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발에 신을 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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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행7:33-34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1. 개요
1. 개요
이번 시간에는 성경 속 인물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지 짧은 본문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2. 창세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 토부
2. 창세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 토부
우리가 믿는 바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 땅을 택하시고, 그 곳에 사람을 두어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응하며 살도록 합니다. 이것을 두고 성경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טוֹב) “토브”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484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토브는 “좋다” 이외에. “선하다”. “아름답다”. 등 긍정적 의미로 사용 됩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이 당신의 당신의 선하고 아름다움을 드려내는 모습을 드려내는 것을 보면서 이 “토부”라는 단어를 무려 6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고, 심지어 6째날모든 창조세계를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감탄하고 계십니다.
3. 첫 사람 아담의 죄악
3. 첫 사람 아담의 죄악
하지만 첫 사람 아담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모든 창조 세계는 그 질서를 상실하고 이내 토부라는 단어는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의 씨앗은 점점 잉태되어 온 땅을 뒤덮게 됩니다. 이것을 성경은 그들이 육신이 되었다고 창6:3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사람은 원래 성경에 “생령 (נֶ֫פֶשׁ ) “네패쉬””이라 기록외어있는데 보통 영혼이 있는 생명,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육신(בָּשָׂר) “바사르”, 즉 고기덩어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4. 회복의 시작, 그 여정 가운데 모세
4. 회복의 시작, 그 여정 가운데 모세
하나님의 선은 없고 자신의 탐욕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이로 인해 피조 세계가 고통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회복의 역사를 다시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뢰, 믿음을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그 여정 가운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모세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물에서 끌어낸 자”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할 계획을 가지십니다.
성경 히브리서 내용을 보면 모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24–26 (NKRV)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모세라는 인물의 위대한 결과가 아니라, 모세가 한 민족의 지도자로 세워질 때까지의 하나님의 일하심과 아파하고 애쓰시는 마음을 살피고자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애굽 바로 공주의의 양자로 자라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미디안 땅으로 도망하게 됩니다. 그때 나이가 40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모세의 행동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7:22–25 (NKRV)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24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는 엘리트 중에 엘리트 였습니다. 이쯤 됐으면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고 구원한 모든 조건이 충족된 상태였다고 스스로 자부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원수를 갚고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애굽의 차기 왕이 될 사람이라 생각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살인 사건을 통하여 모세의 불순한 생각을 바로 왕이 알아차렸고, 이로 인해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주하게 됩니다.
25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모세 자신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 하나님의 일하심의 계획을,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열심과 능력으로 구원의 길을 열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한 사람의 입을 비려 말 합니다. 27절 후반 부에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그렇습니다. 누가 모세를 재판장으로 세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 입니까? 바로 왕 입니까? 모세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재판하고 구원할 수 있다고 미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열심인 것입니다.
바울도 자신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려내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재판하였으며, 교회의 씨를 말려 버리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5. 하나님의 방법
5. 하나님의 방법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지도 않으시고, 그렇게 세우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자신의 능으로, 자신의 열심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그 고집을 빼는데 모세는 40년이 걸렸습니다. 40년 동안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아온 것입니다. 힘을 빼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그 세월 동안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 해 보셨습니까? 그 움켜진 손을 펴는데 하나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그래서 모세 나이 80에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1–2 (NKRV)
3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여기에서 중요한 구절은 2절 후반 부에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리지지 아니하는지라”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수많은 이적중에 왜 모세에게 이런 이적이 나타난 걸까요? 바로 모세에게 원하는 모습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요? 모세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 떨기나무가 타지도 않으면서 불이 붙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 아닐까요?
6. 거룩의 선포
6. 거룩의 선포
이것이 거룩이지요. 하나님의 열심을 드려내는 것. 그러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7:33 (NKRV)
33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모세가 지금 서 있는 곳. 우리가 서 있는 곳. 이 곳 모두는 거룩한 땅입니다. 하나님의 땅이요. 하나님의 열심이 일하는 곳입니다. 여기에 재판장으로써 나는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판단의 주체로 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종은 신을 신지 않지요. 종이 주인 행세하는 것이 첫 아담의 실수요. 지금것 우리의 실수 아닙니까?
간절하게 바랍니다. 우리모두 신을 벗읍시다. 이 땅은 거룩한 땅. 하나님의 땅 입니다. 더 이상 주인 행세는 버려두고, 종으로써 하나님의 열심을 드려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엇으로 세웠을까요? 모세를 무엇으로 세웠을까요?
사도행전 7:35 (NKRV)
35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하나님은 모세를 관리와 속량하는자로 보내셨다고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때 본래의 우리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 생령의 모습입니다.
왜 제가 서두에 창세기부터 말씀드렸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원래의 모습으로 이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해 나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본래의 보습을 알아야 할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온 피조세계를 하나님 말씀으로 잘 다시스고 모든 허물을 속량하는 것이 우리의 본 모습입니다.
우리는 재판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속량자 입니다. 부디 재판장의 눈으로 이웃을 세상을 바라보지 마시고, 속량자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하나님의 열심을 드려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거룩한 땅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