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6수요] 어떻게 살 것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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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도전 찬송 310[아 하나님의 은혜로], 312[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찬송 321[날 대속하신 예수께]
기도 이정아 집사
본문 엡5:15-20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써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로 우리를 세워주셨다. 모든 의미와 존재와 위치가 새롭게 된 신자는 이전의 옛사람에 속하였던 죄악된 삶에서 벗어나 새롭게 우리를 재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새로운 사람의 새로운 삶, 8절에서는 이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이라 말하는데, 어떻게 사는 삶이 빛의 자녀들처럼 사는 삶인가?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행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해 ‘부지런히 주의를 기울여 탐구’하며, 오직 ‘지혜있는 자처럼 세월을 아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야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성령의 충만함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닫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19-20절처럼 우리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주께 노래하고 찬송하며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먼저 15절을 함께 읽어보자.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원문의 순서에 따라 보면 가장 먼저 ‘그런즉 너희는 주의하라’ 라고 말한다. 우리 나라 말에서도 문장의 순서를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주어진 일에 열심히 좀 해’ 라는 문장을 순서를 다르게 배열해서 ‘열심히 좀 해! 주어진 일에’ 라고 한다면 그 강조점이 달라진다.
바울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그런즉 너희는 주의하라’라는 문장을 가장 앞에 배치하고 있는데, 이는 이 문장이 가장 핵심 구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의하다’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가? 원어로 이 단어는 ‘눈으로 확인하다, 삼가다’ 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바울은 무엇을 눈으로 살펴보라는 것인가? 어떻게 행할지이다. 원어로는 ‘어떻게 걷고 있는지, 어떻게 행하고 있는지’ 라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걷는다, 행하다’ 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이는 내가 지금 걷고 있는 행동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모든 행위와 태도와 생각과 습관, 즉 삶의 모든 부분들’을 가리킨다. 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라’라는 이 구절의 본래의 의미는 우리의 마음의 태도나 사고나 언어의 습관이나 행위 등을 주의를 기울이며 부지런히 살펴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마음을 어떻게 먹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묻고 분별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범사에 마음을 다스리고, 생각을 훈련하며, 언어를 바르게 하고, 행위를 조절하는 자이다. 반면 지혜가 없는 자, 우매한 자들은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다. 마음의 태도나 사고의 방식을 검토하지 않고, 언어를 구사하되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는 수단으로 삼으며, 행위에 절제나 단정함이 없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우리의 모든 것들, 즉 우리의 행동, 우리의 태도, 우리의 생각, 우리의 습관들을 왜 주의하라고 말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이 16절처럼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16절을 보라. 바울은 여기서 두 개의 시간 개념을 가져와서 말하고 있는데 ‘세월’이라는 단어와 ‘때’라는 단어이다. 한글로는 이 두 개념의 차이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설명을 좀 드리려고 한다.
당시 헬라인들에게는 시간의 개념이 크게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크로노스’라는 단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 라는 단어이다. ‘크로노스’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의미의 시간을 생각하시면 된다. ‘지금 몇시야?’ 라는 질문에, ‘지금 오후 3시 40분이다!’ 라고 할 때 몇시 몇분 몇초에 해당하는 실제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한다. 반면 ‘카이로스’는 ‘한정적이고 고정된 특정한 날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예를 들면 성탄절까지 얼마나 남았지? 라고 물을 때 성탄절인 12월 25일, 정해진 시간, 확정된 시간까지의 남은 날들을 의미한다. ‘주일예배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이럴 때 카이로스 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세월’이라는 단어는 카이로스로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분명하고도 확정된 날까지의 남은 시간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확정된 날은 언제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다. 이 세상의 마지막날이요, 종말의 날이다. 그것이 ‘세월’이란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이다. 따라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단지 ‘시간활용을 잘해라, 시간 좀 아껴써라’ 라는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둘째는, 개인의 종말로 내 육신이 죽는 날을 가리킨다. 요약하자면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가? 개인의 종말의 날, 그리고 우주적 종말의 날, 그 확정적이고도 분명한 날이 반드시 올 것이기에 그 때까지의 남은 시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대가 악하여 심판날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의 인생은 결코 길지 않다. 제 개인적으로 10대와 20대를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시간을 허비하며 흥청망청 살았다. 육체의 쾌락을 따라 몸이 이끄는대로 살아왔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20대 후반에 만났고, 30대에는 신학교에 들어가서 사역을 시작했으며, 40대에 접어들며 지난 날들을 돌아보니 지난 날이 꿈과 같이 허망하고, 너무나도 순식간에 지나가버렸음을 깨닫는다. 저보다 연배가 많으신 분들은 더욱 잘 실감하실 것이다. 모든 부와 명예와 권력을 움켜쥐었던 솔로몬도 그의 노년에서 모든 것이 진실로 헛되다고 말하지 않던가.
여러분, 성경은 인생의 빠르기를 가리켜 배틀의 북과 같고 활시위를 벗어나서 과녁을 향하여 날아가는 화살과도 같다고 한다. 순식간에 절망의 때, 무덤으로 들어갈 때가 찾아온다고 말씀한다. 찬양 가사처럼 아침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도 같은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렇기에 이에 대해서 바울은 17절에서 다시 한번 신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데,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라고 말씀한다.
15절에서 ‘지혜 없는 자’란 무지한 사람, 지식이 없는 사람, 머리만 부족한 사람을 의미한다면, 17절에서 ‘어리석은 자’란 지식도 부족한대다가, 행실도 어리석은 총체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심판 날에 대한 무감각 속에서 매 순간마다 주의 뜻을 알지 못한 채로 방탕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자신의 마음의 태도나 사고나 언어의 습관이나 행위등을 주의를 기울여 부지런히 살피지 않는 자가 17절의 ‘어리석은 자’이다.
반면 지혜로운 자는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는 자’이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우리의 형제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 이 나라와 전 세계를 포함한 모든 우주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뜻,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왜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 뜻에 역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는 세월을 아끼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세월을 낭비하는 자이다. 특별히 심판 날까지 남겨진 시간들, 그 주어진 시간들을 잘 활용하며 빛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이와는 다르게 남은 시간을 방탕과 방종으로 보내는 자들이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자들로서 ‘술 취하는 자들’을 말씀한다.
18절을 보시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이 구절을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술 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 언급한다.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다’ 라고 서로 동일화를 시키기도 한다. 원어의 의미를 보면 ‘술 취하지 말라 방탕함이 이에서부터 온다’ 이다. 술이 문제가 아니라 방탕함이 문제이다. 핵심을 잘 파악해야 한다. 술만 안먹지 다른 일로 방탕하게 살아도 되는게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육신의 즐거움과 쾌락을 좇아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술 취함을 언급하고 있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추수의 풍성함,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선하므로, 포도주는 본래 선한 것이다. 그러나 절제 되지 않는 것들은 악용될 수 있다. 본래 스마트폰은 좋고 유익한 것이지만 절제되지 못하거나 중독될 경우 악한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포도주는 그 자체로는 선한 것이지만 절제되지 못하거나 중독이 될 경우 방탕함으로 이어진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포도주로 충만하지 말라고 강하게 촉구하는 이유는 그로 인하여 방탕함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더 많은 죄악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무절제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술로 자신의 배를 가득 채우는 것을 멈추고, 오직 ‘성령의 가득 채우심,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령의 가득 채우심,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들은 어떠한가? 자신의 모든 것들을 면밀하게 살피기 시작한다. 나의 생각이나 나의 의지나 나의 언행이나, 나의 사상이나, 나의 습관이나, 나의 가치관이나, 나의 목표나, 나의 꿈 모두를 살펴서 심판의 날까지 남은 나의 정한 시간동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게 된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가? 이에 대해 2가지를 말씀한다. 첫째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자들은 찬양의 삶을 살아간다. 먼저 19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무절제한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 기적이 일어나고, 신유가 일어나고, 방언이 터져나오고, 귀신이 쫓겨나가고, 아말감 이빨이 금니로 바뀌게 되고, 더 나아가 돈 벼락을 맞고, 승진과 출세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현상에 대해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하실 수 있다. 충분히 자연법칙을 뛰어넘으셔서 이적을 베푸실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아주 특수한 현상이지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다. 본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주님께 노래하고 찬송' 한다고 말씀한다.
시는 악기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구약의 시편이 있다. 시편을 보면 여러 악기들을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대목들이 등장하지 않는가? 또한 찬송은 익숙한 멜로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오늘날로 말하자면 찬송가가 있을 것이다. 신령한 노래란 성가곡들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인데, 분명한 것은 혼자 독창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서로 화답한다고 말씀한다. 가장 아름다운 음율과 가사의 고백으로 조화로운 합창을 올려드리는 자이다.
이러한 찬송은 곤고할 때나 괴로울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입술에서 찬송이 떠나지 않게 된다. 성령으로 충만한 자는 어떠한 때에라도 원망과 시비가 아니라 찬양이 있다. 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노래하고 찬양하는 자이다. 성경 속에서도 곤고할 때에도, 괴로울 때에도, 죽을 것 같은 위협 속에도 늘 하나님을 찬송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다윗이다. 그는 아름다운 시를 짓고, 악기로 감미로운 연주를 하던 최고의 시인이자 최고의 작곡가이며 최고의 연주자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였고, 그 결과 곤고한 때나 괴로울 때나, 아플때나 기쁠 때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삶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늘 우리의 입술에 찬양이 나올 수 있는가? 이것이 가능하긴 한가? 답은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저와 여러분을 다시 살리시기 위하여 독생하신 아들을 내어주신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라. 내게 주어진 시간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한들 받은만큼 다 부를 수 있을까. 찬송가의 고백과 같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담아낼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니겠는가. 내게 주어진 남은 시간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기에도 시간이 아깝거늘, 한 입으로 불평과 불만과 원망의 말들을 쏟아내는 것은 세월을 허비하는 일이다. 입술의 찬송이 마르지 않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라. 그래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화답하며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축원한다.
두번째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자들은 감사의 삶을 살아간다. 본문 20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들은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이다. 살전 5:18 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범사에 항상 감사하는 자이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특정한 상황이 되어야만 감사하는 자가 아니다. 어떤 조건이 이루어져야만, 충족되어야만 감사하는 자가 아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도 분에 넘치는 큰 선물을 받으면 감사를 표할 줄 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상황이나 형편에 영향을 받지 않고 늘 감사하는 자이다. 찬양도 그러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감사도 곤고할 때나 형통할 때나, 괴로운 날이나 기쁜 날이나 멈추질 않는다. 만약 우리의 마음이 시시각각 바뀐다면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이해하지 못함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인생 속에서 마주하는 여러 어려운 순간들이 있다. 마음 아픈 상황들이 있다.사방에 우겨쌈을 당하는 것 같은 답답한 상황들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독생하신 아들의 피값으로 사셨고, 그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어주시며, 지금 이 고통의 순간에도, 또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할지라도 나를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늘 나와 동행하시는 분임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 있다. 그 선한 목자께서 결국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 것이기에, 결국 우리를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실 것이기에,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기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이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구원받은 신자가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가 육체에 속했다면 육체의 소욕을 따라 죄악 된 본성에 이끌려 살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새 사람이 되었다면, 진리에서 비롯된 의로움과 진실함과 거룩함의 옷을 입었다면, 이제는 세상의 부패한 풍조를 따라 각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 앞에서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민하고 살펴봐야만 한다.
바울은 본문에서 지혜로운 자, 지혜 있는 자 처럼 살라고 촉구한다. 진정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자이고, 이를 위해서는 술로 자신을 가득 채우던 방탕의 삶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신비한 체험, 종교적 황홀경, 이적의 중심에 서기 위함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함에 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과 가치관과 입술과 몸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는 오직 성령의 충만함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해진 신자는 다른 성도들과 함께 아름다운 찬양을 올려드리며,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양문교회 성도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까지, 남은 여러분의 시간을 빛의 열매를 맺는데 사용하며, 성령의 충만함으로 찬양과 감사의 열매들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지혜 있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찬송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