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비결(1) - 기준을 분명히 세우라!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24 viewsNotes
Transcript
주제 1
주제 1
다윗 대 골리앗의 싸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입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너무도 자주 들어왔던 성경말씀이며, 특히 어린 자녀들에게 자주 읽어서 들려주면서 신앙교육하기에도 아주 유익한 본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런지 기준이 없는 가치관의 혼돈의 시대에, 어린 자녀들보다 어른들이 읽고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보십시오.거대한 “골리앗"처럼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며, 우리를 두려워 떨게 만드는 문제들 앞에서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흔들리고 있습니까? “골리앗"과 같이 엄청난 무기를 장착하고 이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고,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게 만들고,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오늘 이 밤에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고,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사는 비결을 얻고 돌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조선시대 장원급제를 한 정두경이라는 유학자는 전쟁에서 이기는 세 가지 필수 조건이 있다! 라고 말합니다.
첫째는, 무기입니다. 무기가 좋아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청동기 무기와 철기 무기가 싸우면 철기로 된 무기로 싸우는 쪽이 훨씬 유리합니다. 다음으로, 병사입니다. 아무리 무기가 좋아도 그 무기를 다루는 병사의 사기와 군기가 어떻냐에 따라 승패가 갈립니다. 정두경은 말합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요체는 장수에게 달려 있다.” “장수가 근본이고 병기는 말단”이라고 단언합니다. “아무리 좋은 병기가 있더라도 사람이 이를 버리고 달아난다면 모두 헛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기나 장비는 승리하는 데 필요한 요소지만 전부는 아니다.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 성패의 핵심이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휘관의 역할이고, 지휘관이 자신의 역량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쟁의 역사에서 이런 예들을 수없이 보게 됩니다. 영국군에 망해가던 프랑스를 다시 살린 것은 14 소녀 “잔 다르크"였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우리 나라를 승리로 이끈 것은 “신에게는 아직 열 두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13척으로 적군 133척을 무찌른 역사상 유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6.25 한국전쟁 때에는 북한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순식간에 밀로 내려와서, 낙동강 전선이 밀리면 남한 사람 모두 남해 바다에 빠져 물고기 밥이 될 위기였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이미 기울었습니다. 그런데 맥아더 장군, 매일 성경 한 장을 읽지 않고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던 그 맥아더 장군을 하나님이 보내셔서, 기가막힌 “인천상륙작전"을 펼침으로써 대한민국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전쟁에 패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은 남아있지 못했을 것을 생각하면 하나니의 오묘한 섭리가 얼마나 큰지,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전쟁을 이끄는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삼상 17장 본문에서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해 들어옵니다. 블레셋은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은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대치합니다.(삼상 17:1–2).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자 마자 바로 격돌을 하지 않고, 40일이나 싸움이 지연됩니다. 양 진영 사이에 골짜기가 있기 때문에 먼저 치고 들어오는 쪽이 불리하기 때문에 섣불리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바로 싸움이 붙었더라면, 전쟁은 블레셋에게 훨씬 유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 진영에서 ‘한 장수’(אִֽישׁ־הַבֵּנַיָם, 개역개정판은 ‘싸움을 돋우는 자’라고 번역함)가 나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입니다.(삼상 17:4). 특히 저자가 그를 ‘가드 사람’이라고 소개한 것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본 아낙 자손으로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남아 있는 거인족이었다는 것이다(민 13:22; 수 11:22). 그는 키가 여섯 규빗(45㎝×6=270㎝)이고, 몸에는 무게가 놋 오천 세겔(11.5g×5,000=57.5㎏)되는 갑옷을 입었고, 그의 창날은 철 육백 세겔(11.5g×600=6.9㎏)이었다(삼상 17:4–7).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도발합니다. “한 사람을 택하여 나에게 보내라 일대일로 싸워서 내가 죽으면 우리가 너희 종이 되고 너희 대표가 죽으면 너희가 우리 종이 되어라.” 이스라엘의 군대를 계속 모욕하면서 40일간 밤낮으로 계속해서 도발을 합니다.
심한 모욕을 당하지만, 이 도발에 응할 군인이 이스라엘에는 없습니다. 골리아의 무시무시한 엄포 앞에서 이스라엘 군사들은 그저 벌벌 떨기만 합니다. 누구도 그 앞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아버지의 이새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찾아왔던 다윗이 이 상황을 보게 됩니다. 그래, 다윗은 사울 왕을 찾아가 청원합니다. “제가 나가 싸우겠습니다” 전쟁 경험도 없고, 무기도 잘 다루지 못하는 새파란 청년 다윗이 저 무시무시한 적장 “골리앗"과 나서 싸우겠다고 하니, 사울이 보기에 얼마나 무모해 보였겠습니까? “너는 소년이요 골리앗은 어려서부터 용사인데, 너는 골리앗과 싸울 수 없다!” 그렇지만 다윗는 말합니다. 삼상 17:37 “...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해서 다윗 대 골리앗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다윗은 손에 막대기를 들고 물맷돌 5개를 목자가 차고 다니는 주머니에 넣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갑니다. 물맷돌은 크기가 여러 종류인데, 야구공만한 크기의 물맷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릴 정도이니 아마 야구공 크기의 물맷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들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를 물맷돌에서 찾는데, 그렇게 보면 반쪽만 본 것입니다. 청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물맷돌 던지는 실력이나, 그가 목동으로서 양을 지키기 위해 사자와 곰과 싸웠던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컸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그렇게만 본다면, 진실의 절반만 본 것입니다. 다윗이 그 큰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고 여호와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상 16:13-14절에서 말씀합니다.
(삼상 16: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삼상 16: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이 말씀에서 사울왕과 다윗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이 차이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이 됩니다. 그런 반면에 사울에게서는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사울은 악령에 시달리게 됩니다. 어떤 영에 사로잡혀 있느냐? 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이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늘 충만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영에 전적으로 사로잡혀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마음을 차지하는 것은 결국 세상의 영이요, 심지어는 악령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보세요. 사울도 원래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11:6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그랬습니다. 암몬 족속이 길르앗 야베스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을 침략해 들어옵니다. 이 때 야베스 지역 사람들이 암몬 족속와 친선을 맺자고 제안합니다. 그 때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에게 심한 모욕을 줍니다. 삼상 11:2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여호와의 영에 감동되었고, 거룩한 분노를 발하여, 소를 잡아 각을 떠서 모든 지파에 보내어 전쟁준비를 하여 암몬을 물리쳤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었을 때" 그 모습은 오늘 다윗과 뭐가 다를 바가 있습니까? 똑 같습니다.
결국 오늘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고 블레셋에게 승리하게 된 신학적인 이유는 그의 믿음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크게 영에 감동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는 직분은 세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왕이요, 다른 하나는 제사장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왕,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 백성들의 죄 사함을 담당하는 제사장 이런 직분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히브리어는 마샤흐, 우리가 잘 아는 메시아가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또 헬라어로는 그리스도가 기름부음 받은 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외에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브살렐과 오홀리압 같은 광야에서 “성막"을 제작한 특별한 기술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제사장, 왕, 선지자 셋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절에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어서 “만민에게 하나님의 영"이 부어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골리앗"과 같은 거대한 문제들을 만나게 될 때,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사는 길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지 않으면, 결국 세상의 영의 지배를 받고, 세상의 악한 영을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악한 영은 “죽이는 영"이요, “거짓의 영”입니다. 특히, 오늘날 현대사회로 갈수록 “하나님의 영을 받는다"는 것을 실감을 잘 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는 것을 마치 무당이 신내림을 받는 것처럼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다"는 것은 굉장히 현실적인 얘기입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악령에 시달리게 되었다” 했는데, 사울에게는 가장 대표적으로 질투의 영이 임합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백성들이 노래하니까, 사울은 질투심에 불타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에게 “질투의 영"은 곧 “죽이는 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에 감동” 되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일입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따르는 삶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갈 5:18-21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하나님은 다윗을 세워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위협에서 구원해 주셨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다윗이 골리앗에게 말한 것처럼 온 땅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게 하고,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해 주셨다(삼상 17:46–47).
당시 이 전쟁에 참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다윗의 말을 통하여 여호와가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다윗의 승리의 비결 - 기준의 문제
다윗의 승리의 비결 - 기준의 문제
다음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믿는 사람으로서 “승리"의 비결은 “기준을 분명히 세우는 것"입니다. 앞서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었다는 것은 승리의 신학적 비결이라고 한다면, “기준을 바로 세우는 것”은 성도들의 인간편에서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골리앗을 ‘가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거인입니다. 거인하면 우리가 민수기에서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전에 정탐꾼들을 먼저 보냅니다. 그 때 정탐군들이 보고 돌아와서 보고한 아낙 자손의 후예가 바로 골리앗입니다. 수11:22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더라” 그래서 오늘 “골리앗'을 “가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키가 여섯 규빗(45㎝×6=270㎝)이고,몸에는 무게가 놋 오천 세겔(11.5g×5,000=57.5㎏)되는 갑옷을 입었고,그의 창날은 철 육백 세겔(11.5g×600=6.9㎏)이었다(삼상 17:4–7).
어마어마한 거인입니다. 힘이 좋고 몸도 크며 골리앗의 무기에 맞서 싸울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골리앗은 어쩌면 전쟁 전에 이미 알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은 자신이 갖추고 있는 힘과 무기와 갑옷을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싸우기도 전에 이미 이 전쟁을 이길 것이라고 자신감에 가득차 있습니다. 골리앗이 가졌던 이 기준, 이 세상적인 기준이 지금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도 동일한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경험과 이성과 자신의 재력을 기준으로 인생을 판단하고,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너무도 작데 보입니다. 교회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도무지 영적인 기준 없이 살아 갑니다.
세상 자체가 마치 거대한 골리앗으로 보입니다. 이 세상의 기준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기준인데 문제는 이 땅을 살아가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 기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전쟁을 바라보던 사울의 모습인데요 25절을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7장 25장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
사울은 당시 사무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요, 당당하게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울 마저도 기준이 내가 되어버리니까 그렇게 의지하고 신뢰하고 믿고 있던 하나님이 진짜 믿음이 드러나야 할 때 드러나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되어집니다.
사울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이 되니, 내가 되니 너무나 두려워서 숨으며 누가 가서 어떻게 잘 싸워봐 라는 식으로 백성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영적 싸움을 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경험과 내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나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으시지는 않으십니까? 이 기준이 하나님께 향하지 않으면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골리앗을 이길 수 없다라는 말씀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시간 우리의 기준을 하나님께 다시 돌리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두번째로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 바로 다윗의 기준이였습니다. 4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7장45절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은 전쟁에 나간 형들의 식사를 챙겨주기 위해서 갔는데 이스라엘 군대를 모독하는 블레셋 군대와 골리앗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골리앗과 싸우게 된 다윗은 골리앗에 비해서 아무것도 없엇습니다. 키가 큰것도 아니였고 힘이 센것도 아니였으며 좋은 무기도 아니였습니다. 다윗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다윗과 골리앗 그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의 싸움이다는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칼과 단창, 좋은 무기, 강한 힘 앞에서 떨고 있을 때 다윗의 승리의 기준은 만군의 하나님이였기에 그 두려움도 무서움도, 그리고 전혀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있다는 유일한 승리의 가능성을 믿은 자가 바로 다윗이였다는 것입니다.
47절 함께 읽겠습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7장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다윗의 기준이 하나님이였고 이 전쟁은 여호와에게 속한 전쟁이였다는 영적인 흐름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승리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싸움은 어느 기준을 믿고 있느냐 어느 기준을 잡고있느냐의 싸움이였음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삶의 기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시대의 최대의 기준은 “인간의 이성"이요, 소위 “합리적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증명"입니다. 무엇이든 이성적인 것이어야 진리라고 믿고, 인간의 이성에 합리적인 것이라야 진리라고 믿으며, “증명할 수 있어야" 참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무신론적 주장입니다. 무신론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입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증명해 보아라" “증명이 안되지 않느냐?” 이런 주장이 무신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핵심입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이런 “무신론적 주장"이 마치 거대한 “골리앗"처럼 우리의 신앙을 위협합니다.
“무신론자들"은 흔히 인간 이성의 한계를 모른채, 자신의 확신은 철저히 믿을 만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고, 자신은 옳은 것을 따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만, 한 마디도 틀린 말입니다. 스스로를 속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확신하는 것은 철저히 믿을 만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참이라고 믿는다.” 이건 지식의 문제요.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신앙은 오히려 “관계와 실존의 문제"입니다. “나는 이 사람을 신뢰한다.”라고 말할 때, 그 “신뢰"의 문제입니다. 오늘 다윗은 바로 이 기준을 분명히 세우고 있습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일므으로 네개 나아가노라!” - “나는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이것이 다윗이 정한 삶의 유일한 기준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며 사랑이 넘치시며 선하신 분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이기게 하시는 분이심"을 발견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할 것을 결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의 존재방식에서 다른 존재방식으로 넘어가는 ‘질적도약'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우리 세계의 기존 항목에 ‘하나님'이란느 다른 하나의 항목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신뢰 가운데 새로운 ‘존재양식'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기준이 완전히 바뀐다는 말입니다. 이전에 나의 “지식과 경험과 이성"이 기준이었던 삶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는 삶의 양식, 존재 방식으로 변화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미국의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말합니다. “합리적 논증이 신앙을 변증하는 데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합리적 논증은 그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이어질 뿐이지, 변화를 일으키는 힘을 전혀 갖지 못한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들도 믿는다고 합니다. 합리적인 지식과 인격적인 변화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저 무시무시한 “골리앗"과 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어떻게 이 “골리앗”과 같은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까? 다른 길은 없습니다. “기준을 분명히 세우는 길밖에 없습니다.” 다윗처럼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 분명한 기준을 세우며 나아갈 때, 우리는 다윗처럼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싸움 속에서도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