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믿음, 암기한 믿음, 떫은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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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단순히 위로받기 위한 것이 아니며, 경험해야 하며, 부활과 생명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단순히 위로받기 위한 것이 아니며, 경험해야 하며, 부활과 생명을 믿는 것이다.
[서론]
“죽도록 보고싶다. 죽도록 먹고싶다. 죽도록 가고싶다. 죽도록 사랑한다.”
죽음이 얼마나 강력한 표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죽음만큼 우리의 진정성과 간절함을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요?
죽음은 한마디로 말해서 끝장표현입니다.
은연중에 우리 마음 속에는 죽음이 가장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강력합니다.
그런데 죽음은 항상 우리에게 숨겨져 있습니다.
“삶에서 덮어놓은 것을 들추는 게 철학이고 진리이고 예술이야.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가 가장 감쪽같이 덮어놓고 있는 게 무엇일 것 같나? 우리가 감쪽같이 덮어둔 것. 그건 죽음이라네. 모두가 죽네. 나도 자네도.”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이어령 박사님의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말입니다.
죽음이란 우리가 항상 망각하고 살아가는 덮어둔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찰스 스펄전은 목회자들에게 장례식장을 많이 가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삶의 숨겨진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장에 가면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고 살던 삶의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감춰둔 진실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는 우리에게 죽음이 꽤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려줬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만 죽는 게 아니라 친구도 이웃도 죽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엊그제 나와 같이 식사하고 차마시던 분인데 죽음을 맞이한 분들을 보게 됩니다.
코로나는 어쩌면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의 두려움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려줬습니다.
코로나 초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 한 장 받으려고 긴 줄을 섰습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백신을 맞는 사람도,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도 모두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저도 이틀전 부스터 샷을 맞으면서도 조금은 걱정되었습니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자연의 원리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나이 들어서 병이 들어도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기위해 엄청난 돈을 쓰고, 위험한 수술을 감행합니다.
이렇게 죽음을 앞두면 초조해지고, 두려워지고, 슬퍼지기 마련입니다.
죽음을 앞두면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입맛이 없고, 일상의 즐거움도 사라져 버립니다.
그야말로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갈 정도로 무섭고 강력한 놈입니다.
말은 죽음이 자연의 일부라고 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분명 이것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요?
[본론]
오늘 말씀에도 한 사람의 죽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나사로입니다.
그는 두 명의 누이가 있는데 마르다와 마리아 입니다.
이 세 사람은 예수님을 가까이서 자주 보았고, 식사까지 대접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 같은 경우 자신이 가진 값비싼 향유를 부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이 친구들을 얼마나 사랑하셨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는 두 명의 누이를 먹여 살리는 가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병에 걸려 앓다가 죽은 것입니다.
그가 병으로 누워 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병이 더욱 악화되자 예수님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단강 건너편에 사람을 보내 예수님께 사정을 전달했습니다.
하루 걸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도착했는데 예수님이 곧바로 출발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계시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머무르시다가 제자들과 함께 그들의 집으로 출발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됐나요?
예수님께 가는데 하루,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이틀,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들의 집에 오는데 하루, 적어도 4일이 걸려 도착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나사로는 벌써 죽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죽은지 나흘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이 가정에 줄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요?
네, 맞습니다.
위로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좀 다릅니다.
여기에 우리가 다룰 첫번째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번째, 우리의 믿음은 단순한 위로를 받는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종교들과 같이 단지 현실 세계의 슬픔과 고통에 대한 위로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냥 어떤 종교든 가지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에 그런 기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와 같이 기독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좋은 말, 위로하는 말, 격려하는 말 정도를 들을거라면 차라리 공자, 맹자가 한 말들을 보는 게 훨씬 낫습니다.
유명한 심리학자, 상담가들의 말이 더 낫습니다.
나사로의 집에 온 사람들은 두 종류입니다.
위로하러 온 수많은 유대인들, 그리고 예수님입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가정을 위로하는 것 뿐입니다.
물론 그 위로가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위로는 우리에게 많은 힘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내 삶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위로하러 온 수많은 유대인들중 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으실 분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위로해주러 온 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그 분에 대한 모독입니다.
예수님은 내 삶에 방문자가 아니라 주인이십니다.
주인은 주인대접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만 와서 위로해주시는 그런 방문자가 아니십니다.
요한복음 2장에 가나안의 혼인잔치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 잔치집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혼 잔치집의 방문자가 아니셨습니다.
진정한 신랑이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꿔주셨습니다.
신랑이 제공해야할 포도주를 예수님이 대신 제공하셨습니다.
결혼잔치에 반드시 있어야할 포도주가 떨어져 기쁨의 잔치가 슬픔과 수치의 잔치가 될 뻔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최상급 포도주를 주셔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에 오는 목적이 마음의 위로만을 얻기 원해서 입니까?
그럼 잘못왔습니다.
당장 서점에 가서 공자, 맹자를 찾으십시오.
심리학 베스트셀러를 찾으십시오.
그게 훨씬 더 마음에 큰 위로를 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가정을 위로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죽어서 냄새가 풀풀나는 그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로하는데서 끝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삶을 바꿔주실 것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두번째, 우리의 믿음은 경험을 통해 온전해집니다.
믿음은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믿음은 반드시 경험이 뒤따라야만 합니다.
믿음은 살아있는 생물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자라나야만 합니다.
경험은 믿음을 자라게 하는 자양분입니다.
여기서 경험이란 내게 일어난 기적이나 기도응답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가요를 부르다가도 어느 순간 찬송가나 ccm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면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입니다.
내 입맛이 바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좀더 나아가봅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내 삶에서 경험해봐야 합니다.
주님을 경험함으로써 내 믿음의 고백이 가슴에서 샘물 터지듯 터져나와야 합니다.
마르다를 보십시오.
마지막 구절인 27절입니다.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정답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답은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완벽한 답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하고, 듣기만 했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보니 정답을 말하긴 하지만 마음의 터져나오는 고백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머리로 아는 믿음입니다.
터져나오는 마음의 고백이 아닙니다.
이야기 뒷부분을 보면 그녀의 이 고백이 머리속 답일뿐 터져나온 가슴의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앞서 나온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삶에 죽음의 증상인 절망에 쩔어있던 여인입니다.
남자한테서도 참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종교에서도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그런 그녀가 예수님을 경험한 후 그녀 또한 마르다와 같은 대답을 합니다.
4장29절입니다.
그녀는 '그 분이 메시아가 아닐까요' 라며 동네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사마리아 여인의 대답이 뭐가 다릅니까?
우리가 수학을 풀때도 정답만 알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정답을 어떻게 도출해내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을 수학정답처럼 아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은 그의 답에 엑스표를 하실 것입니다.
마르다는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So what?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자기 삶에 어떤 변화가 있나요?
사람들보다 좀 더 큰 위로를 받는 것인가요?
정답맞췄다고 하나님이 좋아하실까요?
아닙니다.
그 정답을 증명해 내야만 합니다.
주님은 내 삶으로 그게 정답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수학 풀이 과정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실 것입니다.
마르다와 사마리아 여인의 차이는 바로 그것입니다.
정답만 적은 사람과 풀이과정을 적은 사람.
우리는 과연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또하나 강조하는 경험이 있습니다.
바로 기다릴줄 아는 믿음, 인내할줄 아는 믿음입니다.
나의 때와 하나님의 때가 다르다는 것을 아는 믿음입니다.
나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곧바로 나사로에게 가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들이 나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나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죽은지 나흘만에 예수님이 이 가정을 찾아오신 이유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죽은 육체 근처에 나흘동안 머무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나흘이 지나면 그 영혼도 육체 곁에서 떠나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 때가 되기를 예수님은 기다리신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끊어지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진리를 경험하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세번째, 우리의 믿음은 부활과 영생에 대한 것입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대상이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이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내게 누구시며,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알고 믿는 것이 찐 믿음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7가지 비유로 자신이 누구신지 밝히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자 생명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선 시작하는 시점에서는 막연한 믿음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성숙해지고 온전해져야만 합니다.
익지 않은 감은 떫습니다.
떫은 감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떫은 믿음은 익어야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마르다를 보십시오.
믿음이 있긴 있는데 막연합니다.
떫은 믿음입니다.
22절입니다.
‘예수님이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주실 줄 압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을 단순히 지금 상황을 좀더 나아지게 하는 분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 슬픔을 좀 덜어달라는 것이나 죽은 오라버니의 영혼을 주님께 맡긴다는 정도의 의미입니다.
믿음이 있긴한데 뭔가 부족합니다.
그녀의 고백인 '무엇이나' 속에는 오라버니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아직 떫습니다.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마음에 흡족함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정확히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마르다가 다시 대답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이게 예수님이 기대하신 답변이었을까요?
세상 마지막날 다시 부활한다는 것은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보편적인 믿음입니다.
마르다도 그런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마르다는 죽은 자신의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상상할수도 없었습니다.
뒤에 나오는 내용이지만 무덤에 안치된 나사로의 육체에서 썩은 냄새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자기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 믿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의 막연한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녀의 고백이 틀린말은 아닙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는 믿음'일 뿐입니다.
'암기한 믿음'일 뿐이다.
이 역시 '떫은 믿음'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은 이런 막연한 믿음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을 한번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내가 구하는 것을 들어주셔서 내 삶이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지는 것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그냥 어디서 듣고서 아는 믿음입니까?
그렇다면, 아직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아직 떫은 믿음입니다.
더 온전해지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마르다의 '아는 믿음'중 하나는 부활의 생명을 마지막날 일어날 일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을 죽은후 가는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 구절은 마치 죽은 후 좋은 곳에 가기 위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어서 가는 천국만 이야기하신 게 아닙니다.
확인할수도 없는 그런 저 세상이야기만 하신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6절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부가 설명을 해주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은 자는 육체적으로 죽든 살든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리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천국, 즉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천국에서 누리는 생명이 영생인데 그 영생은 지금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는 어떠한 육체적 죽음도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끊지 못합니다.
그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는 7가지 표적과 7가지 예수님의 자기 선포가 나옵니다.
7가지 표적중 7번째가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앞에 나온 표적들은 모두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시는 지 보여주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 신하의 죽어가는 아들을 고치신 표적,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치신 표적,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신 표적, 물위를 걸으신 표적, 날때부터 시각장애인이던 사람을 고치신 표적, 모두 목적지는 한 곳입니다.
그런데 아직 다뤄지지 않은 표적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표적입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은 그 십자가 표적에 대한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2000년전 이미 일어난 사건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하셨던 질문을 우리에게도 하고 계십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우리는 과연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도 위로받기 위해 오셨습니까?
오늘도 아는 믿음, 암기한 믿음때문에 오셨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믿음의 고백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고백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분이 이제는 우리에게 '떫은 믿음'이 아닌 '자라나는 믿음, 성숙한 믿음, 온전한 믿음'을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 어떤 믿음의 대답을 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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