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0UNLIKELY
Disgust
0UNLIKELY
Fear
0UNLIKELY
Joy
0UNLIKELY
Sadness
0UNLIKELY
Language Tone
Analytical
0UNLIKELY
Confident
0UNLIKELY
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0.21UNLIKELY
Conscientiousness
0.13UNLIKELY
Extraversion
0.44UNLIKELY
Agreeableness
0.6LIKELY
Emotional Range
0.2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 .5
.5 - .6
.6 - .7
.7 - .8
.8 - .9
> .9
1. 사도신경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2. 찬송가 : 491장 저 높은 곳을 향하여
3. 합심기도
위드 코로나를 위해 기도합시다.
나라를 위해 기도합시다.
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선교지 교회와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오늘 예배를 위해 기도합시다.
4. 성경봉독
5. 설교
서론
지난 번 설교
저는 요한복음 1:1 을 설교하면서 요한복음 1:1 의 ‘태초에'라는 말은 곧 창세기1:2-3ff 을 떠올리도록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요한이 요한복음 1:1 을 통해서 언급하려고 했던 말은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던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던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던 그 곳에 말씀을 통하여서 새롭게 하나님의 형상들로 하나님의 작품들로 채우셨던 그 사건을 요한은 지금 의도적으로 가지고 오고 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무에서 유가 되는 그 놀라운 기적과 같은 사건을 지금 요한은 기억하면서 자신이 기록한 요한복음을 읽어가라!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상황!
마치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와 듣는 청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든 것을 창조하셨던 그 순간과 같은 역사가 너희들에게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작품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를 만드셔서 채우셨던 그 역사가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드러나고 나타날 것을 마치 약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 요한복음이 기록된 시기 그러니까 주후 90-100년이라는 시기의 상황은 뜻밖에도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된 주후 90-100사이의 시기는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들과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던 때입니다.
예루살렘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주후 70년 성벽이 무너지며 로마에 정복당했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정체성,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그 정체성을 상실당하고, 그로부터 고난과 역경, 서러움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망하여서 나라를 잃은 것도 서럽고 힘든데, 네로황제는 로마지역에 화재 사건이 일어나자 자신을 향해 커져가는 안좋은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 모든 죄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덮어 씌우며 자신의 살길을 찾았고, 그로 인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차별적으로 죽임당했습니다.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그들의 몸에 불을 질러 자신의 집 뜰을 밝히는 등불로 사용하였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물의 탈을 씌워 사자들과 투견들에게 찢겨 죽도록 만들며, 조롱거리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네로의 통치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야말로 개미목숨과 같은 취급을 당하며 산으로, 숲으로, 무덤으로 숨어들어가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일에 앞장섰던 네로가 암살당하자 그리스도인들은 드이어 희망의 빛이 비추이는 구나 생각하며, 여유를 가지려는 그 때, 도미티안이 로마의 황제가 되며 그리스도인들은 다시금 네로와 맞먹는 박해를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상황입니다.
거기다가 주후 90-100년 사이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모습을 실제로 본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함께 시간을 보내었던 제자들 무엇인가 강력한 증거들에 의해서 믿었던 제자들과는 달리 지금 요한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대상들은 모세에 의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 세대가 죽고 다음 세대가 형성되었던것과 같은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스라엘 앞에 요한은 지금 ‘태초에'라는 말을 통해서 창세기 1:2-3f 을 떠올리도록 하면서 에배소에 있는 교회들을 비롯하여 모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향해서 너희의 삶에 하나님께서 멋진 작품을 만드셨던 그 창조사역, 모든 것이 심히 보기 좋았다라던 그 하나님의 평가가 너희 가운데 임할 것이라면서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힘들어 죽을것 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모든 길은 막혀있는 것 같고, 캄캄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그런 답답한 상황 가운데 놓인 교회들을 향해서 요한은 지금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채워지며 아름다움의 극에 달하게 되는 그 사건을 떠올리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이 놀리는 것 같습니다.
아이쿠 네가 배가 고프고, 파리 목숨과 같은 너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발버둥 치고 있고, 그래 하나님이 지켜 주시겠지~!
라는 비꼬는 듯한 늬앙스를 풍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배고파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 빵을 생각나도록 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에게 돈이 어떻게 생겼는지, 돈은 10원짜리 100원짜리, 500원짜리 동전이 있고, 천원, 오천원, 만원, 오만권으로 된 지폐로 되어 있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도대체 왜 힘들어 죽을 것 같아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아무런 길도 보이지 않고 그저 목숨만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그것에 집중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도대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어 했던 것일까요?
본론
오늘 본문의 구조를 살펴보면, 오늘 본문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문 구조
창세기1-2 의 재 진술
먼저 요 1:1-4 은 태초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 재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 1:1-4 은 창세기 1-2 장에 기록되어 있는 그 사건들을 떠올리도록 하면서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었던 상태에서 모든 것이 아름답게, 질서 정연하게 만들어진 그 창조사역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 1:1-4 을 읽는 독자와 듣는 청자로 하여금 모세오경의 가장 첫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창세기 1-2 장을 생각나게 하면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떠올리도록 합니다.
수미상관구조: 깨닫지 않고, 영접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요 1:5-11 은 6-10의 내용, 빛을 증언하는 자로서 보냄을 받은 세례 요한의 모습, 그리고 실제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5절과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는 11절이 앞과 뒤에서 감싸주고 있는 수미상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미상관이란 앞과 뒤를 비슷한 문장과 동일한 내용을 배치하면서 의미를 강조하고, 듣는 청자나 읽는 독자로 하여금 집중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그러니까 요1:5-11 은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참 빛을 소개하는 자로서 보냄을 받았던 요한과 그 요한이 소개했던 그 참 빛이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5절과 11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깨닫지 않았”고, “영접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함으로 인하여서 타락하게 되면서 빛의 자녀에서 어둠의 자녀가 되었던 그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빛을 비추이셨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했고, 그 어둠 가운데 빛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그들 가운데 오셨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은 그 기회를 잡을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라는 것이죠.
“영접하지 않았다” 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 1:5-11 이 강조하는 것, 요한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빛에 대해서 증거했지만, 그리고 심지어 참 빛이신 그 말씀, 로고스이신 주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지만 정작 세상은, 우리는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요 1:12-18 은 앞에서 언급되었던 영접하지 않았던 자들과는 달리 영접하는 자들에 대한 진술이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요 1:12 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나"라고 말이죠.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통해서 우리는 앞에서 보았던 요 1:5-11 과 비교하여서 “영접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과 같은 것인지, 가장 완벽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요 1:13 에서
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혈통에 따라서, 우리의 육정 그러니까 의지에 따라서, 사람의 뜻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게 되는 자들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요 1:12-18 은 영접하는 자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 주는데, 그들은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자들'이며,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것으로부터 은혜 위에 은혜를 얻은 자들’ 입니다.
구조가 말하는 의미!
사실 오늘 본문의 구조를 통해서 보여지는 모습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셨다가 감추셨다가 다시금 드러내시는 모습입니다.
요 1:1-4 의 내용이 마치 창세기 1-2 장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던 상황,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활동하지 않으셨던 그 상황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다는 것을 우리로 기억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이 땅에, 자신의 창조 사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요 1:5-11 에서 어둠이 빛을 영접하지 않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마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그 상황,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가 된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면서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의 타락함으로 인하여 감추어지셨다라는 것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죄를 지어 하나님의 빛에서 멀어진 그들 가운데서 떠나서 숨어 계신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5절이 문학적 구조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빛은 어둠 가운데 계속해서 비추이고 있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숨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상태를 기억해야 합니다.
다르게 말해서 세상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증거가 어디있느냐?라는 질문을 하는 것과 같이 그들은 그들 자신의 욕심을 따라서 어둠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전히 지금도 우리의 삶 구석 구석에서 역사하시며 낮에는 햇빛으로 밤에는 별과 달을 비추시며 우리로 살아가게 하시지만 우리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 1:12-18 의 기록과 같이 특히 요 1:18 이 진술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우리 가운데 드러내신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우리가 감각으로 인지하며, 경험을 통해서 채득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드러나신다라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입니다.
이것은 요 20:31 에서 요한이 스스로 밝히고 있는 바에 의해서 확증됩니다.
본문과 이스라엘의 상황 연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얼굴을 드러내시는 것과 감추시는 것, 그리고 다시금 드러내시는 것이 고통 속에 좌절하고 낙담해 있는 2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왜 요한은 다시금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소망, 그리고 다시금 살아 갈 수 있도록 격려와 위로가 필요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금 얼굴을 보이셨다라는 그 사실을 재 진술하며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요 20:31ff 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바로 요한복음 전체에서 드러나는 핵심,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요 1:4 에 언급되고 있는 그 빛, 생명의 빛이 그들에게 필요하고, 요 1:14 과 요 1:16 이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이신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 완성된 그 은혜 위에 은혜, 그러니까 가장 완전한 은혜”를 누리도록 하시는 그 하나님의 위로가 그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금 이스라엘의 상황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구약성경에 정통하며, 구약성경을 빠싹하게 외우다시피 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금 모습이 어떠합니까?
그야말로 전쟁으로 인하여 로마의 식민지가 되면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백성,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고, 그로 인하여서 그들은 죽은 자들과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해 속에서 그리스도인들 또한 어쩌면 하나님의 얼굴을 드러내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원형경기장에서 조롱거리가 되며, 파리 목숨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어쩌면,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우리가 그토록 박해 당하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시련과 고난이 닥쳐 오는것은 우리의 믿음이 잘 못된 것은 아닌가?라는 불안감 속에서 걱정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요한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바로 회복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며 생명의 근원이심을 드러내셨던 그 하나님의 생명, 모든 것을 살리고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그 능력의 생명, 그 생명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비추인다라는 것입니다.
또한, 요 1:12-18 이 기록하는 것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시며 죽으셨던 그 주님께서 다시금 부활하시면서 우리를 어둠에서부터 재 출애굽시키시면서 우리로 영접하는 자가 되도록 하신 그 주님의 회복, 그리고 주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허락하신 그 회복, 그 회복이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졌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으로 인하여서 보냄 받은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로 그 놀랍고 놀라운 생명을 누리도록 하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확신과 불안,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루 하루를 고되게 살아내던 2세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요한은 너의 삶의 죽어가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다시금 새로운 의미로 재정립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너희가 새 생명을 누리는 것의 가치를, 영원한 소망을 발견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요한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강력하고도 강력한 생명의 빛을 선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울을 바울로 바꾸셨던 그 새 생명 말입니다.
결론
그리고 오늘 우리가 요1:1-18 을 읽고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어려움들 앞에서 요한이 선포하는 이 생명력,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드러내시는 그 역사가 우리에게도, 우리의 삶에도 절실히, 아주 간절히 필요한 상황이 아닐까 합니다.
코로나라는 어려움을 통해서 교회의 쇠퇴는 더욱 더 빨라져 가는 것같고, 지금까지 우리가 지켜온 모든 것들이 제방이 무너지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이 무너져 가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세상은 점점 더 악해져가고, 점점 더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날뛰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도덕적으로 양심의 가치를 따라서 최소한으로라도 절제해왔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심지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들, 생명의 힘을 가진 사람들의 생활도 처참히 무너져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2세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박해 속에서 희망을 잃고, 좌절하며 낙담했던 그들과 같이 우리 또한 힘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요한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굴을 드러내신다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자가 누리게 될 그 생명, 아무것도 없던 그 상황에서 모든 것을 만드시며 그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서 드러난 강력하고도 강력한 그 하나님의 생명의 빛, 그 빛이 내 삶의 전 영역에서 우리의 감각과 우리의 인지를 통해서 체험되어지는 그 생명의 힘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지금 이 생명의 빛을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이 그 선포되어지는 말씀의 증인이요.
그 선포되어지는 생명의 빛을 전달하는 통로입니다.
빛 가운데 걸어가는 자가 어찌 빛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있으며, 생명을 누리는 자가 어찌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아 갈 수 있겠습니까?
이 시간 부탁드리는 것은 간절히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빛을 영접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로서, 하나님으로부 가장 완전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력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시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6. 찬송가: 510장 하나님의 진리 등대
7. 교회소식
8.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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