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교회를 세우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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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교회를 세우라 3 (고전1:18-31)
지난 주에 1:10-17절까지 교회 안에 리더들을 따라 파벌이 생긴 것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바울, 아볼로, 베드로, 더 나아가 그리스도파가 생긴 것은 개인과 그룹의 이익과 선호에 따라 생긴 것임을3개의 질문을 통해 깨닫게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느냐? 바울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느냐?
모든 질문의 답은 예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인간을 중심으로 파벌을 만들지 말고, 머리되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분께 순종함으로 하나되길 촉구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 안에 두번째 분열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것은 리더중심의 분열과 다른 다양한 그룹으로 인해 파당을 짓고 분열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만이 아닌 현대교회 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인종, 학연, 지연, 나이, 성격, 출신배경, 신앙의 스타일 등으로 파당을 짓고 더 나아가서는 분열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회안에 심각한 문제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이런 일이 생긴 배경은 이렇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헬라인과 유대인 섞여 있던 교회입니다. 따라서 인종간의 문제, 문화적 배경이 다름으로 문제가 생겼어요. 신앙을 추구하는 자세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헬라 지역은 철학이 꽃을 피우던 시기로, 적어도 50여개의 철학 학파들이 존재했어요. 헬라인들은 어릴 때부터 철학적인 사고에 익숙하고 그것을 통해 모든 현상들을 이해했습니다.
이러한 헬라인 성도들은 생각하고 토론해서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어야 믿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헬라인들과는 달랐어요. 어떤 증거를 구하고 체험을 구하는 체험 중심적인 신앙입니다. 그들은 논리적인 이해나 철학적인 사고를 통한,
토론보다는 눈으로 봄으로, 경험으로 믿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래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표적을 달라고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로 자연스럽게 그룹이 형성이 되었습니다. 한국말에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어요. 비슷한 사람들끼리 편하고 자연스럽게 모이는 것을 말합니다.
끼리끼리 모임이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하고 더 나아가 파벌을 만들어 하나됨을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사람의 지혜나 경험을 따라 이루어지는 파벌주의를 극복하려면, 하나님의 지혜로 돌아와야 합니다.
사람의 경험이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말씀으로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1-2장을 보시면 사람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나옵니다.
사람의 지혜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의 지혜란 자신이 믿고, 행하고 싶어하는 것에 대한 논리적인 사고와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이 문제를 본문 22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 찾는다”고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보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경험이 우선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획보다 자신이 원하고 경험된는 것이 우선되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태도와 삶을 말합니다.
헬라인들의 눈에는 히브리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입니다. 토론에 약하고, 말이 논리 정연하지 않고 단순해 보입니다.
표적과 경험에만 의지하려는 것을 비난합니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한다는 표현은 ‘집요한 반복의 태도’를 묘사합니다. 보여주십시오 그럼 믿겠습니다. 눈에 보이고 감정에 호소하여, 울고불고 무엇인가 화끈해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눈에는 헬라식 신앙이란 영성이 없어 보입니다. 지식적인 면에만 치우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성이 없다고 생각하며 영적 우월감을 갖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나중에 은사문제로 확대되었습니다.
결국 서로 자신의 신앙의 자세가 옳다고 생각하고, 상대에 대해 비판하고, 비교하는 가운데 상처가 생기고 분열이 되었습니다.
어느 것이 옳을까요? 헬라식 이성주의일까요? 아니면 유대적인 표적과 보이는 은사 중심주의일까요?
여기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뭡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신앙은 이성주의가 아닙니다. 이성에 근거해서 신앙을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좁은 이성으로 전능하시고, 전지 하신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앙은 이성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생각없이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맹종입니다. 신앙은 주님께서 주신 이성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신앙이 표적과 보이는 은사중심인 신비주의도 아닙니다.
물론 신앙의 삶 가운데 이적의 체험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의 많은 표적이 기록되어 있고, 많은 성도들이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은 말씀의 통찰력을 상실한 신비주의입니다. 모든 삶의 현상을 신비주의적인 체험에 결부시켜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체험은 주관적인 것이기 말씀의 분별력을 가지지 못할 때, 이단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신13:1-5절에도 눈에 보이는 표징과 기적에 집착하여 거짓 예언자에게 속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당신들 가운데 예언자나 꿈으로 점치는 사람이 나타나서, 당신들에게 표징과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하고, 실제로 그 표징과 기적을 그가 말한 대로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너희가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다른 신을 따라가, 그를 섬기자' 하더라도, 당신들은 그 예언자나 꿈으로 점치는 사람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이것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정말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알고자 하셔서, 당신들을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만을 따르고
그분만을 경외하며, 그분의 명령을 잘 지키며, 그분의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그분만을 섬기고, 그분에게만 충성을 다하십시오. 예언자나 꿈으로 점치는 자들은 당신들을 미혹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집트 땅에서 당신들을 인도해 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당신들을 속량하여 주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며,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가라고 명하신 길에서 당신들을 떠나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서 당신들은 당신들 가운데서 그런 악을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기독신앙은 이성주의도 아니고, 신비주의도 아닙니다.
기독신앙은 복음주의입니다, 23-24절이 그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것이다. 오직 부르심을 입는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헬라파, 히브리파로 나누어져서, 자신들이 받은 교육과 전통을 내세우며, 서로 잘났다고 반목하는 그들을 향해, ‘정신차려라.
주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된 너희가 이게 무슨 짓이냐. 너희가 복음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26, 27절에 사람의 지혜를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허탄한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19절에 세상의 지혜를 다 폐하셨다고 하십니다. ‘구원받기 전의 너희 모습을 생각해 봐라.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 뽐낼 것이 없다’
우리의 지혜도 경험도 자랑할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자랑할 것은 예수밖에는 없음을 강조하십니다. 그 이유가 30절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건강하고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지식이나 표적, 은사를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자랑하고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자랑하고 나누면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십자가 죽음, 죄의 용서,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삶을 주신 분)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우리의 의가 되시고, 우리의 거룩함이 되시고,
우리의 구속함이 되십니다.
만일 우리가 머리되신 주님께 집중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데로 결정하고 순종한다면 파벌의 문제는 자연적으로 해결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나누어집니까? 왜 분쟁과 파당이 생깁니까? 그것은 인간적인 것에 대한 자랑때문입니다. 학벌자랑, 돈 자랑, 지식자랑, 지역 출신 따라 나누어지고, 출신학교에 따라 나누고,
직업 따라 나누어지는 것은 개인적인 욕심과 자랑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초점이 예수에게서 멀어질 때 갈등과 파벌이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집중할 때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였습니까? 디도서 3:3절 말씀처럼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사랑해 구원해 주시고 부활의 소망을 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예수님이외에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교회를 바라보시며 아파했던 성령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우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지성을 자랑하고, 표적과 보이는 은사를 자랑하며 서로 용납하지 못하고 비판하며 몸된 교회를 나누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 사람은 나하고는 달라, 같이 신앙생활하기 너무 힘들어하며 하나되지 못하고 있지는 않나요?
베스트 서적 중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인 찰스 쉘돈 목사님은 자신이 사회 사업을 하면서 겪었던 기독교인들의 냉대와 무관심에 충격을 받아
이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미국의 레드몬드 시입니다. 그곳의 한 교회에 부임한 헨리 멕스웰이란 목사님은 유명 신학교 출신의 엘리트로 신도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으면서 안락한 목회를 합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실직한 한 인쇄공을 만나 도전을 받습니다.
교회는 그의 힘들고 어려움에 대한 관심이 없었어요. 주님을 따른다는 찬송을 부르고 메시지는 듣고 있었지만, 이기적이고 냉정한 성도들을 향해
그 인쇄공이 죽기 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참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습니까?’
만일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도전을 주고 피곤과 굶주림에 죽어갔습니다.
멕스웰 목사는 이 사건에 큰 충격과 도전을 받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질문을 늘 생각하고 그대로 실천하기로 결심합니다.
성도들 중에서도 이러한 서약에 동참하는 지원자들이 생기고, 1년 동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러한 실천은 교회 안에서 안일하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던 많은 성도들에게 경종과 개혁의 선풍을 일으키며 개인의 삶이 변화됩니다.
오늘의 메시지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혜나 표적을 구하지 말고, 성도의 삶에 주인이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질문에 정직하고 겸손하게 답하며 삶의 매 순간을 살아간다면 분명 우리의 삶이 변화될 것입니다.
스승과 리더에 따라, 학벌과 직업에 부에 따라, 헤어지고, 갈라져서, 분열하는 아픔을 극복하고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