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케 하시리라
이사야서 설교 1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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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views1. 하나님은 한 때는 깨끗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안타까움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2.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회복의 앞에는, 고통스러운 정화의 시간이 항상 존재합니다. 3. 그 정화의 뒤에는 항상 회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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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Handout
한 때는 깨끗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안타까움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때는 깨끗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안타까움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자기 딸 시온을 향한 21-22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한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신실하던 성읍이었고, 정의와 충만하며 공의가 거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창기가 되었고, 살인자들의 마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펜을 통해서, 이 예루살렘의 타락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을 던지고 계십니다. 지난 번 전해드렸던 사 1:4-9의 말씀과도 연결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전의 말씀에서는 단순하게 악한 성읍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에서 나온 예루살렘에 대한 말씀은 한탄에 더욱 가깝습니다. 한 때 신실했고, 한 때 공의로웠고, 한 때 아름다웠던 이 성읍은, 이제는 창기와 살인자로 가득찬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22절에서 드러나는 ‘은’, ‘포도주’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본디 은과 포도주는 그 자체로도 가치를 가집니다. 은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귀금속이요, 포도주는 그 자체로도 음식을 먹을 때 얼마나 그 음식에 향과 맛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은과 포도주는 거기에 더해 이스라엘의 사명까지도 품고 있는 단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은은 독극물을 판별해주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사극에서도 가끔씩 보셨을 것입니다. 은은 독극물과 만나 산화됨으로써,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정의와 공의, 신실함의 실행에 있어서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본디 뜻이 어떠한지를 알려주고 자신은 원래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세상의 소금과도 같은 역할을 요구받는 것이지요.
포도주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마셔보아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시 104:15 말씀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그러나 단순히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만이 포도주가 가지고 있는 기능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위치한 중동이라는 땅이 식수를 구하기 쉽지 않은 지리적 환경임을 고려하면, 포도주는 그 음료로서의 가치 또한 큽니다(룻 2:14).
또한 알콜은 소독의 기능이나 약의 기능 역시 수행하지요. 현재처럼 증류식으로 강한 알콜을 만들어 소독제로 쓰는 시점이 아닌 당시 상황에서, 포도주는 단순한 알콜만의 의미가 아닌 상처를 소독하는 상황에서도 사용되었고(눅 10:34), 위장약이나 마취제 등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포도주에 물이 섞였다는 것은, 그 포도주의 가치를 ‘마시는 것’ 이외의 어떤 것으로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포도주 속의 알콜이며, 소독용으로 쓸 때는 알콜의 도수가 높아야 하기 때문이입니다. 탈무드에 따르면 음료로 사용하는 경우 술에 물을 1:3 비율로 타서 사용했다는 저술 역시 이 술은 음료용이 되었다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오늘 포도주에 물이 섞였다는 것을 한탄하는 예언자의 글로 볼 때, 이 포도주는 단순히 음료용으로만 사용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그들의 병을 치료하는 역할이 기대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포도주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역할을 이제는 수행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로까지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 상태를 오늘 본문의 23절에서는 노골적으로 설명합니다. 사1:23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지난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지고 있는 의무인 고아와 과부에 대해 이들은 그 의무를 저버렸습니다. 거기에 더해 뇌물과 예물을 구하는 이들이 되었지요. 불순물이 끝까지 껴서, 이제는 원래의 기능을 더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뒤를 잇는 ‘영적 이스라엘’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역할인 세상의 부패를 경고하고 그들의 독을 소독하고 병을 치료하는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요?
한편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초대 교부인 요한 크리소스톰은 이 말씀에 대해 자신들의 것을 하나님의 것과 섞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조롱의 의미라고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진짜 그런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단 1%도 내 자신의 말을 섞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으신가요?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그 말씀으로 이어지고 있는가요? 아니면, 내 말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얹혀서 옮겨지고 있나요? 저 자신도, 이 내용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이 참 고통스럽지만, 말씀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정화와 회복을 이야기하시지만, 우리는 마음에 각오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정화와 회복을 이야기하시지만, 우리는 마음에 각오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다행히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정화와 회복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찌꺼기를 청결하게 하시고 혼잡물을 제하여버리겠다고 말씀하셨으며, 우리를 의의 성읍이요 신실한 고을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이어나가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축복과 회복의 말씀이 보이면, 그 앞의 조건들을 잘 보지 못하고 넘어가버리고는 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회복의 ‘조건’인데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24절에서, 내 대적에게 보응하며 내 원수에게 보복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사 1: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하게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복하리라
여기서 대적과 원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의 말씀을 읽을 때, 이스라엘의 적에 대해서 말씀하시는구나, 하고 쉽게 읽어넘기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하겠다”고 하실 때, 그 옆에서 하나님을 돕는 이로 서고 싶어하지요. 이러한 우리의 믿음의 열정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ㅅ흡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문맥에서 하나님의 비판의 대상은 누구인가요? 이스라엘 바로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안에서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이스라엘 자신의 타락에 대해서 강하게 말씀하고 계시지요.
하나님의 공의는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도 그 공의의 심판은 제하여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이요, 우리는 육신을 입고 살아가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육신의 생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어쩔 수 없음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롬 8:7 )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우리 자신의 본능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고 스스로를 고백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겸손이 아닌 ‘정확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롭다’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는 있지만 그것이 십자가의 보혈로 이미 ‘값이 치러졌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형사재판에서 이미 보석금을 낸 상황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회복의 은총이 없이는, 우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서 적인 상태가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입술의 고백만으로 우리는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확신이 성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저 입술만으로 하는 고백일 수 있음을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화의 과정을 말씀하십니다. 이 정화는 잿물과 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잿물이 이야기된 것은 불순물이 하얗게 씻기는 것을 묘사하기 위함이고, 불이 언급되는 것은 은이 산화되어 찌꺼기가 끼었을 때, 이 은을 원래대로 돌리는 방법은 이를 다시 녹여 찌꺼기를 태워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로 태우는 것은 인간이 느끼는 고통 중에 가장 극심한 통증이라고 하지요. 이 극심한 아픔의 시간은, 그 고통을 느낀 사람의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합니다. 인간적인 허영도, 금전적인 것도, 이뤄왔던 업적도, 모두 불에 타는 것이지요. 오직 타지 않는 것은 순수한 하나님의 생명의 영의 말씀뿐입니다.
그러면 28-31절의 말씀 역시 이해가 갑니다. 우리가 기뻐하던 것, 즉 우리의 육적인 재물이나 명예나 기타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지엄한 심판의 말씀, 불의 심판 앞에는 오히려 땔감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정화 뒤에는 항상 회복이 있습니다.
정화 뒤에는 항상 회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불의 정화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회복의 말씀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온 남은 자들은, 그리고 시온은 정의와 공의로 구속함을 받습니다.
위의 정화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예루살렘은 의의 성읍이요 신실한 고을이라 불리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처음과 같이, 본래와 같이”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타락을 지적하신 오늘의 맥락을 생각하였을 때, 그 타락이 일어나기 이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재판관들과 모사들을 회복시키겠다는 이야기가 먼저 등장하는 것을 조금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시키는 것에 순서가 있다는 이야기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원래대로 회복된다는 이야기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있어서는 ‘다윗 때처럼’ 회복되는 것으로 읽힐 것입니다. 나라가 하나님의 기준대로 바로 서서 가는 그 때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언제 회복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재판관과 모사일까요? 아니면 그 뒤의 온전한 회복을 기다리는 다른 이들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우리 헤브론 공동체가, 그리고 우리 한국 교회가 70인역의 표현처럼 “의인의 도시요 신실한 자들의 대도시”로 불릴 때에서야 해당되는 이들이 아니라, 우리부터가 먼저 변혁되어야 할 재판관과 모사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에서 실행해 나가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로 부름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불의 심판은 앞으로 다가올 바빌로니아의 지배일 수도 있습니다. 이 지배 후에 다가올, 모든 것이 새로워질 이스라엘의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배가 이루어지는 시간의 성취를 기대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온전한 성취는 메시아에게 있고, 그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부르고 계시기 때분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우리는 장차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자에 앉을 때, 세상을 심판할 자입니다. 따라서, 회복에 앞서있는 정화의 순간을 먼저 맛볼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화를 ‘통과한’ 자가 아니라, 그 순간 가운데 있는 사람이요, 아직도 정화의 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회복은 온전히 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100%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정화와 회복의 선언에 신실하게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응답 이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하나님은 한 때는 깨끗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안타까움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회복의 앞에는, 고통스러운 정화의 시간이 항상 존재합니다.
그 정화의 뒤에는 항상 회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