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기를 다투는 자
금요 예수승리 집회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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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views예수 승리가 나의 승리임을 확신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승리해 나가야 한다. 계속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기기를 다툰다.
Notes
Transcript
이기기를 다투는 자
이기기를 다투는 자
잊지 마시라.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다. 예수님이 모든 성도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한 몸이다.
실제로 우리 성도들과 한 몸이 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은혜와 자비의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과 한 몸이다.
하나님이 부어 주신 모든 은혜는 그리스도 때문이다. 하나님이 맹세하셨다. 우리와 하나된 그리스도에게서 자비를 거두지 않으시겠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아가셔서,
“주여 제게는 자비가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내 안에 있는 자들을 위해 제게 모든 자비를 주셨습니다. 주여, 그 자비를 저들에게 채워 주십시오.” 탄원하십니다.
칼빈은 “은혜 언약에 의지하라.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
여덟째, 이런 불명확한 약속에 입각해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는 것은 명백한 투정이다. 이런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벗어던지면 믿겠다는 자들 속에 있는 그런 강퍅한 기질이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도 있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 따라서 자신들의 구원도 개별적으로 염두에 두셨다는 포괄적 약속으로 인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확신을 주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 말자. 모든 사람이 앉을 자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모든 사람이 올 수 있는 교회를 세우지 않는다면 꿈적도 하지 말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이익 혹은 승진의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덤벼들지만 단 한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는 일자리 혹은 재산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온갖 노력을 한다. 바울은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지만 그 “상”은 “승리자의 관”이기 때문에 그 가치와 영광이 달음박질 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고 말한다(고전 9:24, 25). 그렇다면 이 문제에서는 왜 그러면 안 되는가? 맞다. 만일 당신이 그 실체 자체에서 영향을 받는다면 당신은 기꺼이 도전할 것이다.
믿음의 본질 1 & 2 (Chapter 2: 참된 신자에게 확신이 없는 이유)
믿음의 주된 대상을 고찰한다면 확신이 없는 경우에도 믿음이 존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의 일차적이며 주요하고 적절한 대상은, 그리스도의 이름 즉 그리스도라는 인물 그 자체다(요 1:12).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는 나의 주님이라는 명제라기보다는 그리스도라는 인물 그 자체다. 그러므로 믿음을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라는 말로 표현한다(요 1:12). 믿음이란 그리스도와 나 사이의 연합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연합을 이루는 실체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내 영혼이다. 그리고 그 연합을 만들어 내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최고선으로 붙들고,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넘겨주며,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동의하고,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임으로써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결합시키는 것이다. 비록 나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목표로 삼는 것이 죄 용서라는 사실을 내가 인정할지라도 내 죄를 용서받았다는 명제로 인해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좀 더 고찰해 보자.첫째,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믿음이 바라보는 첫 약속이며 위대하고 유일한 약속이다. 칭의와 구원, 그리고 사람이 누리는 혹은 그리스도에 의해 누리게 될 모든 특권에 대한 약속은 이차적이다. 따라서 이차적인 믿음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올 때까지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이다.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되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된다.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 혹은 그리스도께서 부여할 특권을 바라볼 수 있기 전에 반드시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만 한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인격과 결합하고, 그리스도의 소유임을 동의하며, 불명확하게 제시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믿음 행위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믿음 행위가 존재하는 그런 경우에만, 그리스도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혹은 자신도 영광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된다. 확신이 작용하는 대상은 바로 이 이차적인 약속들이다. 반면에 그리스도라는 인격은 믿음의 대상 즉 믿음이 붙잡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먼저 그리스도께로 나오고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그래서 칭의와 구원의 확신은 반드시 그리스도라는 인격체를 믿는 것 다음에 온다. 자, 위대하고 유일한 약속인 그리스도는 단지 불명확하게 제공된다. 비록 불명확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다. 그러므로 여기에 부응해서 믿음 행위가 반드시 확신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칭의와 영광 등에 대한 약속은 신자들에게 명확하게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계속해서 명확성을 유지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에 대한 믿음은 확신을 요구한다
셋째, 믿음이 주로 어떤 기능에서 존재하는지를 고찰해 본다면, 믿음의 주된 행위는 확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타난다. 믿음은 주로 의지에 자리 잡고 있다. 의지가 그리스도께 대한 동의,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해 맺는 결속은 결혼의 경우와 같은 연합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믿음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부른다(요 1:12), 그리스도께 나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이끌린다는 말은 믿음을 표현하는 어구다. 믿음은 주로 의지에 속한다. 자, 믿음의 주된 행위가 그리스도는 나의 것이라는 압도적인 빛에 동의하는 것이며 내 죄악을 용서받았다는 입장을 확립하는 것이라면, 그 연합을 만들어 내는 주된 행위는 오성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성에 가해지는 첫 번째 역사는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말로 표현된다. 처음에 그리스도를 나의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안다고 한다(요일 2:13). 그러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모른다.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가치에 동의하지 않을 때 (비록 그리스도의 가치에 대한 무지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근거일지라도),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그러나 나를 온유하게 대하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결합하는 그것은 믿음의 주된 행위다. 이끌어 준다는 것(요 6:44)은 내 오성이 그리스도가 나의 것이라고 동의하도록 이끈다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 주된 의도는 의지를 이끄는 것에 있다
다섯째, 확신은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믿음에 추가된 빛으로 온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제시하는 은밀한 암시를 신뢰했을 때, 따라서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인정하고 비록 그리스도가 자신의 것인지를 충분하게 감지하지는 못해도 많은 의심과 유혹의 압박을 감당하면서 그리스도를 견고히 붙잡을 때, 하나님은 그를 인 쳐주신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라고 말씀하신다(계 2:17). 반드시 사람의 믿음이 먼저 싸워야 하고 승리를 거둬야 한다. 그 뒤에 오는 확신은 면류관, 즉 믿음이 거둔 승리의 환희다. 그러나 반드시 믿음이 먼저 연단을 받아야 한다. 믿음을 유혹, 공포, 의심, 그리고 사람의 상태에 반하는 추론 이상으로 연단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승리의 확신은 연단 뒤에 온다. 어떤 누구도 연단을 마칠 때까지는 면류관을 쓰지 못한다. 고난을 겪은 뒤에 굳건해진다.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고난 뒤에 이처럼 굳게 결속하고 뿌리가 깊이 박힌다. 만일 이런 것이 고난을 받기 전에 이루어졌더라면 베드로는 그것부터 구하기를 절대적으로 염원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가 “예수를……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에서 믿음의 즐거움을 언급하는 취지다. 문맥에 따르면, 형언할 수 없이 영광스러우며 승리의 확신을 수반하는 이 즐거움이 “구원을 받음”, “믿음의 결국”, 즉 목적이자 믿음의 보상이다. 그 믿음은 6절과 7절에 따르면 많은 연단을 겪어 굳건해진 믿음이며, 따라서 천국의 보증물이라고 불리며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값없이 나눠 주시는 것이다.여섯째, 믿음의 확신을 일으키는 빛은 판명하며 믿음에 덧붙여진다. 성경은 확신을 (비록 믿음과 합쳐져 그 둘이 하나가 될지라도) 믿음과는 구별되는 다른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구별해서 고찰하기도 한다. 이렇게 고찰된 경우를 지각이라고 부른다. 은혜에 입각한 반사 행동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이것은 소망을 낳는 (히브리서에서 부르는 대로) 경험이라고 한다. 아니면, 성령이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과 함께 즉각적으로 나타내 줌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각과 눈으로 보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욥은 그전에도 믿음을 가졌지만 이 빛이 새롭게 들어왔을 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말한다(욥 42:5). 이사야도 마찬가지다. 50장 10절에서 확신을 (믿음과 구별해 언급하면서) 빛이라고 부르고, 확신이 없는 것을 어둠이라고 부른다. 그 어둠에 믿음의 빛이 비췬다. 그러나 확신과 함께 들어오는 그 빛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혼은 어둠속에 있는 것이며 눈으로 봄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확신의 빛조차도 보는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를 실제로 보게 될 천국에 있는 빛에 비교하면 그렇다. 베드로전서 1장 8절을 요한일서 3장 2절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믿음 그 자체와 그 믿음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빛을 눈으로 보고 지각하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20장 29절에서 도마에게 다른 사람들은 보지 않고도 믿지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매일 하나님을 강력하게 바라보고 빛을 받는 신자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구원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품고 계속해서 구원을 추구한다면, 구원을 획득할 확실성이 존재한다. 소수가 예정됐기 때문에 비록 내가 구원을 추구하더라도 내가 구원받을지는 불확실할 수도 있다는 말은 중상모략이다. 구하는 것에 확실성을 약속했다는 것은 바울의 진술에서 명백하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고전 9:26). 즉, 바울은 나는 확신을 가지고 속도를 낼 정도로 달린다고 말한다. 24절에서, 내가 전에 입증한 것처럼, 올림픽 경기에서 많은 사람이 경주에 참여하지만 단 한 사람만이 승리의 면류관을 받는다. 비록 승리할지 불확실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경주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 구절에서, 자신은 복음 안에 있는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하면서, 만일 당신이 당연히 해야 하는 대로 최대한의 힘을 기울여 노력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구원을 획득할 것이라고 한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구원을 얻으려고 애를 쓰고 모든 수단을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성공할 것이다. 정말이지 나태하게 경주하는 탓에 완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즉 확실하게 얻을 달음박질하고 추구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목적을 달성하고 확실히 상을 탈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도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이 가르침을, 생소하지만 설득력 있게 논증해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신다. 누가복음 11장 4~5절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한밤중에 친구에게 가서 꼭 필요한 것을 간청한다면, 잠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전혀 없더라도(7절), 그때에는 친구관계를 전혀 고려하고 싶지 않더라도(8절), 자녀들과 함께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고 말하지만(7절), 그 친구는 간청으로 인해 한밤중에 일어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이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하나님이 당신을 우호적으로 대할 생각이 없으시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미 모든 친구를 주변에 두신 것처럼 생각되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에게 문을 열어 주시고 안으로 들여보내 주실 것이다(10절). 결코 아무도 쫓겨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구하는 자마다 받으며 찾는 자마다 찾는다는 사실을 경험에 의해 확증해 주신다. 구하고 찾는 사람 가운데 빈손으로 쫓겨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