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고난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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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래서 인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분이신 아버지께 속합니다. 그러하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2:10-11, NKSV)

A. 서론 – 인사, 간단한 주제,배경 설명

(축복합니다. 예,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이 창궐하는 코로나를 뚫고, 이 예배의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한 요즘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히브리서의 말씀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관한 주제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함께 나눠보려합니다.)
믿는자든 믿지 않는자이던간에,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면서 고난이 없는 사람은 없겠지요, 다 저마다 제각기 삶의 애환이란 것이 있을 것입니다. 부한자던, 가난한 자이던 상관없이 말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 즉 그리스도인들은 그럼 이러한 ‘고난’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어떻게 대처해나갈 수 있는지, 그 고난 앞에서 우리는 실제적으로 어떤 유익과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나눠보려합니다.
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히브리서는 (앞에 ppt.) “To the Hebrew”, 즉 히브리인들, 유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말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도 그러하고 2:1절의 말씀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혼자만 읽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바를 더욱 굳게 간직하여,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일이 없어야 마땅하겠습니다.” (히브리서 2:1, NKSV)
“들은 바를 더욱 굳게 간직하여..”라는 문장으로 보아 그들은 단순한 유대인이 아닌 유대인들 중에 과거에 복음을 들은 자들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꼭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이 대상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절 즉, 초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함께 어우려져 있는 이방인들을 포함해서 이 편지가 전해졌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그러하듯이, 오늘날 우리 또한 역시 이 편지를 통해 사도의 권면과 교훈을 똑 같이 얻고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A –1. 배경설명과 문학적 해석

자 그런데 오늘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서 이 히브리서만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인 특징 하나를 좀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신약의 복음서를 비롯한 모든 문서들이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도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서술하는 방식에 있어서 ’비교와 대조‘라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로 1장1절에서 2절까지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읽는다)
하나님께서 (a)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b)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a)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b)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을 지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2, NKSV)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밑줄친 것을 잘 보시면, 첫 번째로 옛날에 예언자들을 통하여와, 이 마지막 날에 아들을 통하여, 이렇게 대조되었고, 둘 째로는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와 같이 비교와 대조의 방식으로 예수님의 단순한 탁월함이 아닌 “우월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1장부터 9장에 이르기까지 매 장마다 이러한 대조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표현합니다, 1장에서 2장까지는 그리스도를 천사와 비교하시고, 3장부터 4장까지는 그리스도가 모세보다 뛰어나다 하시고, 바로 4장부터 최종적 권면인 10장전까지 바로 이전에 다른 모든 제사, 제사장들보다 뛰어난 영원한 대제사장이 계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 여러분 무엇인가를 비교 대조하려면 양쪽을 다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특징을 보아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유대인을 너무나 잘아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믿었던 율법과 그들이 행했던 제사 문화 등 그 모든 것을 잘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즉 그 자신도 유대인이 었을 가능성이 크다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누구냐는 것은 아직까지도 다양한 논쟁들이 있는데, 바울이다, 머 아볼로다, 바나바다, 오늘날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누구이냐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히브리서가 옛 초대교회의 사도들로부터 인용이 되었고, 지금 우리의 성경에 이렇게 정경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게 주신 율법과 언약 성전, 그리고 오늘날 예배와도 같은 당시의 제사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었고, 그 유대인들이 믿었던 그 옛것이 예수님께서 이땅에 성육신 하시어 온 이후로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지, 아니 그 옛것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복음을 통해 깨닫게 된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임이 틀림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통틀어서 히브리서의 거시적인 주제가 결론적으로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바로 과거의 위대한 지도자들, 인물들, 제도들 보다 탁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서가 전해지는 이 당시에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모여서 ‘시편’을 읽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시편’을 가장 많이 인용했습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라 표현한 이유는, 이 당시는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대도 지나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께 세우신 사도들,즉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해들은 2세대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를 속사도, 후기 사도시대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히브리서의 핵심 인용 구절인 시편 110편 4절은 신약성경의 그 어느 곳에서도 논한적이 없는 구절입니다. 함께 히브리서 5:6절과 시편 110편 4절을 나란히 읽어봅시다.(함께 읽는다)
또 다른 곳에서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임명받은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6, NKSV)
주님께서 맹세하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셨으니, 그 뜻을 바꾸지 않으실 것입니다. (시편 110:4, NKSV)
멜기세댁이란 인물은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주변 이방 나라의 공격을 받고 포로로 끌려간 조카 롯을 구하러 나간 전쟁터에서의 승리 후 돌아오는 길에 십분의 일을 준 왕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멜기세덱입니다. 성경에서 이 멜기세덱을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이라 증언합니다. 그는 왕이요, 동시에 그 지역의 제사장 역할을 수행한 사람임을 말합니다. (본문 함께 읽는다)
그 때에 살렘 왕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그는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천지의 주재, 가장 높으신 하나님,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아브람은 들으시오. 그대는, 원수들을 그대의 손에 넘겨 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 아브람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창세기 14:18–20, NKSV)
멜기세댁의 문자적인 이름은 바로 “의의 왕”이란 “평강의 왕”을 말합니다. 즉 당시 그 시절(창세기)의 온갖 미신과 수많은 부패로 가득찬 나라에서 하나님을 온전하게 예배했던 왕, 이 순결함과 탁월함을 지닌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댁의 계보를 따라, 즉 흠이 없는 선지자의 예로서,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흠없는 제사장이 되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효과, 효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라고 히브리서 기자가 신학적으로 해석하여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멜기세댁과 예수 그리스도의 비교를 통해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 히브리서만이 예수님을, “대제사장”의 직분으로써 소개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아브라함과 멜기세댁을 모를 수 없기 때문이기에, 이러한 예시를 통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히브리서의 배경이 되겠습니다. (잘 따라오고 계신가요? 어려우신가요? 자 이제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B. 본론 – 문제제기

B – 1.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정황속에 나타난 문제들

그런데 히브리서는 5:6절을 말하고 나서 11절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듣는 자들을 히브리서 기자가 갑자기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 11절에서 13절까지 말씀을 읽어봅시다.(함께 읽는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할 말이 많이 있지만, 여러분의 귀가 둔해진 까닭에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10)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이미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들에게서 배워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물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젖을 먹고서 사는 이는 아직 어린아이이므로, 올바른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5:11-13, NKSV)
10절에 “귀가 둔해진”이라는 것은 곧 ‘느린, 둔해진 상태가 되다’ 신뢰할만한 영어 직역 번역본의 번역으로는 “you have become dull” 쉽게 말해 덜떨어진 상태가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어성경 NIV성경은 이 구절을 “no longer try to understand”이라 번역하였는데, 즉 ‘더이상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ppt만 소개)
11절에 “시간으로 보면” 개역개정 역본으로 보면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즉 오랜 시간이 되었는데, 아직도 초보적인 상태에 있다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해보자면, “너희들은 유대인으로써, 이 멜기세댁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이미 복음 안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했는데,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올바른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이고, 어린아이와 같이 젖이나 먹어야 하는 상태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권면하기를 6장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놓고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라고 말합니다.
(흔히들 하나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로 투덜거립니다. “말씀이 어려워서, 이해하기가 어려워요..”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단언코 말씀드리고자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열린 마음으로 곰곰이 묵상하고 생각하다보면, 오히려 쉽습니다. 그렇게 달콤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억지스러운 태도는 사실 우리 안에 이 죄성이 기본적으로 숨겨져 있는데, 그것은 곧 ‘말씀, 진리에 대한 반감’을 가지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귀찮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곤고함과 절망가운데 있고 깊은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를 소생시키고 회복에 이르게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과연 말씀이 어렵게만 느껴질까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그 말씀을 통해 내가 살려고 몸부림을 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지 못한 이유는 사실 우리안의 대수로움, 근거없는 여유, 안락함 가운데 찾아오는 ‘게으름’, 바로 추악한 죄성 때문입니다.)
또 사도는 이어서 무섭게 경고하기까지 합니다. 6장 4절부터 6절까지 읽어봅시다.(함께 읽는다)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맛본 사람들이 타락하면, 그들을 새롭게 해서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고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6:4-6, NKSV)
이 말씀의 요지는 “너희가 그런 사람들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게으른 자들로 살아가면 그렇게 될 수 있다라고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6장 9절말씀이 이를 증거합니다. (ppt만 소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말하지만, 여러분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더 좋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히브리서 6:9, NKSV)
사도는 이어 11절, 12절에서 “여러분 각 사람은 열성을 끝까지 나타내어, 소망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상속받는 사람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권면합니다. (ppt만 소개) 히6:11-12
히브리서 6:11–12 (NKRV)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가 하나 발견됩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적어도 게으른 자로 살아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한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닙니다. 바로 ‘공동체’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 공동체가 바로 “동일한 열정을 끝까지 유지하며, 함께 소망을 이루어가라”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았을 때, 분명 이 편지의 수신자들, 이 편지를 받는 공동체에게 신앙적인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분명히 “식었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정체해있는 상태입니다. ”왜 이들은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여전히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까요? 이제 무엇이 그렇게 그들을 변질되게 만들었을 까 생각해볼 수순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2절에서 34절 말씀에 힌트가 있습니다. 함께 읽어봅시다.(함께 읽는다)
여러분은 빛을 받은 뒤에, 고난의 싸움을 많이 견디어 낸 그 처음 시절을 되새기십시오. 여러분은 때로는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또한 자기 소유를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일을 기쁘게 당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0:32-34, NKSV)
“빛을 받은 후에, 즉 복음을 듣고 깨닫고 계몽된, 상태”를 말합니다. 고난의 싸움, “싸움”이란 말은 ‘경쟁하다, 분투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많이 견디어 낸”이란 말은 ‘용기를 가지고 마주하여 지속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사실 이 편지의 수신자들의 처음의 상태는 이렇게 고귀한 상태였습니다. 즉 과거에 이들은 “복음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을 믿음으로 분투하며 지속적으로 견디어 낸” 귀한 신앙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어 33,34절에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과 (기꺼이) 친구가 되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고, 때로 자기 소유를 빼앗기더라도 흔쾌히 더 영구한 소망을 바라보며 괘념치 않은 오히려 기쁘게 여기는, 위대한 신앙의 모습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그 처음, 즉 복음에 순수하게 반응하던, 순종하던 그들의 처음 시절을 기억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변질되었을까요? 이는 당시 정황을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처음 그 시절과는 다른 시험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10장:25절을 봅시다.(함께 읽는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히브리서 10:25, NKSV)
당시에는 분명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흔드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모임을 폐지하자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들이 순수했던 그들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앞의 구절 “그 날”이라는 것은 곧 그들의 종말론적 신앙을 말합니다. 이 초대교회의 정황속에서 종말론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순수성은 핍박과 박해의 시대속에서 더욱 빛이 났습니다. 복음이 확산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교회의 상태는 그 시대 전체가 ‘최후의 날’이라 불리어질 만한 시대적 정황이었습니다. 그 정황 속에서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느날 함께 예배하던 자들이 갑자기 순교하고 맙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핍박을 당하며, 신음하면서도 신앙고백을 멈추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들의 헤어질 때 인사가 무엇입니까? 바로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이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한 역사적 정황 속에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써 모여 주님을 기억하며 예배하십시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기를 고대합시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불경건하고 진중하지 못한 가벼운 종교인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육신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을 믿는 것이 어리석다라고 빈정거리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님의 재림을 믿었을 리가 없지요.
물론 우리는 종말론적 신앙을 이야기 할 때, 과거 한국교회에 일어났던 어느날 한 날 한시에 하늘로 올라간다는 ‘다미선교회’와 같이 이단적 종말론적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는 건전하고 바른 종말론적 신앙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바로 하루를 천년과도 같이 충실하게 살면서도 언제나 이 땅의 삶 보다는 더 나은 본향, 즉 그리스도의 재림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삶을 말합니다. 여러분 혹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있습니까? 그럴 때 우리가 우리의 믿는 바를, 우리의 신앙고백이 달라져서야 되겠습니까? 과연 그것이 참 신앙이겠습니까? 우리가 세상 가운데 살아갈 때,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거짓과 속임수 온갖 탐욕, 게으름 속에서 삶을 살아가며, 어느날 믿지 않는 자들에게 “어머나, 너도 교회나가니?” 라고 비아냥 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정직과 성실로 세상 가운데 분투하며 오히려 “네게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네가 믿는 신이 무엇이냐”라고 들어야 하겠습니까? (편의점 알바 간증, 아 왠지 교회다닐 것 같았어)
한 저명한 교회역사가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삶을 이렇게 한 마디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냥 착한 삶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진실되게 순종했습니다. 말씀 그대로 살았습니다. 때리면 맞았고, 달라면 주었고, 신앙고백을 포기못해 기꺼이 순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그냥 “착한 삶”입니다. 단순한 “제사만을 위한 관념적이고 이중적인 삶이 아니라” 신앙고백이 삶과 일치했습니다.’ 그게 초대교회의 순수성이요 그들의 삶입니다. 누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가볍게 외치는 것을 보면 개인적으로 참 안타깝습니다. 막 부흥집회를 시끌벅쩍 하며, 구호를 외친다고 돌아갈 수 있습니까? 공동체적 시스템을 바꾼다고 우리가 초대교회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삶에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순수성은 고난과 핍박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자 조금 돌아온 것 같은데, 10:25절에서 예전 그 시절을 기억하라 라는것을 보아
적어도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적어도 “유혈낭자” 즉 목숨을 위태롭게 할만큼의 핍박의 시기를 보내는 상황은 이미 오래전에 지난 것 같은 암시를 줍니다. 저명한 역사신학자이자 성경신학자인 F.F 브루스는 그들의 정황을 이렇게 소개합니다.(ppt만 소개)
“히브리서의 목적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는 견해 중 하나는 그것이 로마 기독교의 유행하는 추세에 동조하지 않았던 로마에 있는 ‘가정 교회’나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회당을 위해 기록된 것으로 본다.” - f.f 브루스 신약사 중 -
이 견해로 비추어 보아, 당시 기독교 진영에는 바울과 같은 순수한 복음 전도자들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참 기독교라 할 수 없는 “옛 종교”가 혼재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 종교란 유대교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에 그 ‘복음’편에 선다라는 것은 곧 위험하고 불확실한 인생의 길로 접어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교는 로마법의 보호를 받고 있었고 이에 상대적으로 그 당시 순수한 복음을 따르던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물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핍박의 시대는 지나갔으나, 여전히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재산과 신분의 손실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점차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그들은 그 친밀한 옛 환경, 옛 종교로 방향을 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즉 순수한 기독교 공동체에서 점차 이탈해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나 명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며 ‘신앙고백’을 부정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을 “배교”라고 합니다. 즉 교회를 배신하여 떠나간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 가운데 히브리서 기자는 “옛 집착을 끊어 버리고 앞에 있는 상급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미지의 것, 믿음의 삶.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던, 아브라함이 택한 길”을 걸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들의 상황속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적어도 목숨이 위태롭거나, 핍박을 당하는 경우는 드문 상황입니다. 적어도 이 대한민국에서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날 우리 시대 역시 이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의 정황과 어쩌면 더욱이 비슷한 상황에 있을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내적인 고민, 다 말할 수 없는 은밀한 죄와의 싸움들, 불안한 사회적 정황속에, 더디고 막연하기만 청년의 시기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언제 믿음에 있어서 흔들리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약속, 응답이 늦어지는 경우에 우리 모두는 사실 낙심하기 쉬운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고난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 즉 낙담의 시간들이 많아 질수록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저라고 예외이겠습니까? 마치 히브리서의 그들처럼 말입니다.
(저 역시 20대 후반 뜨겁게 주님을 영접하고 여자 보기를 돌같이 여기던, 오직 주님 밖에 보이지 않던 청년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기도가 하고 싶어서 그 좋아하고 의지했던 술을 끊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양심의 가책이 되어, 수련회를 연달아 가며 담배를 끊고, 말씀을 듣다보니, 남자라면 누구나 쉽게 볼 법한 야동이 큰 음란죄임을 깨닫고, CD를 불태우고, 파일을 포맷하며 하나님 앞에 성결하게 다시 서려했던 몸부림들, 교회의 다양한 필요앞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헌신했고, 실력이 없어도 쥐어짜내서라도 감당했던 사역들..아웃리치 기획, 전도여행 등, 반주 사역들, 다양한 영적 체험들, 말씀이 너무 좋아서 말씀 카드로 연습실을 도배했던 시절들, 등) 그 풍성하고 깊은 신앙생활도, 취업이 안되고, 결혼도 안되고, 막연하기만 한 삶 가운데 낙망하고 좌절이 됨으로, 점차 점차 그 신앙이 힘을 잃어가는 것을 개인적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배의 감격이 사라지고, 의무적인 교회 봉사, 영적 무기력과 기도의 삶에서의 이탈 등을 경험함으로써, 점차 점차 믿음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리를 결정적으로 흔드는 무엇인가에 휩싸이게 됩니다. 바로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그 시절에 경멸했던 것들, 하찮게 보이던 것들이 그럴듯하고 좋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왜 저것들을 갖지 못하는가..” 알 수 없는 열등감에 빠지고, 계속되기만 하는 실패 가운데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할까요?

B – 2. 해결책1.

:: 시험이 당연한 이유는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1. 그 첫번째로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난과 시험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오늘 주제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함께)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분이신 아버지께 속합니다. 그러하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2:10-11, NKSV)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온 세계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그 영광 가운데 당신의 자녀들을 이끌어 들이실 창조주가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1절에서 구원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그 구원에 참여하는 우리가 함께 하나님 안에 속해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동일한 지체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의 끈으로 하나님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겪는 것이 곧 하나님이 겪는 것이요 하나님이 겪는 모든 것이 바로 내가 겪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당하는 고난은 바로 이미 예수님이 함께 당하시는 고난이신 사실이 분명합니다. 요한복음 17:21절을 함께 읽어봅시다.(함께)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복음 17:21, NKSV)
예수님의 놀라운 기도를 보십시오.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를 그렇게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강력한 위로요 지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형제자매로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가족의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바로 고난도 슬픔도 함께 당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음을 깨닳아야 합니다. 즉 끊임없이 복음을 다시 듣고 상기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에서 1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함께)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히브리서 2:14-15, NKSV)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피와 살을 가지셨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육신, 인성을 지니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셔야만 했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죽음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의 저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죽음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면 그 죽음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믿는 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더불어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진정 믿습니까? 여기서 또 한부분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성질과 조건을 나누어 갖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이 우리처럼 혈과 육을 지니신 것의의 의미인 것입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과 공유된 상태인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함으로써, 죄의 결과인 죽음의 문제,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고, 그 죽음의 공포 가운데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마귀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8장 44절의 말씀대로,(ppt만 소개)
“그는 진리 편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8:44, NKSV)
바로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이용하여 우리를 죄책감과 두려움 가운데 괴롭게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해결되지 못할 문제는 없고, 그 어떤 죄악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서 1장 18절을 읽어봅시다(함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이사야 1:18, NKSV)
그 아무리 큰 죄악을 저지른 죄인이라 할지라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으십니다.

B – 2. 해결책2.

:: 앞선 경험자들의 삶을 본보기 삼으라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이 듭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의 현실과 어쩐지 동떨어져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푸쉬하기 위하여,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흔히 히브리서 11장을 ‘믿음 장’이라 부릅니다. 다함께 11장 1-2절을 읽어봅시다.(함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1-2, NKSV)
바라는 것들 확신, 이 확신이라는 말은 원어적으로 “보증”이라는 뜻을 지니는데,믿음이란, 바라는 자들, 즉 소망하는 자들이 그 위에 서 있는 기초이다“ 라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소망을 가진 사람은 바로 이 ‘믿음’에 기초를 두고 살아야 한다.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믿음이 바로 보증한다.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믿음이 보증한다라고 개인적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 예로 이 믿음의 위대한 선배들을 11장에 쭈욱 나열하고 있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결론적으로 11장 13절만 보면 (ppt)이 사람들이 다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으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다는 것입니다. (13절)
나그네란 말은 그들이 더 나은 본향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14절)
11장을 한번 찬찬히 나중에 읽어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고난의 삶을 살면서도 믿음을 포기 않았는지 말입니다. 칼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떠돌며,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니면서도, 그들은 이 땅에서는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보다 더 열약한 환경, 삶의 정황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지킨 신앙의 위대한 선배들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그들에 비하면 우리의 삶의 정황은 사실 더 낳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신앙이 식어버린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결론적으로 지적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12장 4절, 5절 말씀을 읽어봅시다.(함께 읽는다)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또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자녀에게 말하듯이 하신 이 권면을 잊었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라.“ (히브리서 12:4-5, NKSV)
사도가 말하는 죄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진리에서 멀어져가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예배자의 자리에서 멀어지고, 세상의 화려함을 사랑하고, 그것을 맞추어지고 길들여진 삶을 살아가며 성경이 말하는 진리에 무관심하며, 음란하고 제멋대로이며, 논쟁하기를 좋아하고,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사실 방탕하고 게으른 삶을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을 말합니다. 싸우긴 싸우나, 이것들과 피흘리까지 싸우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들과 치열하게 싸우라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언제나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완고함과 우리 육체에 잔존하는 죄성으로 인해 수없이 넘어지고 반역적인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살아가는 가운데 나타나는 모든 고난, 즉 고통은 바로 하나님의 ‘시험’ test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5절의 주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 하실 때 이 ‘징계’란 헬라어 ‘파이데이아스’라는 단어인데,(ppt) 이것은 “훈련”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즉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을 개선하는 과정의 일부로서 부과하는 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지람을 들을 때 낙심하지 말라 하십니다. 왜입니까?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신앙을 더욱 더 성숙의 길로 인도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꾸지람, 하나님의 뜻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고난을 바라볼 때 이것이 결국 우리에게 유익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11절의 말씀대로, “나중에는 이것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에게 정의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ppt)

C. 결론

:: 고난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이 모든 것을 통한 고난의 정체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부과하시는 훈련입니다. 더 낳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해결책입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바라보는 관점인 것입니다.
주님을 이 땅 가운데 머리둘 곳 없는 고난의 삶을 사셨다면 그 삶을 나누어 가질 수 밖에 없는 우리 역시 이 땅에서의 고난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고난을 대하는 태도여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삶이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그냥 ‘올 것이 왔다’라고 당연시 하십시오. 앞서 우리는 오늘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의 삶을 살았다가 이렇게 배교의 길을 걷게 되는지에 대해 질문해보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당연한 고난을 피하고 회피하며, 다시금 세상의 방법으로 기웃거리며 결국 흘러 떠내려 갔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믿음에서 멀어져 아예 배교의 길, 즉 주님을 배신하는 길로 떠났거나, 그 직전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ppt)
“히브리서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갖 고난으로 단련되고 그들의 온 생애가 십자가의 생애가 된다는 것이다.”
“또 경건한 마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가 우리 자신을 위한 교사요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믿으며,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전부를 그를 믿는 믿음에 드린다.
한번 더 강조하겠습니다. “우리의 온 생애가 십자가의 생애라는 것을”, “우리 자신의 전부를 그를 믿는 믿음에 드려야 함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좁은 길로 가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세상이 나를 어찌해도, 내가 때로 무능해도, 실패해도, 그냥 괜찮습니다. 원래 우리의 인생이 십자가 지워진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함으로 그 주님과 동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어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내 고통 바로 주님의 고통, 주님의 고난 바로 나의 고난, 주님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요, 그분의 영광스러운 삶이 바로 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의 전부를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그분께 드려지는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죄가 많고 께끗하지 못하며, 삶의 많은 문제들과 모순들 속에 있을 지라도 그 해결책을 다른 먼 곳에서 찾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 안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보증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멘입니까? 고린도후서 1:22절과 에베소서 1:14절을 함께 읽어봅시다.(함께)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자기의 것이라는 표로 인을 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2, NKSV)
이 성령은,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을 때까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1:14, NKSV)
그분께서 우리 안에 친히 새겨주신 것은 결코 지워질 수 없습니다. 성령은 여전히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탄식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억지스러운 종교적 의무를 원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상한 마음의 제사, 진심어린 고백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성령님의 일하심을 겸손하게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유일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성령의 탄식을 느끼는 것뿐입니다. 다시요, 그 성령의 탄식을 민감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로마서 8:26절을 다함께 읽어봅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여러분 이 구절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이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단순한 한숨과 같은 탄식이 아닙니다. 울다, 신음하다, 비참한 부르짖음이라는 원어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울부짖음으로 신음하고 계십니다.
제가 힘들 때마다 부르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 하십니까..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그리고 여기서 조금 더 힘이 들 때, 정말 입이 떨어지지 않을 때, 기도하고 싶어도 너무 낙심이 되고 절망 가운데 기도할 수 없을 때 예배당에 마지못해 털석 주저 않아있을 때, 담임목사님이 강단에서 이 찬양을 부르시면 그저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때가 있었습니다..“좋으신..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제가 어느날 그 은혜를 입은 거에요..“아 내가 생각보다 괜찮구나, 그리고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구나, 버틸만 하구나, 모든 것이 망가져도 나는 소망이 있구나..왜? 비록 나는 소망없지만,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 이시기에..결국 그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룰것이 분명하기에..” 아멘입니까?
여러분 그냥 삽시다. 기도하면서.., 그저 묵묵히 믿음으로 인내하며 삽시다. 하나님께 우리 전부를 드리는 믿음안에서 다시 한 걸음을 떼는 것입니다. 아무리 더딘 걸음이라도, 그냥 한 걸음을 떼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지금 이 순간에 이 자리에서 성령의 깊은 탄식을 느끼며, 믿음의 한 걸음을 떼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찬송 : 성령이 오셨네, 허무한 시절 지날 때, 깊은 한숨 내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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