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선택

요한복음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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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택(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자)

[서론]
과거 저의 참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여러분의 신앙에 도움이 될거 같아 소개하도록 했습니다.
제가 직장을 다녔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 어렵게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잘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때문인지 직장 상사들 눈치를 많이 봤습니다.
대학생때는 식기도를 길게 하는 편이었는데 회사다니면서 어느 순간 짧아졌습니다.
눈 한번 감고 끝,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자 눈도 안 감고 한 곳을 집중해서 쳐다보고 속으로 짧게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앞에 부장님이 계시는데 식기도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술자리에서도 저 술 안 먹습니다.
이렇게 대놓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술 안드시는 여자 과장님 옆에 붙어서 술 안 먹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노래방에 가면 부장님이 따라주시는 맥주는 몰래 몰래 테이블 밑 쓰레기통에 버리곤 했습니다.
모두 취해 있고 그곳이 어두워서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뒷통수를 한 대 크게 얻어맞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날은 이상하게 부장님과 둘이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요.
부장님이 식기도를 안하는 것처럼 보이는 저를 보고 ‘너 교회다닌다며 왜 기도하지 않니?’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제 이력서를 다 보셨기때문에 제가 교회다니는 지 잘 알고 계셨던 것이죠.
그 때 저는 부장님의 한마디가 마치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때 정말 크게 회개했습니다.
웃기는 건 알고보니 부장님은 교회 집사셨는데 자기는 식기도도 안하면서 저한테 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날나리 신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이 제게 경고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때 깨달았습니다.
내가 대학교때 가졌던 신앙은 그냥 머리로 배운 신앙이었구나.
삶의 두려움 앞에 저의 신앙은 마치 두려워 구석에 박혀있는 강아지처럼 움츠려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 직장인들의 삶이 저랑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직장에서의 삶은 전쟁입니다.
그럼 교회에 오면 마음이 평안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속에서 무기력했던 나의 믿음에 대한 죄책감이 괴롭히곤 합니다.
그래서 금요 찬양예배 시간에 사회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같이 찬양하자고 하면 짜증이 나죠.
일어나기 싫거든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시달리다 겨우 교회왔는데 일어날 힘이 없는 것입니다.
아, 신앙이 뭐지? 믿음이 뭐지?
이렇게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시간을 거치게 됩니다.
과연 이 험난한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본론]
요한복음은 21장까지 있는데 크게 1장부터 12장 까지를 표적의 책이라고 부르고, 13-20장 까지를 영광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맨 앞과 맨 뒤에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1-12장까지인 표적의 책 결론 부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서 7가지의 표적을 통해 자신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세가지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반응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입니다.
37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표징을 그들 앞에 행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아니하였다.
이게 표적의 책 요한복음 12장까지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저자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불신앙을 수백년전 예언자 이사야가 예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38절입니다.
그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말이 이루어졌다. "주님,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주님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이것은 이사야서 53장 1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곳을 읽어보면 그들이 기다리고 기대하던 메시아가 아니라서 그들은 메시아를 거부하고 핍박했습니다.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을 이사야 예언자는 수백년 전에 예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 '우리가 전한 것'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주님의 팔'이란 예수님의 힘과 능력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능력의 기적들을 통해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여주셨는데도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났는데도 왜 믿지 않을까요?
우리 같으면 믿을 거 같지 않습니까?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죽어가던 왕의 신하의 아이를 고치시고, 38년된 중풍병자를 낫게 하시고, 다섯개의 빵과 물고기 두마리로 5000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시고,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들중 추려서 7개만 소개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7개의 기적들을 표적, 영어로 싸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뭔가 가리키는 실체, 목적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실체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이 정도 표적이라면 단순한 마술이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사아라고 믿어야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이걸 직접 보거나 들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떨꺼 같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40절이 그 답을 말해줍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나에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건 이사야 6장 10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의 영적인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무디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책임이 누구한테 있나요?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믿지 못하게 깨닫지 못하게 해놓구선 그 사람을 심판한다면 이건 너무 가혹한 일 아닐까요?
그러나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기회를 많이 주셨는데도 계속 거부할 경우는 주님이 이렇게 심판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기회를 무수히 줬는데 돌이키지 않고 거부하니까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무디게 해서 심판받게 끔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보시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광야에서 여러가지 기적을 보여주시며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광야에서 가나안 땅이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며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 버리고 그 땅의 우상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더 풍요로워지고,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한 그들의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 민족들을 채찍처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혼내주시며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 경고하고 또 경고 하셨는데도 그들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바닥이 날 정도로 그들은 고집스러웠고, 강팍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한 유대인의 고집스러움과 강팍함이 예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무디고 강팍한 마음이 계속되면 하나님은 그들을 망하게 내버려두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28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타락한 마음 자리에 내버려 두셔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하도록 놓아 두셨습니다.'
고집스럽게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부하면 그들을 그냥 방치, 유기 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진짜 사랑하신다면 그냥 억지로 믿게 하시면 안되나요?'
그런데 이 질문 자체가 모순입니다.
사랑은 쌍방의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진짜 사랑이 되는 것이지, 어느 한쪽이라도 강압적인 강요를 한다면 진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자발적으로 반응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선택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나같은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나라고 깨닫게 되면 내 믿음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믿음으로 반응하도록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제 주위에도 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여전히 믿지 않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많이 무뎌져 있습니다.
저는 혹시라도 기회가 없을까봐 걱정되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거든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냥 가야 하거든요.
하나님은 기회를 계속 주시지만 계속 거부하면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유기, 방치, 그게 가장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내버려두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또한 자녀를 내버려둘 수 밖에 없는 부모의 슬픔은 오죽 하겠습니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래도 나는 믿음을 가져서 다행이다.
이런 마음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반응은 우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첫번째 반응이 믿지 않는 불신이었다면, 두번째 반응은 온전하지 못한 믿음입니다.
42절입니다.
지도자 가운데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으나,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 때문에,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표적들을 보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두려워서 그 믿음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유대교에서 출교시키기로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교라는 울타리 안에 모두 들어가 있었습니다.
종교사회다보니 유대교는 종교이자 문화이며,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그 유대교를 떠난다는 것은 그냥 그 사회에서 퇴출당하는 것과 다름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모든 기득권들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만 하면 다행이지만 더 나아가 차별과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두려워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세상에 드러내지는 못한 것입니다.
2장에 나온 율법학자 '니고데모'를 보십시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한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9장에 나온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던 사람의 부모를 보십시오.
그 부모도 예수님이 자기 자식을 고쳐준 것을 알았지만 유대교에서 출교당할까봐 두려워 그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43절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였다.
우리같으면 좀 이해해줄만도 하잖아요.
꼭 내 믿음을 드러내지 않아도 믿는 건 똑같은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런 모습에 대해 타협하지 않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저는 직장다닐 때 이런 믿음이었던 것만 같아 참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내 생각보다 견고하지 못하다는 것을 세상 살다보면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가진게 없으면 조금 가진 것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고, 내가 가진게 많으면 지금까지 가진 것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합니다.
우리 삶에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이 시소에 놓여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할 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지 선택지가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진짜 우리가 꺼내야 할 무기가 바로 믿음입니다.
여기에 세번째 반응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으로 걸어가는 제자의 길입니다.
믿음이 필요한 이유는 그 길이 많은 사람들이 가는 큰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길은 좁고 거친 길입니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것,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과 가깝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길이 넓은 길처럼 보이니까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죽음으로가는 길일 뿐입니다.
터키에 가면 데린쿠유라는 과거 지하도시가 있습니다.
제가 거기 갔을 때 얼마나 놀란지 모릅니다.
로마 카타콤보다 훨씬 놀랐습니다.
그 곳을 들어가는 입구는 너무 좁은데 들어가니 지하 8층이 넘는 놀라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마 시절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지하동굴을 파서 그곳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2-3만명이 살았는데, 1-2년 산 게 아니라 몇십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햇볕을 못보다보니 허리가 굽고,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짐승도 데리고 왔는데 햇볕을 못보니 짐승들이 날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짐승들에게 술을 먹여서 진정시키곤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좁은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냥 믿음을 마음 속으로만 지키고, 드러내지 않으면 지하 도시에 들어갈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람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전 80,90년대 우리나라 경제가 급성장할 때 한국 교회도 가장 많이 양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 때 많은 목사님들은 예수님 믿으면 무조건 잘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예수님 믿으면 구원도 받고, 부자도 되고, 몸도 건강해진다고 설교했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그렇게 믿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기복신앙'이라고 부릅니다.
미국에도 이런 것을 주장하는 목사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택하면 사람의 영광도 무조건 따라온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런 믿음을 온전한 믿음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단지, 얄팍한 자기 세뇌일 뿐이죠.
진정한 믿음으로 가는 길은 반드시 대가를 치룰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길을 가기 전에 얼마만큼의 비용을 치룰 지 계산해보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내 전부를 걸고서 라도 이 길을 갈 수 있는 지 고민해보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결론은 무엇이었나요?
예수님의 12제자 모두 순교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믿음의 대가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겁먹지는 마십시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믿음을 드러낸다고 해서 우리가 치뤄야할 대가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두려워서 믿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신앙때문에 직장 상사한테 찍혀 수년간 지방 근무만 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택할 지, 사람의 영광을 선택할 지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지, 사람을 기쁘게 할 지 결정해야 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어느때보다 더 주님은 오늘 말씀으로 우리를 도전하십니다.
어떤 믿음으로 살아갈 지 결정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기적을 보여줘, 그럼 믿을께'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적을 많이 경험한다 할지라도 믿음이 그냥 생기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믿었던 수많은 사람들도 나중에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앞장섭니다.
자신들이 원하던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메시아 예수님을 원하고 있습니까?
내가 원하는 기적을 행하는 메시아입니까?
아니면 나를 근본적으로 바꿔줄 메시아입니까?
예수님을 마음 속으로만 믿으며 믿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대가를 치루더라도 내 믿음대로 살아갈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의 영광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제자가 되길 원하십니까?
요한복음에 띄엄띄엄이지만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3장에서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7장에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맞서 예수님을 편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다가 19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난 후 다시 등장합니다.
그는 공공연히 큰 돈을 들여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매장합니다.
그의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져 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렇게 자라고 성숙해져가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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