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끝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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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길거리를 걷다가 정말 멋진 남성이 여자친구와 함께 걸어갑니다. 외모 지상주의는 싫어하지만,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외모입니다. 만약 여자 친구가 인물이 많아 부족하다면 어떨까요? 이런 질문을 하자 몇몇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 여자애 집안에 좀 사나 봐!”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까요? 참으로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에게 참 다른 외모를 가진 남성이 남자친구로 있다면요.
“저 남자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그렇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둘 다 참으로 못 생긴 커플이 지나간다면요?
“저 두 사람 정말 사랑하나 봐"
모든 이야기 속에는, 그것이 우스개소리가 할지라도 그 이야기가 전하는 궁극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이 우스개소리가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람을 둘러 쌓고 있는 여건, 상황을 떠나 사람 자체만을 진정으로 사랑하기가 참 어렵다는 겁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려 하기 전에 그 사람의 외양, 조건을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상황, 여건에 쉽게 지배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 의한 변함없는 참 사랑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맹인 목사 안요한 시는 30세가 넘어 실명한 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또는 어려서 실명한 사람은 모든 감각기관이 왕성한 때 실명한 것이라 비교적 시각 장애에 적응하기 쉽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실명했을 경우에는 감각 기관의 기능이 단단히 자리잡은 뒤라 실명한 상황에 적응하기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삶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성인이 되어 실명한 사람들 가운데는 배우자로부터 버림 받은 경우가 참 많다고 합니다. 안요한 목사도 실명하기 전까지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둔 행복한 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실명한 뒤, 다시 시력을 되찾을 수 없는 판정을 받은 후에 결국 그의 아내는 떠나고 말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건강한 청년 안요한을 사랑하여 결혼한 것이지, 맹인인 안요한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실명한 남편의 시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가산을 모두 쓰고, 경제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가족들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면 과연 어떻겠습니까? 이런 경험이 없는 우리가, 어찌 남편을 떠난 그 여인을 비난할 수만 있겠습니까?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던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비상구를 향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백화점 2층의 한 가게에서 근무하던 종업원 역시 무슨 영문이지 모르고 비상구를 향해 뛰었습니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순간, 가게에 그날 매상잔고를 그냥 두고 왔다는 사실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했던 그녀는 다시 길을 돌이켜 물결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2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몸을 옴짝달싹할 수도 없던 그때 겨우 앞으로 나가다가 그 뒤를 따르던 할아버지가 자기보다 먼저 나갔고, 그녀가 인파에 떠밀려 내려가다가 다시 오르려는 순간 천장이 무너지면서 쇠기둥이 할아버지를 쳤습니다. 그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사실 그녀가 인파에 떠밀려 머뭇거리지 않았다면 자신이 쇠기둥을 맞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를 앞서던 할아버지가 그녀 대신 쇠기둥에 맞아 깔리게 된 것입니다.
깜짝 놀란 그녀가 넘어진 할아버지를 건너뛰어 이제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는 그때, 갑자기 누군가 억세게 발목을 잡습니다. 쇠기둥에 깔린 할아버지입니다. 그 할아버지는 건물의 청소부였습니다. 그날 오후에도 가게를 쓸어준 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와 그녀의 눈이 순간 마주쳤습니다. 그러나 천장 위에서 건물이 무서운 소리와 함께 무너지는 것을 보고 듣고 있었던 종업원은 힘껏 발을 빼고서는 그냥 비상구로 달려나갔습니다. 만약 정상적인 상황에서 사고가 났다면 분명 할아버지를 도왔을 겁니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 그녀는 할아버지의 애원을 묵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처해 본 적이 없는 우리가 그 종업원을 함부로 비난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사람 그 자체를 변함없이 사랑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언제나 상황과 여건의 제약을 받습니다. 네 조건이 변했기 때문에 내 사랑이 변하고, 내 여건이 바뀌었기 때문에 내 사랑의 질이 바뀌고, 우리의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에 우리 사랑의 내용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들이 행하는 사랑의 한계요, 그렇기에 아침의 사랑이 저녁에는 증오와 배신으로 조변석개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12장은 표적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13-21장은 영광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의 책 부분은 예수의 마지막 때를 기록하고 있는데, 고통, 배신, 십자가와 죽음을 담담하게 기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두고 영광의 책, 곧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제자가 세상에서 사는 것을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바로 예수님처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합니다. 그 사랑은 발을 닦아주는 세족에서 시작하여 십자가로 향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었을까요? 때는 유월절 전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아버지께 돌아갈 때가 이른 줄 아셨다고 합니다.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본문에서 유월절을 언급한 것은 유월절 어린 양처럼 희생되실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로 돌아감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을 제일 먼저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떠나’라는 단어를 주목해 주세요.
이 떠나는 원어 의미로는 죽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메타바이노라는 이 단어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미 13장 이전에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이 단어가 바로 메타바이노입니다. 곧 세상을 떠나다라는 의미는 예수께서 죽으실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곳 십자가, 그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생명으로 옮겨갈 것입니다.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십니다. 죽음이 종착지가 아니라 그 다음 생명을 준비하셨습니다.
이때 주님은 한 가지 선택을 하십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람, 하나님께서 예수께로 이끌어 만나게 한 사람, 10장에 등장하는 자기 양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여기서 끝까지는 말 그대로 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그 이후 생명으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계획의 끝일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은 목적이라는 뜻도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지속되었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이루어질 때까지 사랑하셨다는 말도 됩니다.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러분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너를 장차 베드로라고 부르겠다고 하셨습니다. 큰 반석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삶은 어땠습니까?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그는 예수를 바라보지 못하고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졌던 사람입니다.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주님을 붙들고 싸우듯 항변한 사람입니다.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가야바의 뜰에서는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즘 되면 우리는 웬면하면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틀렸구나. 안 되겠다.’
하지만 주님은 택한 사람을 끝가지 사랑하셨습니다.
부족한 사람이라도 그를 부족하다 모자라다고 규정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당신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끝이라 생각하는 그때가 끝이 아닐지 모릅니다. 끝까지 이끄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고별설교와 함께 주께서 별내교회에서 맡겨주셨던 사역을 마무리합니다. 끝났습니다. 생각해 보니 바뀌기 전의 베드로의 모습으로 사역했음을 고백합니다.
목회자인데 설교한 대로 살지 못한 부분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을 이미 보셨을 성도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그렇게 사역이 끝이면 참 서글플 것 같은데, 우리 주님은 저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셨듯이 그를 주님의 사람으로 든든하게 세우셨듯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끝의 자리에 서 계신 분 있으십니까? 이전 삶을 정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인가? 라는 질문 앞에 어렵게 서실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은퇴를 얼마 전 각 학교에서 있었던 졸업으로 각자의 생애주기의 매듭을 지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 끝에서 혹 부족함과 후회를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목적과 뜻이 우리 삶에 이루어지기까지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제자들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어떤 반응을 했을까요?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마귀가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3절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예수님게서는 이 모든 과정을 아셨다고 말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운명을 맞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가올 운명을 직면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유다는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종종 규정합니다.
그런데 그도 뭔가에 사로잡혔던 것 같습니다. 마귀가 그 마음에 생각을 넣었다는 것은 마귀가 한 일인데 뭔가 유다와 맞아들어간 부분이 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예수에게서 메시야를 보았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모였고, 소외된 자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기득권보다 많았고 이들을 조직화해서 혁명을 일으키는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정치적인 메시야의 길을 걷지 않으셨습니다. 유다에게 예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처형당하는 패배의 길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야 틀에서 예수님이 벗어나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틀에서 벗어난 예수를 제단하기로 맘 먹습니다. 자기가 만든 틀 속에 예수님을 넣기 위해 애썼습니다. 단 내 틀에서 빠져 나오면 잘라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가장 비견한 예는 성경을 읽을 때입니다. 마음에 드는 것은 밑줄을 긋지만 불편한 내용이면 빠르게 넘깁니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구원에 대해서는 내게 물어보라 단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확신있는 태도 좋습니다. 하지만 과연 무한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지 곰곰히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시여, 참으로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인간과 인간세계를 초월한 분이십니다. 그분을 아무리 우리 이성에, 경험에 욱여 넣어도 넣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은 신비입니다. 신비는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역설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우리 실존을 3단계로 표현했습니다.
미적 실존입니다. 아름답고 좋은 것만을 즐기고 찾는 단계입니다.
다음은 윤리적 실존입니다. 윤리적 존재로 살기 위해 타인과 관계를 맺습니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실존입니다. 이 단계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자기 희생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연합하게 될 때 오히려 자기를 희생하는 역설이 일어납니다. 이런 역설, 곧 인간이 자신을 뛰어넘는 일이 하나님을 마주할 때, 크신 그분을 경험할 때 일어납니다.
신앙은 역설입니다. 자신의 틀을 넘어서는 더욱 큰 신비입니다. 문제는 유다의 굳어진 생각, 나의 고정된 관념입니다.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기에게 무엇을 맡기시는지 아셨습니다. 그리고 2절은 그런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유다를 세워 대비시킵니다.
헬라어로 맡김은 디도미, 팔아넘김은 파라디도미입니다. 언어유희입니다. 관념에 갖혀 팔아 넘기려는 자와 자기에게 맡기신 것을 알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대조시킵니다.
이제 주님은 유다와 달리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발을 씨기기 시작합니다.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본래 스승의 발을 제자가 씻기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스승이 그런 관례를 깨고 제자들의 발을 씻깁니다.
벗고. 디테미는 벗다와 내려놓다 두가지의 의미를 가집니다. 겉옷을 벗어 내려놓으십니다. 같은 단어를 이미 앞에서 한 번 사용되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강화합니다.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목숨을 버리다. 디테미입니다. 곧 그분이 벗으신 것은 옷이기도 하지만, 그분은 끝까지 사랑하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희생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의 상징은 멋진 성찬그릇과 정갈한 예식이 아니다. 기독교의 상징은 수건과 대야여야 한다.”
공관복음에서는 성만찬의 제정과 그 의식에 집중하는 듯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성찬이 아닌 세족에 집중합니다. 결국 끝까지 사랑함은 내려놓는 것입니다.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이제 그분은 발을 씻기십니다. 발을 직접 손으로 만지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심을 손으로 보여주십니다.
당신의 손, 강은교
당신의 손이 길을 만지니
누워 있는 길이 일어서는 길이 되네
당신이 슬픔의 살을 만지니
머뭇대는 슬픔의 살이 달리는 기쁨의 살이 되네.
아, 당신이 죽음을 만지니
천지에 일어서는 뿌리들의 뼈.
당신이 내게 손을 내미네
주님의 손이 닿는 곳에서 일어서고, 죽음을 만지면 뼈들이 살아납니다. 그 손과 접촉된다면 얼마나 생명력 넘치며 행복하겠습니까? 이 손과 접촉한 적이 있으십니까?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삶에 고단함에 지친 우리에게 자신의 손으로 만지며 위로하십니다.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베드로 참으로 솔직합니다. 관념을 깨시다니요? 일반적인 상식을 깨뜨리시다니요? 어떻게 제자도 아닌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까?
정직한 그의 질문이 있었기에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본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나중에 알거야. 세상에는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지금은 모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 돌이켜 보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됩니다. 주님은 지금 모른다고 못났다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무지하지만 무지한 자라고 규정짓지도 않으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베드로는 참으로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주님은 베드로의 연악하심을 아십니다. 그가 혼란스러워하고 넘어질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그런데 그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결국 후에는 형제를 굳게 하는 사람으로 반석이 되게 하셨습니다. 망가져본 사람, 넘어져 본 사람이 오히려 타인을 치료하고 세우는 버팀목이 될 수 있습니다.
별내교회에서의 3년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돌이켜보니 참으로 부족했고, 부족했고,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이켜보니 주님은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심을 그렇게 앞으로도 하실 것을 신뢰하게 됩니다.
유다처럼 제 생각으로 제단하는 굳은 마음도, 베드로처럼 쉽게 넘어지고 그분의 기대와 뜻을 지금 당장 수행하지 못하더라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손으로 여전히 우리 옆에서 위로하심을 기억합시다. 유다마저도 발을 씻기시며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심을 잊지 맙시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를 좇아, 예수님의 뜻 그 신비를 믿고 신실하게 살아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삼풍백화점의 그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