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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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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8

예화) 처음에 성령사관학교 입학했을 때 더러워진 집의 모습들 - 아마 처음에는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적이 드문 그곳은 돌보지 않아도 제철에 온갖 꽃들이 교태를 부리던 화단은 이름 모를 풀들로 어수선했다. 거미들이 내 집 마련 걱정 없이 호강하고 있었고 마당에 잡풀들도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나무도 관리를 안해주어서 마치 담쟁이 넝쿨처럼 집 창문들을 가리고 있었다. 집 안에는 10마리 정도 되는 개들이 그 안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똥 싸고 난장판이 되었다. 이것이 인적이 끊긴 집의 풍경입니다.
하나님이 떠나신 인간의 풍경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마저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던, 그 얼마나 멋진 하나님의 형상들이었습니까?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다른 것들을 창조하실 때는 좋았다고 표현하시지만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심히 좋았다’라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고 싶어서 안달하셨고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피조물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독립을 선언하고 그분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은 폐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이라는 집에서 하나님이 떠나시자 가시와 엉겅퀴가 덮어 버렸고, 사람은 사람에게 원망과 질시와 견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유약하게 살기 싫다며, 참된 인간됨과 자유를 얻겠노라며 하나님을 버렸지만 인간은 매번 불안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종잡지 못했으며,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한 채 유리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두 손에 무언가를 가득 쥐고서도 허기지고 두려워 끊임없이 더 많은 자원을 위해 투쟁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들이 최고의 덕으로 여기는 ‘신으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을 실제로는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그 근원적인 불안을 해소하려고 돌과 나무와 해와 달과 별에게, 때로는 돈과 권력과 지위에게 신의 이름을 부여하고 기꺼이 그것들의 종이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인간의 풍경입니다. 바울은 이를 ‘영적인 죽음'으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1-3절 말씀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자, 이제 앞으로 요한복음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은 폐가가 된 인간이라는 집을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지으시는 것에 관한 책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주제는 ‘새 집 짓기'입니다. 단순한 보수공사가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지으시는 이야기입니다. 공사 감독은 하나님이시고, 기술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집을 짓는 일은 한순간에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집을 날마다 조금씩 새롭게 하시고, 관리하시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새 집 짓기를 신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새 창조'라고 부릅니다. 혹은 ‘새 성전 짓기'라고 명명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저버리자 눈물을 흘리며 성령을 거두셨던 하나님이 그럴 의무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다시 인간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돌아오셔서 자신이 거할 집 (인간)을 지으신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인간에게 다시 보기 좋았던 하나님의 형상을 돌려주신 역사를 기록한 책이 바로 요한복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요한복음 전체의 머리말인 1:1-18절은 새 집의 설계도 혹은 모델하우스와도 같습니다. 오늘 나누는 내용들이 앞으로 요한복음 21장까지 이끌고 가는 핵심 내용들입니다.
그럼, 요한복음을 들어가기 전에 요한복음의 저자가 누구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누구일까요? 바로 요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명인 요한입니다.
그리고 이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쓰여졌습니다.
요한복음의 목적은 요한복음 20:31절에 쓰여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Ἐ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 καὶ ὁ λόγος ἦν πρὸς τὸν θεόν, καὶ 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
The NET Bible: Greek Text (Dallas, TX: Biblical Studies Press, 2017), Jn 1:1.
여기서 살펴볼 것이 ‘로고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씀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계시니라’라고 표현됩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말씀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었다는 뜻도 된다 (Pros 전치사 용법)
이 말씀을 보면 생각나는 것이 창세기 1:1절 말씀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에는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주어가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 (logos)입니다.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를 차지한 로고스가 바로 요한복음 저자가 독자들에게 가장 간절하게 소개하고 싶어 한 대상인 것입니다.
구약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도 익숙한 개념이었고 그 당시 헬라 철학을 지배했던 플라톤 철학의 ‘로고스'용어를 빌려와서 진짜 로고스, 진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인지 요한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헬라에는 플라톤 철학이 있었습니다. 로고스는 플라톤 철학에서도 핵심 용어입니다. 그들에게 로고스란 ‘합리적인 생각과 그 생각의 외적 표현으로서의 말’을 뜻합니다. 그들은 로고스가 우주의 편만한 이치이며, 그 씨가 인간의 영혼 속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씨 때문에 인간이 우주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고, 우주의 이치를 터득하면 어떤 지식(γνοσίζ, 그노시스)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이 있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로고스는 그 지식을 얻는 수단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로고스를 지식적으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믿고, 순종할 때 참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이 로고스의 ‘내용’을 제공했다면, 헬라 철학은 ‘용어’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바탕을 둔 신학적 토착화 혹은 상황화의 예입니다.

이 로고스, 말씀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온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생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가능하게 됩니다.
창세기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6  By the word of the LORD the heavens were made,

and by the breath of his mouth all their host.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이사야 55장)
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빛이 있으라 명령하시면 어둠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ESV 버전에 보니까,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and the darkness has not overcome it”으로 해석한다.
“깨달았다"로 번역한 동사 ‘카텔라벤'은 “이겼다"로 번역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라는 빛을 끄려고 하는 헛된 시도를 반복했음을 미리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결코 끌 수 없다.
다음 요한복음 1:6-11절을 봅시다.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화) 누가복음 큐티 “눈은 몸의 등불이라"
영의 눈이 떠지지 않으면 주님을 볼 수가 없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 요한복음 1:12-13절 말씀입니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는 구약에서 나타난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 유비를 빌려온 것이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출애굽기 4장)
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13절을 현대인의 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핏줄이나 육체적 욕망이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된 것이다.”
이 당시에 이 말씀은 이방인에게 큰 은혜가 되었을 것입니다. 유대인 혈통만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화) 재벌 아이들이 주식 부자에 순위가 올라왔을 때 허탈감. 특권이 부럽다고 느꼈지만 내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 안다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특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마지막 요한복음 1:14-18절입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The Word became flesh” - 이 부분은 fully God, fully Man을 설명할 때 신학적으로 핵심이 되는 구절입니다. 신학적으로 유명한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 교리는 어느 교단에서도 공통적으로 우리가 고백하고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4: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왜 인간의 몸을 입으셨을까요? 히브리서가 이를 잘 설명해줍니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그렇게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표현합니다. 이를 원문에서 직역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거하시매'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 놓인 성막에 임할 때를 암시합니다.
출애굽기 40:3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은혜' (charis)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 단 세 번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1장에서 나타납니다 (14, 16, 17절). 성육하신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에 중심적인 것은 그분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권세를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 자녀로서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거듭난 자들에게는 이러한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그냥 은혜가 아니라 ‘Overflowing grace’가 있습니다.
요한복음만 보더라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계속 봅니다. 물로 포도주로 변화시키시고,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며, 베데스다 못에서 절름발이를 걷게 하십니다.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그리고 이 충만한 은혜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십자가에서 하이라이트를 찍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결론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을 보기 원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님을 보기 원하고 오늘 16절 말씀처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아 누리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신약에서는 조금 다른데 그것은 바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통해 예수님의 넘치는 은혜와 진리를 보고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그곳에 하나님의 성막을 치고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 오늘 그 분은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성령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바로 내가 가는 그곳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임하는 성막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많은 인물들, 다윗과 요셉과 다니엘과 같은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헤세드'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그 하나님의 헤세드가 오늘 로고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진리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의 영광을 보기 원합니다. 주의 영광이 이곳에 가득하기 원합니다. 같이 찬양하며 나아갑시다.
찬양: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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