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05 룻기 새벽기도 설교

룻기 새벽기도 설교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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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주일과 월요일 새벽에 룻기 말씀에 대해 설교하려 합니다. 룻기 앞에 위치한 사사기의 중요한 교훈은 왕이 없어서 백성들이 자기 소견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하나님의 백성을 돌볼 진정한 왕이 있는가? 이 질문에 룻기는 “그런 왕이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 왕은 장차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다윗 왕이고 궁극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룻기 앞에는 암흑기라고 할 수 있는 사사시대가 나오고 룻기 뒤에 있는 사무엘상 초반부분은 백성들의 타락이 극을 치닫는 사사기 말기를 다룹니다. 그래서 사사기와 사무엘상사이에 있는 룻기의 별명은 ‘껍질 속에 싸인 진주’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사사시대에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메시아의 계보가 룻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룻기에 대한 말씀을 나눌 텐데 룻기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어두운 사사시대에 그분의 백성을 돌보시고 구원하신 것처럼 지금 이 시대를 돌보시고 구원한다는 소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1- 언약에서 벗어난 백성에게 고통이 따른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언약에서 벗어난 백성에게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1절에 보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사사시대의 특징은 왕이 없어서 백성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소견대로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사시대에는 불순종 심판 회개 구원이 여러 차례 반복된 패턴으로 등장합니다. 우리는 룻기 본문을 보고 있지만 룻기의 배경은 사사시대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1절을 보겠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이 부분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사사들이 사사노릇 할 때에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사는 이스라엘에 왕이 생기기 전에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구원하던 임시적인 군사지도자 정도의 직분입니다. 드보라처럼 재판관 역할을 했던 사사는 거의 없고 대부분 전쟁영웅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왕의 역할은 못했습니다.
이 사사들이 사사 노릇할 때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구약시대에 흉년이라고 하면 흔히 하나님의 심판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이 옛 언약의 백성들을 꾸중하실 때 그런 방식을 주로 취하셨습니다.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말씀대로 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언약 백성들에게 한정된 언약적인 심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심판은 모세 언약에 근거한 심판입니다. 신명기 7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언약의 땅에 흉년이 들었으면 이게 언약에 근거한 심판인줄로 알고 그 땅을 지키고 회개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엘리멜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언약에 관련된 문제를 세상적인 방식으로 해결했습니다. “여기 농사 안 되면 다른데 가서 하면 되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판단에 따른 결정입니다. 언약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모압 땅으로 이사 갔습니다.
만약 이 흉년이 언약이 아니라 우연에 의한 것이면 여기서부터 좀 풀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엘리멜렉이 그 땅에서 죽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뭔가 느낌이 와야 하는데 그래도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당연히 언약의 땅을 벗어난 회개도 없습니다. 그 와중에 엘리멜렉의 아내인 나오미가 며느리를 맞이하는데 오르바와 룻입니다. 오르바와 룻은 모압 사람 입니다. 이방인입니다. 신명기 7장 3절에 이방인과 혼인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과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거주한지 10년쯤에 모압 여인과 결혼한 아들 둘이가 다 죽고 말았습니다. 아들 이름이 하나는 말론이고 하나는 기룐인데 말론은 질병이란 뜻이고 기룐은 파멸,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에는 자녀의 이름을 부정적으로 지어서 액땜을 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아이 이름을 이런 식으로 짓는 관습이 있지 않았습니까? 황희 정승의 어릴 때 이름은 도야지였고 고종은 어릴 적 이름이 개똥이었습니다. 어릴 때 이렇게 이름을 지어야 오래 산다 했습니다. 일종의 미신인데 가나안에도 이런 미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론과 기룐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자녀를 하나님 말씀으로 키운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방식으로 키웠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 아들들이 자녀를 좀 생산하고 죽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남자 아이 한 명 못 낳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엘리멜렉 집안의 대가 완전히 끊긴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구약시대에 대가 끊긴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입니다. 그 때는 민족이 교회고 출산이 곧 복음전파라서 대가 끊기는 것은 교회가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과는 좀 다른 상황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언약을 벗어나면, 하나님과의 관계, 그분의 말씀을 벗어나면 그에 응당한 심판이 따른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적용) 지금도 언약에 근거한 심판이 있겠습니까? 지금도 분명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이 언약에 신실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징벌이 주어집니다. 이것을 교회정치로 구현한 것이 바로 치리입니다. 언약에 근거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교회제도에 반영된 것이 바로 치리입니다. 오히려 치리는 복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더 큰 징벌을 겪기 전에 교회가 성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언약에 근거한 삶을 살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징벌하시는 것은 오히려 복입니다. 만약 우리가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 언약과 상관없는 사람이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내버려둘 것입니다. 말씀대로 안 사는데 일이 잘 풀려도 내버려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결국 영원한 심판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어떻게든 천국문으로 계속해서 인도하십니다. 복을 주시든 꾸중을 하시든 책임지고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언약에 근거해서 복도 받고 징벌도 받기도 하면서 결국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게 됩니다. 언약에 근거한 심판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측면도 있습니다.
2- 고통을 당한 자에 대해 침묵의 위로가 필요하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언약적 심판을 당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침묵의 위로라는 것입니다. 이제 엘리멜렉의 가정에는 남은 사람이 남편과 아들을 잃은 나오미, 그리고 청상과부가 된 오르바와 룻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고대에는 아내의 존재 근거가 남편과 자식이었습니다. 집에 남자가 없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 본문을 보면서 “언약의 땅을 떠나고 말씀과 상관없이 사니까 그렇게 심판 받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을 한 꺼풀 열어서 막상 그 상황에 들어가서 나오미라는 여인을 만나면 말을 꺼내기가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성도는 고통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원론적으로는 언약에서 벗어나고 말씀에 신실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징벌하실 수 있다는 이론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통을 당한 이웃이 있을 때는 일단 침묵으로 위로해야 합니다.
성경을 볼 때 보통 이렇게 큰 고통을 당하면 본문 자체가 설명을 해줍니다. ‘누구누구가 말씀을 따르지 않아서 심판 받았더라’ 이런 식인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면 선지자를 등장시켜서 하나님 말씀 안 들으니까 이렇게 됐다고 질책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분명히 이건 언약에 근거한 심판인데 심판이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13절에는 나오미 스스로도 이게 하나님으로 인한 심판이라고 인지하는데 룻기의 성경 기자가 이걸 심판이라고 설명을 해주지 않습니다. 10년간의 엄청난 고난들을 나열하는데 그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징벌을 받았을지언정 일단은 주변에서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가르치는 것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침묵이 최선의 위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이 사건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되 특별한 해석을 하진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룻기 전체의 교훈과 맞아떨어집니다. 룻기 전체 교훈이 언약을 벗어나 상실한 사람을 위로하시고 다시 채워주시며 메시아를 보내주시는 것이지 않습니까? 사사시대에 고통당하고 징벌 받는 백성들을 메시아의 소망으로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본문이 심판 받는 나오미 가정을 본문이 섣불리 정죄하지 않는 것이 딱 들어맞습니다.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어떻게 할 지 알려줍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고통당하는 자가 있으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 딱딱 들어맞는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 위로하고 손 잡아주며 옆 자리를 채워주는 것이 더 나은 해답임을 본문이 알려줍니다.
현실적으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한테 심판 받아서 어려움 당한 것이 맞는지 아닌지 바로 판단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때문에 침묵은 위로와 동시에 신중함을 제공합니다.
(적용) 우리는 늘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해야 속이 시원합니다. 수학문제를 공식에 대입하면 풀 듯이 그렇게 세상을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나에 대해서 뿐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만약에 누군가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자의적인 신앙적 판단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켜 충고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렇게 하지 마라 합니다. 침묵하라고 합니다. 설령 내 이웃이 언약에 신실하게 살지 않아서 하나님께 심판 받는다 할지라도 섣부른 가르침을 주거나 설익은 해석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고난당한 이웃이 하나님의 뜻을 만날 때까지 옆 자리를 지켜줘야 합니다. 이럴 때는 침묵이 최고의 선지자입니다.
3-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자를 회복시키신다.
(설명) 마지막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자를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당하는 이웃에 대해 판단하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지 못한 사람을 징벌하시더라도 우리가 거기에 함부로 판단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결국 그 사람을 회복시키시기 때문입니다.
나오미가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두 며느리만 남았습니다. 이런 상황에 나오미가 한 가지 소식을 듣게 됩니다. 본문 6절에 보면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자기 백성’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알릴 때에도 자기 백성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그분의 백성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백성이 언약에 신실하지 못해서 자기 백성을 징벌하실지언정 버리지 않으시고 징벌하시더라도 다시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의 고향이 유대 베들레헴이었는데, 이 베들레헴의 뜻은 떡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징벌로 떡의 집에 양식이 없어서 모압 땅으로 왔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 떡의 집에 다시 양식을 주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징벌하셨지만 이제는 돌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백성을 외면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양식을 주셔서 돌보신다는 이 소문은 나오미에게 복음입니다. 남편과 자식을 잃었습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고대근동 상황에 친인척도 없는 외딴 곳에 사는데 집에 남자가 없으면 먹고 살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 양식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야기는 나오미에게 복음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나오미는 이 복음에 반응해서 두 며느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상실과 고통으로 무력한 우리 삶에 복음이라는 수단으로 찾아와 주시고 회복케 하는 분입니다.
(증명)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나오미를 돌보셔서 복음을 통해 나오미를 돌아오게 하는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십니다. 나오미가 들은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셔서 돌본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복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베들레헴, 떡의 집에서 태어나신 분을 알고 있습니다. 떡의 집에서 태어나신 그분은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증언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 주셔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양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도 나오미처럼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철저한 죄인으로서 하나님에 대해 저항하고 반항하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오미에게 은혜 베푸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양식의 복음을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를 참된 양식이 있는 베들레헴으로 초청하셨습니다. 지금은 교회가 베들레헴의 역할을 합니다. 교회가 떡의 집이 되어 영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제공합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피와 살을 성찬으로 제공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통해 세상에서 상실을 경험한 자기 백성의 굶주림을 채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고통당하는 자를 회복케 하십니다.
결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이 시대는 사사 시대와 같습니다. 하나님 없이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합니다. 세상은 그걸 자유라고 말하고 신념이라 말하고 소신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자유와 신념과 소신을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소견일 뿐입니다. 그 소견에 충실하면 상실과 고통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 상실과 고통은 때론 방황하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안내하는 표지판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고통 당하는 자들의 옆자리를 지켜주고 침묵으로 위로하며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고통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잔소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영적으로 굶주리는 이들에게 참된 회복 되시는, 참된 양식 되시는 분을 소개하면 됩니다. 참된 떡집인 교회로 그들을 인도하면 됩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고통당하는 자를 교회를 통해 돌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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