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본질, 유일한 희망(롬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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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께 문제를 몇 가지 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한 가지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리구두의 주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신데렐라라는 이야기입니다. 또 다른 문제입니다. 어떤 한 사람의 희망은 자신에게 맡겨진 반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그 반지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반지의 제왕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외에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접하고 살아갑니다. 이 많은 이야기들은 각각 다른 전개와 과정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희망을 가지고 살며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어떻게 끝맺어지는지 아마 말을 안 해도 아실 것입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으로 끝맺음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모든 이야기들은 각자의 희망을 가지고 그것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를 한 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모든 이야기들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하여 진행되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인생이라는 이야기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써내려가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여러분은 어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잘못된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 희망을 이룰지라도 우리가 목표로 하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는 로마서 말씀을 통하여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우리가 품고 살아가야 할 ‘희망’에 대해서 함께 나누어보려 합니다. 함께 말씀을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배경소개

이번 주는 민족의 대명절인 설날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은 설날에 ‘차례’를 지냅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는 차례를 중국의 사당에서 행했던 참례, 천신례라는 제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이 제사들 중에는 비교적 간략한 제사들이 있었는데 그 제사들을 중국의 문화인 차를 올리는 예라는 뜻에서 차례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모든 예식의 표본이 되었던 주자의 ‘가례’라는 책에는 설, 동지 등 1년에 대략 31번 정도 사당에서 차례를 지내야 한다고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이 차례라는 제사는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문화는 다르지만 가장 간략한 제사를 일컫는 말로 불렸습니다. 그러다 시대가 흐르고 점차 조상들을 기리고 또 섬기던 사당들이 없어지면서 일년에 수십 번 지내던 차례가 설과 추석에만 지내는 제사풍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차례는 조상들에게 인사를 드린다고 하는 명목에서 시행되는 하나의 ‘간단한 제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차례를 지내는 상황은 참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에게는 제사를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례를 지낸다는 것은 하나님 외 다른 대상 즉 죽은 조상들에게 상을 차리고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아무래도 우상숭배의 의미를 담고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상황들로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하여 웃어른들께 간혹 어려운 경우들을 겪곤 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 곤혹스럽기는 해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중히 사양하고 제사에 참여하지 않거나 절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차례가 끝난 뒤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제사를 드리고 난 뒤 그 제사상에 놓여있는 음식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록 차례상에 놓여졌다고는 하나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갈비와 동그랑땡, 산적, 동태전 등 형형색색 부쳐진 여러 전들, 느끼함을 잡아주고 고소함을 살려 입맛을 돋구는 삼색나물과 든든한 한끼 떡국 그리고 마지막 입가심을 하게 만들 식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몇몇 사람들은 먹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또 몇몇 사람들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기에 먹지 않는 것이 맞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먹는 것이 맞을까요 먹지 않는 것이 맞을까요? 참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흥미롭게도 정확히 오늘의 본문 속 로마의 교회에서도 다루어진 문제였습니다.
로마서 14:1–2 NKRV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유대인들에게는 ‘코셔’라고 하는 음식규례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율법에 따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구약 율법대로라면 유대인들은 만약 소나 양, 염소고기를 먹는다 해도 유대교의 의식대로 도축된 고기여야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고기는 피가 다 빠져야만 먹을 수 있는데 실제로 아직도 코셔를 엄격하게 지키는 유대인들 중에는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를 피가 있는 고기로 간주하여 먹지 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지역은 로마입니다. 당시 로마의 시장에서 파는 고기들은 주로 돼지고기나 염소고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고기들은 햄버거의 패티들처럼 다져져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어떤 고기가 섞여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고기를 사 먹어야 했었습니다. 율법으로 따지면 먹지 못하는 상황이었씁니다. 그나마 비교적 안심하고 먹을 수 있었던 소고기의 경우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로마의 신들에게 바쳐진 고기들이 시장에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로마교회의 성도님들은 어떻게 행동하였을까요? 본문은 이 상황을 맞은 로마교회의 성도이 두 부류로 나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강한 자와 약한 자입니다. 강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자유케 하셨으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음식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라고 생각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무슨 음식이든지 자유롭게 먹었습니다. 반대로 약한 자들은 그래도 우리가 어떻게 율법이 부정하다고 규정하고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차라리 고기를 먹지 않겠다 생각하여 채소만 먹었습니다. 본문의 ‘채소만 먹느니라’ 라는 말씀은 채식주의자들이나 건강을 생각한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코셔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고기를 먹지 않았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며 상대방의 믿음이 틀렸다고 판단하고 정죄하기 바빴습니다.
본문 가운데 사도 바울이 말하는 약한 자들은 흥미롭게도 음식을 먹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면에서 자유하지 못하며 양심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약함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렇다고 해서 약한 자들에게 문제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받아들이고 이후 본문에는 강한 자가 약한자를 위하여 그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꺼이 음식이나 포도주를 먹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음식을 먹고 먹지않는 것이 본질이 아니고 생명이 본질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교회의 성도님들에게는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마느냐 외에 또 하나 답을 내려야 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로마서 14:5 NKRV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두 번째 문제는 날들, 곧 유대교의 명절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구약에는 여러 명절들이 있습니다. 유월절, 초막절, 칠칠절 등이 그 명절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생각을 한다면 크리스마스, 송구영신, 추수감사, 맥추감사절 또는 수요, 금요일, 주일 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유대의 명절들이나 안식일이 다른 날들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한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날을 특별히 더 거룩하게 하셨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날들이 다 특별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어떤 특정한 날이 다른 날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들로 나뉘었던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양측의 사람들은 서로를 비판하고 답을 정하기 위하여 한치의 물러섬 없는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로마 교회의 목회자라면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어떤 답을 내리기가 참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답을 내리기 곤란한 문제들은 본문 속 제사음식을 먹어도 되냐 안 되냐, 어떤 날이 더 귀하냐 그렇지 않냐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실생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술에 대해 절주해야 하는가 금주해야 하는가, 교회에 올 때에 화장이나 옷차림은 어떠해야 하는가, 예배에 여러 악기들과 특정 장르의 음악을 사용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텔레비전이나 각종 미디어들을 봐도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필요에 따라 예배나 절기를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는가 등이 그러한 문제들입니다. 무엇이 맞는 행동일까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우선 교회를 토론장이나 법정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명쾌한 답을 내려줍니다. ‘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셨다

사도 바울이 다 맞다고 이야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대학교를 다닐 때에 저와 함께 의견을 나누던 친구들과는 자주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찬양에는 어떤 장르와 악기들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합당할까?’ 저는 하나님께서 모든 문화의 주인이시기에 그 주인이신 하나님께 다양한 악기들을 가감없이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화려하지 않고 조용하게 되도록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사가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목소리로만 찬양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이야기를 하는 모두는 누가 틀리고 누가 맞는 의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의견들은 하나님께 올려드리기에 합당한 예배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며 합력하여 선하게 하시는 주님께서 이 의견들을 모두 받으시고 더욱 선하게 이끄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저는 친구들에게 장난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뛰지 않는다.’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시지요? 영원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이라는 품격이 있는데 어떻게 그 잠깐의 시간이 급하다고 뛰어다니냐고 제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럴듯하게 들리시지 않나요? 여러분 그런데 과연 그리스도인에게 뛰는 것과 뛰지 않는 것이 중요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뛴다고 해서 우리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으며 뛰지 않는다고 해서 정체성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상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우리가 보통 교회 안에서 윤리적으로 혹은 우리 각자의 의견의 차이로 인하여 고민하고 또 첨예하게 대립하는 실생활 속 대부분의 문제들은 틀림보다는 다름의 문제가 대부분 입니다. 교회 안에서 비본질을 가지고 서로의 믿음을 의심하고 또 비판하며 정죄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본질과 비본질을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비본질에 대해서는 본문의 말씀과 같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목사님께서 얼마 전 설교와 칼럼에서 이 말을 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사도 바울은 1절에서부터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하고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4:1 NKRV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로마서 14:3 NKRV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사도 바울은 본질이 일치한다면 본질 안에서 그 믿음이 연약하든지, 강하든지 서로를 받아주고 비판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잠시 예수님의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장 큰 소망이자 희망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비판하지 않으셨고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유일한 소망을 위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셨고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용서하셨고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유일한 소망을 위하여서 하나님되심을 기꺼이 제한하셔서 인간이 되셨고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우리를 받아주셨고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받으셨는데 어찌 우리가 서로를 비판하고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14:4 (NKRV)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의 일에 특히나 내가 맡아서 하고 있는 일들이나 내 주변의 사람들에 대하여 간섭하고 하나하나 정죄하고 판단하려 한다면 우리는 보통 이러한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내가 알아서 할게.’ 왜 그렇습니까? 내가 그 일을 가장 잘 알고 내 사람들을 잘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단순히 아랫사람이 아니라 하인이 있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이 고용한 하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판단받고 정죄받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점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사람들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행동을 판단하고 정죄하실 분은 예수님 뿐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서로 옥신각신하며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우리 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음식들을 믿음으로 먹는 자들과 모든 날들을 특별하게 여기는 자들도 예수님께서 피의 값으로 사신 주님의 하인들이며, 그렇지 못하고 아직 율법에 매여 살아가는 자들 또한 예수님께서 피의 값으로 사신 주님의 하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인인 우리들끼리 비본질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서로가 정죄한다는 것은 우리를 세우시는 우리의 주인의 권능을 침범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그 자유는 그리스도의 주권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가 믿고 또 제가 지금 전하고 있는 복음의 본질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 되겠습니까? 본질은 흔들리지 않는 진리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본질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어야 합니다. 그 본질은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의 결말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만드는 유일한 희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진 자신의 이야기의 각각의 전개와 양상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희망을 이루었을 때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싶어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끝을 맞이하게 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희망 즉,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둘 수 있는 희망은 참되고도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의 본질, 유일한 희망은 삶과 죽음을 뛰어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답이 예수 그리께도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것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유일한 희망이 되시기 위하여 죽음을 경험하셨고 또 다시 그 죽음 가운데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을 얻습니다. 우리 교회 주보와 또 슬로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행복의 끝 그리스도라는 말은 왜 없을까요? 그리스도 안에 행복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희망들과 내 안의 소망들은 행복의 시작과 동기가 될 수는 있으나 영원한 행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일한 희망과 소망을 죽음을 뛰어넘는 예수 그리스도에 둔다면, 그 행복은 끝이 없이 영원할 것입니다.
로마서 14:6–9 NKRV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복음의 본질, 그리고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예수님이라는 사실 앞에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또 사랑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나 믿음이 강한 자나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동한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서로의 다름에 대해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어떤 행동을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것과는 관계없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모든 행동의 동기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 외에 것들은 자유 안에서 비본질인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비록 서로가 다를지라도 각 사람의 행동에 따라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크심과 인자하심 앞에 감사를 올려드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제사음식을 먹는 문제, 날을 귀하게 여기는 문제를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보게 된다면 음식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생명과 하나님께서 거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 어떤 날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 날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거룩한 것을 알게됩니다. 비본질적인 문제들 속에 있는 핵심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며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어떠함, 우리가 온전하거나 받아주실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것이 된 우리는 각각의 행동양식은 달라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를 노력하고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인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본질은 사나 죽으나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는 비본질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각자의 선한 양심과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고 본질을 깨뜨리지 않는데에 있어서 서로를 인정하고 또 그 믿음을 비판하거나 의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각자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동하였는지, 나의 강함과 약함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와 있듯이 우리의 행동과 말에 대해 우리 입으로 하나님 앞에 직고할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이 죄이기 때문에 순간순간마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나의 유익과 나의 영광을 우리의 유일한 희망으로 두고싶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곧 우리의 들보를 보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티끌을 지적하도록 만듭니다. 창세기에 인간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우리가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게 만듭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행하셨는지, 또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계신 곳에서 이렇게 선포하십시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멘.

결론

우리는 복음이라는 본질 안에서 자유한 강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 할 수 있으나 기꺼이 덕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지 않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실 저희가 오늘 나눈 이 내용은 주일학교 친구들과 함께 나누는 교리문답에 등장하는 제 1문에 대한 나눔을 설교로 바꾼 것입니다. 친구들과 교리에 대해 함께 나누고 배우며 저희는 점점 믿음이 강한 자들이 되어갑니다. 본질과 비본질을 구별할 수 있게 되고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요, 그 안에서 비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자유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지식만 가지고 행동하게 된다면 약한 자들을 무시하는 잘못된 결과가 초래될 수 있습니다. 즉, 교리에만 능숙한 친구들은 오늘 본문 속 등장하는 행동에 미숙한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희 주일학교는 교리공부 뿐만 아니라 교제와 설교를 통해서 형제와 자매의 양심과 믿음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음식을 먹지 않거나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성숙함을 선택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 말씀을 함께 나누려 가져왔을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세상에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 안에서 자유함과 동시에 성숙함을 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주변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차별과 혐오의 시대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싸워 이길 것을 강요하는 사회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희망은 우리 안에 또 이 땅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본질을 기억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그리스도 안에 속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소망합니다. 서로 판단하지 않고 주께서 우리에게 그러하셨듯이 서로를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믿는 자들이라 하여 심판대에 서지 않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기록된 것처럼 우리가 자기 일을 하나님 앞에 고할 날이 오게 됩니다. 물론 그 날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하겠지만,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보혈의 핏값으로 우리는 구속하여 용서하여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속하였다는 사실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인 이유는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날에 우리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일들만을 아뢰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질이시며 우리의 유일한 희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굳건히 서서 사랑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본질과 비본질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를 받아주셨다는 사실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본질이시며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것들은 우리의 믿음과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말미암아 비본질적인 부분에 있어 나의 행동과 나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여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주인과 기준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제사음식이나 어떠한 날, 술이나 미디어 등 비본질적인 것을 접했을 때에 저와 여러분이 예수로 말미암아 자유한 강한 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약한 자들을 받아주며 그들을 위하여 기꺼이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더 높은 차원의 자유를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교회와 가정 그리고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서로 연합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복된 일들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믿음의 본질이시며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나누고 함께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 안에 자유함을 주시고 열심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저희가 본질에는 타협없는 일치를 하게 하여주시고 또 다름에는 자유를 가질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각자의 행동과 양심이 다르다고 하여 주님이 받으시고 세우신 자들을 저희가 감히 판단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저희에게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강자는 약자에게 또 약자는 강자에게 존중과 사랑으로 서로 받아주는 저와 존귀한 동서울광염교회의 성도님들의 가정과 삶 될 수 있도록 하여주소서.
주님 이 시대를 바라봅니다. 참 안타까운 시대를 살아갑니다. 이 땅 가운데 혐오와 분노 그리고 차별이 그치게 하여 주십시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타협없는 기준으로 삼되, 교회와 복음 안에서 또 우리의 삶 속에서 서로가 다르다고 하여 비난하지 않게 하시고 서로를 향하여 비난의 화살을 쏘지 않을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저희가 화평케하는 일들에 쓰임받는 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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