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인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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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12–13 NKRV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서 변치 않는 세 가지 가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것은 사랑이다.”
믿음의 최고봉은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 안에 있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설령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역사가 창28장, 야곱이 집에서 도망쳐 나와 갈대아 지방으로 가던 노정에 등장합니다. 당시 십대 후반의 야곱은 거칠은 사막에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다혈질인 형이 자신을 죽일 것을 확신하고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살기 위해서 나왔던 길은 사막에 접어들면서 죽음의 길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하염없이 걷다가 해가 졌고,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아 그는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밤 꿈을 꿉니다. 그 꿈은 자신의 잠자리에 빛나는 계단이 생겼고, 이 계단 위로 천사들이 다니는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잠자리에서 시작된 이 계단은 자신이 그토록 믿었던, 그러나 사막의 거친 환경 속에서 뵐 수 없었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아침에 되었을 때 그는 전날의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잠들었던 곳마저도 하나님의 자리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죽음과 연결지어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잠이라 하였습니다. 각각 무덤에서 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의 잠자리를 보살피듯, 각 사람의 깊은 잠자리를 보살피십니다. 그 죽음이 비극적이든, 참으로 안타깝든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이유, 신뢰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잠자리를 지키듯, 오늘 김손경 성도의 삶이 끝난 이 자리를 아시고,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소망의 극치는 확신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 안에 거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종교는 비극적인 상황을 부인하는 것으로 그릇된 소망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믿음은 재난을 쫓는 부적 같은 것이 아닙니다.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토끼발 같은 것도 아닙니다. 온갖 사건과 사고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미신 따위는 더더욱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들의 삶에는 아픔과 비극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르치며 동시에 이 비극과 고통의 끝에는 그것에 대한 설명이 있을 거라는 것과 그 피해자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결국 안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찌 그럴 수 있을까요? 누군간의 죽음과 누군가의 죄는 우리를 참으로 아프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확신하여 소망을 가지고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싶습니다.
<나와 너>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20세기를 일컬어 ‘신의 일식日蝕’의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일식은 지구와 태양 사이에 달이 자리 잡음으로써 일시적으로 태양 빛을 차단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구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태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기에 일식 현상이 나타나도 해가 사라졌다거나 해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차단하는 장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의 창에 낀 때가 그 장애물일 것입니다. 지나친 욕심,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 미움과 시새움, 악의, 분쟁, 오만, 자랑, 무정함, 절망…. 열거하다보니 이런 것을 통칭하여 이르는 말이 떠오릅니다. 바로 ‘죄’입니다. 죄야말로 우리 영혼의 창문을 불투명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시인은 자기 영혼을 죽음의 잠에 빠뜨리는 것들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편 13:3–4 NKRV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생각하셔서 응답해주시기를 바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죄로 인해, 허물로 인해 하나님의 계심을 볼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가 죽음이 아닐런지요? 누군가에게 죽음은 절망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소망을 확신케 하는 명소가 됩니다. 인간에게 극복하지 못한 가장 큰 사건 죽음, 그 너머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할 때 산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지 않음이 아니라 여전히 계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극치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아니요, 인간 서로를 향한 사랑도 아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길 것이며 그 사랑이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23:4 NKSV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결코 나 혼자가 아니며, 하나님의 사랑의 손 안에 우리가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지 못하는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껴질 때에도,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할 때에도,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당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죽음은 끔찍한 비극이었습니다. 죄가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무시무시한 고문을 당하시고 어처구니없는 죄목으로 처형 당하셨습니다. 그 당시 그분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십자가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들은 혼란스러웠고 고통스러웠으며 세상이 끝난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고통과 어려움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은 그들 곁에 함께 계셨고 그분의 사랑은 그들을 한결같이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자신을 단단하게 껴안고 가신다고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부활에 이르러 그 정점에 도달할 것을 믿습니다. 죽음조차도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갈라놓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길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고 김손경 성도는 이 사랑의 힘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늘 단정하며, 아름다운 태도를 가진, 말 그대로 멋진 성도였습니다. 김손경 선생님은 말씀과 기도를 사랑했습니다. 언제나 야외에서 전 활동을 즐겼으며 사람들을 좋아했습니다. 신앙을 시작한 별내교회를 사랑하셨고, 성경을 읽는 시간을 사랑했습니다. 한마디로 김손경선생님은 말년에 다시 새롭게 시작한 인생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손경 성도님가 보여준 이 모든 삶에 대한 애정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과정이었음을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삶 가운데 사랑이야말로 -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 가장 중요한 것임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을 책망하라고 바리새인들이 요구했을 때 도리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40 NKSV
40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 김손경 성도를 추억하고 있는 지금, 저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와 곧 있을 발인과 봉안될 납골묘비까지도 다함께 한 목소리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신다. 그리스도는 그를 위해 죽으셨다. 그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이를 소망으로, 믿음으로, 이제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으로 품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의 말년을 선하게 이끄셨던 하나님을 좇아 우리 모두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로 선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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