우두커니 서 있기로 선택하셨다면 이것은 매우 멍청한 선택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선택을 한 사람이 두 사람이나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선교 여행을 하던 중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어떤 남자가 귀신들린 소녀 이용해 점을 치면서 많은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지만, 여러 날 동안 자주 그 길을 왕래하면서 귀신들린 소녀가 불쌍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해 그 소녀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냅니다. 그 결과 소녀는 정신이 돌아왔지만, 소녀를 이용해 돈을 벌던 이 남자는 졸지에 돈줄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이 남자는 바울을 고소했고, 민심과 풍속을 해치는 범죄자로 모함합니다. 당시 빌립보 사법부는 일방적인 남자의 말만 듣고 정식 재판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옷을 벗겨 매질을 한 뒤에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심지어 바울은 재판을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로마의 시민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날 밤 좁은 감옥 한 귀퉁이에 처량하게 갇힌 바울을 상상해 보세요. 심지어 그는 법을 어긴 적도 없습니다. 뭔가 했다면 선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입니다. 바울은 얼마나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까요?
다시 그날 밤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찬양을 부를 때였습니다. 갑자기 땅이 흔들리며 옥문이 열리더니, 두발에 채워진 차꼬가 풀리고, 감옥이 흔들리더니 문을 열렸습니다. 순식간에 자유의 몸이 되었고, 그 앞에는 자유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 때 바울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아! 자유다! 하나님이 나의 어려움을 아셨다. 모함과 감옥으로부터 나를 건지셨다.’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자유의 몸이 되었음에도 그대로 감방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바울이 선을 행하고도 감옥에 갖혔다면, 하나님은 그 감옥에서 무엇을 뜻한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매사에 자기 유익이나 자기 중심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지 기대하는 마음이 지금 그 감옥에서도 발휘되었을지 모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단순히 바울을 감옥에서 끄집어 내 주시기 위해 지진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친히 펼치시는 구원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큰 흔들림을 일으키신 겁니다. 한밤 중 곤히 잠들었던 간수는 갑자기 땅이 요동침을 느끼며 잠에서 깼습니다. 그는 눈 앞에 펼치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옥문은 죄다 열려 있고, 칠흑 같은 어둠만 밖에 내려 있었습니다. 죄수들의 탈옥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광경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체없이 칼을 빼들어 가슴팍에 대고 쓰러지려고 자세를 잡았습니다. 죄수의 탈옥을 막지 못한 간수는 어김없이 심문과 고문, 그리고 사형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자신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여러 모로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때 큰 목수리가 간수의 귓전에 들립니다.
“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 있으니 멈추시오.”
바울이었습니다. 그 목소리에 간수는 더욱 놀랐습니다. 옥문이 활짝 열렸음에도 죄수들이 도망치지 않고 그대로 감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바울 앞에 엎드립니다. 옥문이 열렸음에도 죄수들이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은 간수 자신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던 까닭 때문입니다. 그의 입장에선 어떠한 신도 어떠한 영웅도 하지 못한 일을 바울이 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바울이 말합니다.
“주 예수를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신뢰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당신 뿐만 아니라 당신의 가족들까지도 구원을 받을 것이오.”
간수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영접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에게 속한 모든 식구들과 더불어 침례를 받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생명이 되었음을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날 밤 감옥 속에서 바울이 경험했을 하나님의 영광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날 낮에 바울이 귀신들린 소녀를 고쳐주지 않았더라면, 모함과 함께 정식 재판도 없이 감옥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그날 밤 찬양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밤 땅이 흔들려 옥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 앞에서 구원의 감격을 경험한 간수와 가족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크나큰 영광이 무엇인지를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한 가지 진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힘과 능력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바울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그가 그날 밤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은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더라면, 옥문이 열렸을 때 무고하게 투옥되었음만 생각하고 뛰쳐 나갔더라면, 그 소녀를 고용했던 그 남자가 엉뚱하게 바울을 모함하여 고발하지 않았더라면,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밝히고 재판을 정식으로 요청했다면, 단 하나의 사건만 어긋났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구원의 대 역사였습니다.
그날 밤 모두 잠든 고요함 속에 지구 한 귀퉁이에서 바울이 그처럼 놀랍도록 체험했던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바울의 지극한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렇습니다. 좁은 감옥 인간에게 드넓은 지구 한 귀퉁이에서 아버지와 하나 되신 예수님, 그 예수님과 사랑으로 합일된 바울의 이타적인 사랑이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이미 영광받으심을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서 10절을 살펴보시겠습니다.
John 17:9–10 NKRV
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여기서 그들은 제자들을 일컫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눈 앞에 두신 그 순간에 제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중요한 기도 중에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노라고 기도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제자들을 통해 영광 받았습니까? 주님의 영광은 앞서 언급한 바울의 경험처럼 사랑을 발휘할 때 일어납니다. 요한복음은 이 부분을 강조합니다. 즉 아버지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제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발휘할 때, 그들로 아버지는 영광 받으십니다. 또한 아버지와 합일을 이루어 그분의 것을 그분의 뜻에 맞춰 쓰시는 예수님 역시 이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자 그러면 제자들은 진정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되었습니까? 참으로 주님께서는 이 기도를 드리는 그때 제자들로 인해 이미 영광을 받으셨습니까? 이 말씀이 정말 사실 그대로 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주님의 말씀과 정 반대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을,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예수님과 함께 했던 자들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제자들 때문에 영광받으셨다고 기도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1 Corinthians 13:4–7 NKRV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의 행동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영광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앞서 보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편지인 고린도 전서에는 사랑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냅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곧 그분은 제자들이 지금 당장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순간을 바라고 믿으셨습니다. 풀이하면 하나님은 제자들을 바라보실 때 그들의 가능성을 바라보셨습니다.
한 예를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나다나엘을 기억하십니까? 빌립이 데려온 그의 친구는 냉철하며, 상황을 대중의 눈이 아닌 통찰의 눈으로 꿰뚫어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능만큼 그의 삶은 밝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John 1:46 NKRV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그는 냉소적이라는, 혹은 차갑고 대하기 어렵다는 피드백을 이야기를 듣습니다. 빌립과 같은 친구는 소수일 뿐 어쩌면 그는 외툴이였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그를 처음 보실 때 주님께서는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John 1:47 NKRV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바울 역시 하나님을 사랑했고,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이들의 사랑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그 사랑의 본질은 바라고 믿고 참아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란 이웃의 가능성을 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에 어떤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믿고 그 영광을 미리 보는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쉬운 일 아닙니다. 참으로 성숙한 믿음과 인격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됩니다.

John 17:6 NCTB
6 “나는 아버지께서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뽑아 내게 맡겨주신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분명히 알려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이었지만 내게 맡겨주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과연 아버지의 말씀을 잘 지키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루는 것, 곧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먼저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작용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뽑아 예수께 맡기워진 자들이 바로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사랑의 원류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말씀으로 드러난 하나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앙훈련은 무엇입니까? 신앙의 성숙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무엇보다 오늘처럼 우리가 예배드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과 사랑에 반응하여 그분의 영광 속에 거하기 위해서입니다.
John 17:21 NKRV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마음과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과 합일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런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새로운 존재 속으로 들어가라는 부름입니다. 이 새로운 삶을 통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를 체험하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어떤 선전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영광 안에 있어야 합니다. 곧 아버지와 예수께서 일치를 이루셨던 것처럼, 나와 하나님 사이에 마음의 일치가 일어나야 합니다. 바로 그곳, 합일이 일어나는 그곳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John 10:9 NKRV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John 14:6 NKRV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John 11:25 NKRV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한은 주님의 십지가가 끝이 아니라 말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 궁극적으로 계시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장 영광스럽게 되는 수간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통해 그 안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닿도록 만들어주신 그분의 생명, 한계 없는 사랑의 길로 처청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향상된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예수님을 따르게 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받을 곳에 있게 달라는 말로 이어집니다.
John 17:15 NKRV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이곳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곳, 다시 용기를 갖게 마드는 어떤 장소로 가게 해달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생명이 예쑤를 통해서 사람들 안에서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삶을 떠나 급하게 하늘로 가거나,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17절은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해줍니다.
John 17:17 NKRV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진리, 헬라어로 알레테이아. 레테. 아마도 그리스-로마 신화를 아시는 분은 레테의 강을 떠오리실 겁니다. 망각의 강 혹은 여신의 이름입니다. 사람이 죽어 저승으로 갈때, 건너야 하는 다섯 개의 강 중에 생의 모든 기억을 잊게 만든다는 설정입니다. 그런데 그 레테 앞에 부정의 의미를 뜻하는 알파가 붙습니다. 곧 잊혀지고 사라짐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냄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의 말씀은 예수님, 그리고 그분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나 하나가 되어 잊혀지고 사라지지 않게 합니다. 진리로 거룩해진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과 관점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곧 요한복음의 본질이자 바울이 보여주었던 역사처럼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통해 생명의 본질을 발견합니다.
재물이 많아지면 콘크리트 담이 높아지고 권력이 세지만 인간 장벽이 두터워지지만, 하나님과의 합일의 경험 곧 그분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경험하면 경험할 수록 경계는 낮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칼 야스퍼스의 ‘인간 존재는 인간 되어감’ 말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이미 드러낼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의 사랑, 그분의 마음과 합일을 이루어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존재로 나아가기를 우리 주님이 기도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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