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향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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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1주제 112장은 그 유명한 마리아의 향유 옥합 이야기가 나옵니다. 목사님께서 저를 위해 남겨두신 본문이라 더 특별한 본문이 되었네요.주제 1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장면은 4복음서 모든 곳에 등장합니다. 마태,마가,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고 눅7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또 다른 여인과 향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 복음과 마태 마가복음이 이야기를 기록한 방식에서 다소 다른 부분을 보이고 있습니다. 첫번째 차이점은 마태마가복음에서는 베다니라는 동네이름만 나옺만 요한복음에서는 바로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동네라는 설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말해주는 것입니다. 두번째 차이점은 마태 마가복음에서는 마리아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여인으로만 기록되어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을 바로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야기는 지난주에 다루었던 11장에 있는 나사로이야기의 연장선 상에서 이해를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여겨집니다. 아주 짧게 11장의 내용을 정리하고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나사로 오빠와 마르다 언니와 마리아 형제가 함께 살았습니다. 오빠가 많이 아팠고 위중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과 이틀거리에 떨어진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까운 형제와 같던 그들의 요청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일이라고 하시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신채 빨리 와달라는 요청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틀이나 더 그곳에 더 머물러 계십니다.. 특별한 일이나 급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 사이 나사로는 죽었고 죽은지 4일이나 지난 어느날 장례식장에 찾아 오셨습니다. 수많은 기적으로 사람들을 도우신 예수님, 그렇게 신뢰하고 사랑하던 예수님의 외면과 방치속에 마리아 마르다 자매는 사랑하는 오빠를 잃었습니다. 두 자매는 예수님이 찾아 오셨을때 서운한 마음 감출 수 없었습니다. 오빠가 죽고 예수님이 오실때까지 4일동안 오빠의 죽음으로 비통함에 빠져있었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고치고도 남을 능력의 예수님께 철저하게 방치되었다는 사실은 두 자매에게 더 큰 상실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오빠의 죽음 이후 4일이라는 시간은 그동안의 신뢰가 무너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느긋하게 찾아오시는것 처럼 보이는 예수님께 두 자매 모두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고 같은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거라고, 이런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거라고. 심지어 마르다는 돌문 앞에선 예수님께 썩어서 냄새가 진동하기만 할텐데 이제 와서 왜 그러시냐는 말까지 합니다. 두 자매는 예수님의 능력도 알고있습니다.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것도 알고 있습니다.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뜻과 선택과 행동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오빠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예수님만 바라보다 예수님만 기다리다 오빠를 잃어버렸습니다. 죽어버린 오빠를 무덤에 묻고 ..4일이나 지난뒤 찾아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들이었지만 예수님으로 야기된 또는 예수님에 의해 방치된 상황까지 받아들이기는 너무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고 예수님을 적대시 하던 유대인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드디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단합니다. 나사로의 기적은 예수님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잠시 에브라임이라는 곳으로 피해 가십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일주일 앞둔 오늘 다시 베다니 동네로 찾아오셨고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는 숨만쉬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사로만 보면 누가 살렸는지를 떠올릴 테니까요.나사로가 뀌는 방귀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사로는 존재 자체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와 마르다 자매는깊은 상실감과 배신감,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 사이에서 일어나는 처절한 내면의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회복되었습니다.이제 두 자매에게는 왠만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사라질 일은 없을것입니다. 어떤 환경 어떤 상황이 와도 예수님을 신뢰하는 제자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회의 지도자이자 권력층이었던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하고 심지어 나사로 까지 죽이려고 하는 상황속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열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변화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는 잔치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마리아입니다.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 털로 그의 발을 닦습니다. 한근으로 번역되어있는 이 단위의 무게는 300그람이 조금 넘는 무게입니다. 하지만 나드 향유는 지극히 비싼것이었습니다. 수입품이었죠. 인도에서 자라는 나드라는 식물의 뿌리에서 소량 추출하여 만든 향유였기 때문에 귀한것이었고 300그람정도면 그 당신 노동자의 1년 연봉에 해당되는 가치였습니다.그리고 또 한가지 베다니라는 동네 이름은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울의 강남과도 같은 예루살렘성과 3키로 정도 떨어진 광야근처 마을이었습니다. 전세는 꿈이고 월세도 내기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살던 , 그 시대 가장 어려운 자들이 주로 모여사는 가난한 동네인것을 감안하면 오늘 마리아가 부어버린 이 향유의 상대적인 가치는 훨씬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마치 과부가 헌금한 두 렙돈은 아주 적은 돈이었지만 과부에게는 전부였던 것처럼요.1. 왜 마리아는 이 비싼 향유를 부었을까요? 마리아가 어떻게 그렇게 비싼 향유를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다락방까지 갖춘 마가와 같은 사람에겐 이정도의 향유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겠지만 가난한 동네에 살고 있는 마리아에게 있어서 자신이 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표현은 물질적인 가치였을지 모릅니다. 나사로의 기적을 경험하기까지 깊은 상실감과 배신감과 싸웠을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흔들렸던 자신에 대한 민망함과 예수님에 대한 미안함을 깊이 느꼈을 마리아 입니다. 그리고 감정과 판단을 넘어선 예수님을 향한 무한 신뢰를 얻게된 마리아 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마리아가 예수님께 자기 자신을 드리는 행위인것입니다. 2. 머리털로 발을 닦습니다. 마태,마가복음에서는 머리에 부었다고 했지만 오늘 요한 복음에서는 발에 부었다고 합니다. 머리에 부어서 발까지 흘러내렸다고 이해하기도 하지만 오늘 이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의 초점은 발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손님의 발을 닦는 것은 사실 노예의 일이었고 노예중에서도 가장 천하고 별볼일 없는 어린 노예들이 맡아서 하던 행동이었습니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낮은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예수님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도 드러냅니다. 그 당시 여자의 긴 머리는 여자의 영광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귀하고 비밀스럽고 소중한 의미를 지녔기에 함부로 남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머리카락이었습니다. 천으로 가리고 다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당황스럽고 괴상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이 행동은 그당시의 문화적 의미를 생각해보면 마리아 입장에서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린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신발끈을 묶는것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면 자신의 낮음과 예수님의 높으심을 고백하던 모습과 비슷합니다. 나에게 가장 영광스러운것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발을 닦는 용도로 쓰기에는 부족할만큼 예수님은 존귀하신 분이고 고마우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발이 아닌 다른 사람의 발이었다면 먼지 가득뭍어있고 굳은살 갈라진 발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발이었기에 나의 가장 큰 귀한 것을 이용해 닦을지라도 부족하고 죄송하고 감사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기적이 가지는 가장 놀라운 의미는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경험하며 오늘 등장인물들에게 일어난 변화입니다.예수님을 가장 귀한 존재로 여기게 되는 자신의 모든것도 아깝지않은 예수님을 향한 마음을 소유하게된 이들의 마음의 변화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피같은 돈과 금같은 시간을 들여서 누구의 발을 닦아 주고 있습니까? 그 발이 자녀의 발입니까? 배우자의 발입니까? 직장에서 만난 동료들의 발입니까? 교회 안에 지체들의 발 입니까? 부모님의 발입니까? 그발이 예수님의 발일 수 있습니다. 3. 머리털러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소유인 향유만 부었을 때가 아니라 자신의 일부이자 자기 자신이 머리카락으로 닦으니 향유냄새가 가득하다고 합니다. 잔치집이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도 보고싶고 나사로도 보고싶어 소문의 주인공들을 직접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마리아의 향유냄새가 모여있는 모든 사람의 후각을 자극하고 값비싼 향기가 모인 사람들을 향에 취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궁금해집니다. 마리아의 향유 이야기가 한 사람 한 사람 전해집니다. 향기와 함께 마리아의 헌신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전해집니다. 모두가 다시한번 나사로의 기적을 이야기 하지만 나사로가 주인공인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로를 살리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향이 퍼져나가는것 처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복된 소식, 생명의 소식도 퍼져나갑니다. -----------------------------나눔질문 1. 내가 닦아드리고 있는 예수님의 발은 무엇입니까? 나는 무엇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고 싶습니까? 2. 나의 자존심, 나의 억울함, 마지막까지 양보할 수 없는, 건드려서는 안되는 상처가 나의 향유이자 머리카락 나의 가장 귀한것 일 수 있습니다. 누구도 건드릴수 없는 , 만질수도 없고 볼수 없는 것, 마리아의 머리카락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내어 놓고 그것으로 발을 닦을 때 향이 퍼져 나갑니다. 저사람이 왜 그래? 사람이 변했어! 라는 사람들의 수근거림 안에 예수님의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소리도 없습니다. 눈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느끼고 취하는 향이 흘러갑니다. 4. 삼백데나리온이런 놀라운 은혜의 순간에 가룟 유다의 목소리가 마리아에게 찬물을 끼얹습니다. 삼백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합니다. 우리가 헌신하는 순간에 늘 따라오는 목소리입니다. 꼭 그 방법이어야 하냐고 책망합니다. 제사에 쓰이는 관유도 아니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물로 씻으면 충분할 발을 닦기위해 향유를 붓는게 말이 되냐고 책망하는 소리입니다. 이 목소리는 강력합니다. 눈으로 확인가능한 숫자를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득력있습니다.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뭐라 대꾸를 할 수가 없습니다.이 목소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가족의 목소리 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일 수도 있지만 내 내면의 목소리 일 수도 있습니다. 결의에 차있고 마음의 감동에 이끌려 헌신하는 순간에는 조용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뒤 향기가 사라지듯 모든것이 사라져버리고 아무것도 남은것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목소리입니다. 마음을 다해 섬겼던 사람들이 공동체를 떠나고 믿음을 포기하고 때로는 나를 미워하기 까지 합니다. 미련없이 돌아섭니다. 나의 모든 노력을 허무하게 만드는것 같은 자녀의 모습을 보는것 같은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나의 모든것을 쏟아 부었는데 아무것도 남은것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내안의 가룟유다의 목소리가 들릴것입니다. 힘이 빠지고 내 선택에 발등을 찍고 싶고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말자는 자조석인 다짐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순간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5. 그를 가만 두어라예수님의 목소리 입니다. 그를 가만 두어라 나의 장례를 위하여 간직하게 하라고 하십니다.여기에서 “간직하게 하라”는 표현은성경원문을 번역하는 과정의 특성상 다른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는데 나의 장례를 위해 간직한 것이다 라는 뜻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어떤 번역이든 마리아의 행동에 예수님께서 의미를 부여해 주십니다. 가룟유다의 책망의 목소리로부터 예수님의 목소리가 마리아를 감싸시고 보호해주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이 돌아가실때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장례를 염두해두고 향유를 부었다고 할만한 근거도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의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주신것입니다.마리아가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부여해 주십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택, 믿음의 결단, 믿음의 행동 끝에서도 눈에 보이는 결과로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응답이 되는 기도가 의미가 있고 깨닫는것이 있는 성경읽기가 의미가 있고나의 수고를 알아주는 봉사가 의미가 있고상대방이 변하는 희생이 의미가 있고성도수가 많아지는 사역이 의미가 있고사람들이 감동하고 인정하는 설교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사실 이것 때문에 긴장됩니다. 마치 아파트 값이 올라야 대출이자를 갚는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마리아 보인 헌신의 결과는 소리도 없습니다.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책망받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음성으로만 인정받고 보호 받습니다. 우리 주님이 알아주십니다. 은혜가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음성이 안들리다는 것입니다. 바로 곁에 예수님이 안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흔들리는 믿음으로 매 순간 의미부여를 하며 가룟유다의 목소리와 싸우기는 힘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이 능력이고 말씀이 생명입니다.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우리의 헌신을 지켜주실것입니다. ------------------------------나눔질문2내가 한 믿음의 선택, 믿음의 결단, 믿음의 헌신, 믿음의 행동을 책망하는 가룟유다의 목소리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목소리로 보호 받아야할 믿음의 행동과 헌신은 무엇입니까? 이제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가장 귀한것을 드려도 부족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내가 놓을 수 없는 결코 버릴 수 없는 것까지라도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나의 의지로 힘들 수 있습니다.예수님이 나의 모든것 되는 은혜를 주시도록 그앞에 나 자신을 내어 드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 합니다. 두번째 내가 한 믿음의 선택과 결단과 행동과 헌신에 후회 하지 않도록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성경을 읽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하며 기도 합니다. [ 청소년부 예배 ]마리아의 향유 옥합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았다는 것헌신의 의미헌신에 대한 보상가룟유다의 책망예수님의 음성예수님을 믿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복은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그 자체이다.예수님을 믿어서, 헌신해서 얻은 무언가 때문에 좀더 좋고 좀더 행복해 진다면그걸로 인해 기쁘고 행복해진만큼예수님 자체로 인한 기쁨은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10억짜리 스포츠카를 선물로 받았는데 그 안에 핸드폰 번호를 적을 수 있는 스티커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때문에 그 기쁨이 더 커졌다는 것과 비슷한것이다. 현실은 가혹하고 우리는 따듯한 집과 음식이 필요한 존재임에 틀림없지만그것보다 훨씬 더 절박하고 간절히 필요한것은바로 영혼의 ㄱ이것이 채워지는 것은 배고픔이 채워지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영혼에 쉼을 주기에그 감사함을 잊을 수 없다. 다만 그것을 느낄만큼 영혼의 굶주림을 느끼는자가 많지 않을 뿐이다.
주제 1주제 112장은 그 유명한 마리아의 향유 옥합 이야기가 나옵니다. 목사님께서 저를 위해 남겨두신 본문이라 더 특별한 본문이 되었네요.주제 1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장면은 4복음서 모든 곳에 등장합니다. 마태,마가,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고 눅7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또 다른 여인과 향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 복음과 마태 마가복음이 이야기를 기록한 방식에서 다소 다른 부분을 보이고 있습니다. 첫번째 차이점은 마태마가복음에서는 베다니라는 동네이름만 나옺만 요한복음에서는 바로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동네라는 설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말해주는 것입니다. 두번째 차이점은 마태 마가복음에서는 마리아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여인으로만 기록되어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을 바로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야기는 지난주에 다루었던 11장에 있는 나사로이야기의 연장선 상에서 이해를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여겨집니다. 아주 짧게 11장의 내용을 정리하고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나사로 오빠와 마르다 언니와 마리아 형제가 함께 살았습니다. 오빠가 많이 아팠고 위중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과 이틀거리에 떨어진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까운 형제와 같던 그들의 요청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일이라고 하시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신채 빨리 와달라는 요청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틀이나 더 그곳에 더 머물러 계십니다.. 특별한 일이나 급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 사이 나사로는 죽었고 죽은지 4일이나 지난 어느날 장례식장에 찾아 오셨습니다. 수많은 기적으로 사람들을 도우신 예수님, 그렇게 신뢰하고 사랑하던 예수님의 외면과 방치속에 마리아 마르다 자매는 사랑하는 오빠를 잃었습니다. 두 자매는 예수님이 찾아 오셨을때 서운한 마음 감출 수 없었습니다. 오빠가 죽고 예수님이 오실때까지 4일동안 오빠의 죽음으로 비통함에 빠져있었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고치고도 남을 능력의 예수님께 철저하게 방치되었다는 사실은 두 자매에게 더 큰 상실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오빠의 죽음 이후 4일이라는 시간은 그동안의 신뢰가 무너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느긋하게 찾아오시는것 처럼 보이는 예수님께 두 자매 모두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고 같은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거라고, 이런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거라고. 심지어 마르다는 돌문 앞에선 예수님께 썩어서 냄새가 진동하기만 할텐데 이제 와서 왜 그러시냐는 말까지 합니다. 두 자매는 예수님의 능력도 알고있습니다.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것도 알고 있습니다.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뜻과 선택과 행동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오빠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예수님만 바라보다 예수님만 기다리다 오빠를 잃어버렸습니다. 죽어버린 오빠를 무덤에 묻고 ..4일이나 지난뒤 찾아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들이었지만 예수님으로 야기된 또는 예수님에 의해 방치된 상황까지 받아들이기는 너무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고 예수님을 적대시 하던 유대인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드디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단합니다. 나사로의 기적은 예수님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잠시 에브라임이라는 곳으로 피해 가십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일주일 앞둔 오늘 다시 베다니 동네로 찾아오셨고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는 숨만쉬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사로만 보면 누가 살렸는지를 떠올릴 테니까요.나사로가 뀌는 방귀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사로는 존재 자체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와 마르다 자매는깊은 상실감과 배신감,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 사이에서 일어나는 처절한 내면의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회복되었습니다.이제 두 자매에게는 왠만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사라질 일은 없을것입니다. 어떤 환경 어떤 상황이 와도 예수님을 신뢰하는 제자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회의 지도자이자 권력층이었던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하고 심지어 나사로 까지 죽이려고 하는 상황속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열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변화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는 잔치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마리아입니다.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 털로 그의 발을 닦습니다. 한근으로 번역되어있는 이 단위의 무게는 300그람이 조금 넘는 무게입니다. 하지만 나드 향유는 지극히 비싼것이었습니다. 수입품이었죠. 인도에서 자라는 나드라는 식물의 뿌리에서 소량 추출하여 만든 향유였기 때문에 귀한것이었고 300그람정도면 그 당신 노동자의 1년 연봉에 해당되는 가치였습니다.그리고 또 한가지 베다니라는 동네 이름은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울의 강남과도 같은 예루살렘성과 3키로 정도 떨어진 광야근처 마을이었습니다. 전세는 꿈이고 월세도 내기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살던 , 그 시대 가장 어려운 자들이 주로 모여사는 가난한 동네인것을 감안하면 오늘 마리아가 부어버린 이 향유의 상대적인 가치는 훨씬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마치 과부가 헌금한 두 렙돈은 아주 적은 돈이었지만 과부에게는 전부였던 것처럼요.1. 왜 마리아는 이 비싼 향유를 부었을까요? 마리아가 어떻게 그렇게 비싼 향유를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다락방까지 갖춘 마가와 같은 사람에겐 이정도의 향유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겠지만 가난한 동네에 살고 있는 마리아에게 있어서 자신이 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표현은 물질적인 가치였을지 모릅니다. 나사로의 기적을 경험하기까지 깊은 상실감과 배신감과 싸웠을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흔들렸던 자신에 대한 민망함과 예수님에 대한 미안함을 깊이 느꼈을 마리아 입니다. 그리고 감정과 판단을 넘어선 예수님을 향한 무한 신뢰를 얻게된 마리아 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마리아가 예수님께 자기 자신을 드리는 행위인것입니다. 2. 머리털로 발을 닦습니다. 마태,마가복음에서는 머리에 부었다고 했지만 오늘 요한 복음에서는 발에 부었다고 합니다. 머리에 부어서 발까지 흘러내렸다고 이해하기도 하지만 오늘 이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의 초점은 발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손님의 발을 닦는 것은 사실 노예의 일이었고 노예중에서도 가장 천하고 별볼일 없는 어린 노예들이 맡아서 하던 행동이었습니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낮은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예수님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도 드러냅니다. 그 당시 여자의 긴 머리는 여자의 영광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귀하고 비밀스럽고 소중한 의미를 지녔기에 함부로 남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머리카락이었습니다. 천으로 가리고 다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당황스럽고 괴상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이 행동은 그당시의 문화적 의미를 생각해보면 마리아 입장에서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린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신발끈을 묶는것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면 자신의 낮음과 예수님의 높으심을 고백하던 모습과 비슷합니다. 나에게 가장 영광스러운것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발을 닦는 용도로 쓰기에는 부족할만큼 예수님은 존귀하신 분이고 고마우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발이 아닌 다른 사람의 발이었다면 먼지 가득뭍어있고 굳은살 갈라진 발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발이었기에 나의 가장 큰 귀한 것을 이용해 닦을지라도 부족하고 죄송하고 감사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기적이 가지는 가장 놀라운 의미는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경험하며 오늘 등장인물들에게 일어난 변화입니다.예수님을 가장 귀한 존재로 여기게 되는 자신의 모든것도 아깝지않은 예수님을 향한 마음을 소유하게된 이들의 마음의 변화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피같은 돈과 금같은 시간을 들여서 누구의 발을 닦아 주고 있습니까? 그 발이 자녀의 발입니까? 배우자의 발입니까? 직장에서 만난 동료들의 발입니까? 교회 안에 지체들의 발 입니까? 부모님의 발입니까? 그발이 예수님의 발일 수 있습니다. 3. 머리털러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소유인 향유만 부었을 때가 아니라 자신의 일부이자 자기 자신이 머리카락으로 닦으니 향유냄새가 가득하다고 합니다. 잔치집이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도 보고싶고 나사로도 보고싶어 소문의 주인공들을 직접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마리아의 향유냄새가 모여있는 모든 사람의 후각을 자극하고 값비싼 향기가 모인 사람들을 향에 취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궁금해집니다. 마리아의 향유 이야기가 한 사람 한 사람 전해집니다. 향기와 함께 마리아의 헌신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전해집니다. 모두가 다시한번 나사로의 기적을 이야기 하지만 나사로가 주인공인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로를 살리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향이 퍼져나가는것 처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복된 소식, 생명의 소식도 퍼져나갑니다. -----------------------------나눔질문 1. 내가 닦아드리고 있는 예수님의 발은 무엇입니까? 나는 무엇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고 싶습니까? 2. 나의 자존심, 나의 억울함, 마지막까지 양보할 수 없는, 건드려서는 안되는 상처가 나의 향유이자 머리카락 나의 가장 귀한것 일 수 있습니다. 누구도 건드릴수 없는 , 만질수도 없고 볼수 없는 것, 마리아의 머리카락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내어 놓고 그것으로 발을 닦을 때 향이 퍼져 나갑니다. 저사람이 왜 그래? 사람이 변했어! 라는 사람들의 수근거림 안에 예수님의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소리도 없습니다. 눈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느끼고 취하는 향이 흘러갑니다. 4. 삼백데나리온이런 놀라운 은혜의 순간에 가룟 유다의 목소리가 마리아에게 찬물을 끼얹습니다. 삼백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합니다. 우리가 헌신하는 순간에 늘 따라오는 목소리입니다. 꼭 그 방법이어야 하냐고 책망합니다. 제사에 쓰이는 관유도 아니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물로 씻으면 충분할 발을 닦기위해 향유를 붓는게 말이 되냐고 책망하는 소리입니다. 이 목소리는 강력합니다. 눈으로 확인가능한 숫자를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득력있습니다.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뭐라 대꾸를 할 수가 없습니다.이 목소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가족의 목소리 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일 수도 있지만 내 내면의 목소리 일 수도 있습니다. 결의에 차있고 마음의 감동에 이끌려 헌신하는 순간에는 조용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뒤 향기가 사라지듯 모든것이 사라져버리고 아무것도 남은것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목소리입니다. 마음을 다해 섬겼던 사람들이 공동체를 떠나고 믿음을 포기하고 때로는 나를 미워하기 까지 합니다. 미련없이 돌아섭니다. 나의 모든 노력을 허무하게 만드는것 같은 자녀의 모습을 보는것 같은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나의 모든것을 쏟아 부었는데 아무것도 남은것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내안의 가룟유다의 목소리가 들릴것입니다. 힘이 빠지고 내 선택에 발등을 찍고 싶고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말자는 자조석인 다짐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순간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5. 그를 가만 두어라예수님의 목소리 입니다. 그를 가만 두어라 나의 장례를 위하여 간직하게 하라고 하십니다.여기에서 “간직하게 하라”는 표현은성경원문을 번역하는 과정의 특성상 다른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는데 나의 장례를 위해 간직한 것이다 라는 뜻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어떤 번역이든 마리아의 행동에 예수님께서 의미를 부여해 주십니다. 가룟유다의 책망의 목소리로부터 예수님의 목소리가 마리아를 감싸시고 보호해주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이 돌아가실때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장례를 염두해두고 향유를 부었다고 할만한 근거도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의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주신것입니다.마리아가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부여해 주십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택, 믿음의 결단, 믿음의 행동 끝에서도 눈에 보이는 결과로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응답이 되는 기도가 의미가 있고 깨닫는것이 있는 성경읽기가 의미가 있고나의 수고를 알아주는 봉사가 의미가 있고상대방이 변하는 희생이 의미가 있고성도수가 많아지는 사역이 의미가 있고사람들이 감동하고 인정하는 설교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사실 이것 때문에 긴장됩니다. 마치 아파트 값이 올라야 대출이자를 갚는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마리아 보인 헌신의 결과는 소리도 없습니다.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책망받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음성으로만 인정받고 보호 받습니다. 우리 주님이 알아주십니다. 은혜가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음성이 안들리다는 것입니다. 바로 곁에 예수님이 안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흔들리는 믿음으로 매 순간 의미부여를 하며 가룟유다의 목소리와 싸우기는 힘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이 능력이고 말씀이 생명입니다.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우리의 헌신을 지켜주실것입니다. ------------------------------나눔질문2내가 한 믿음의 선택, 믿음의 결단, 믿음의 헌신, 믿음의 행동을 책망하는 가룟유다의 목소리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목소리로 보호 받아야할 믿음의 행동과 헌신은 무엇입니까? 이제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가장 귀한것을 드려도 부족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내가 놓을 수 없는 결코 버릴 수 없는 것까지라도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나의 의지로 힘들 수 있습니다.예수님이 나의 모든것 되는 은혜를 주시도록 그앞에 나 자신을 내어 드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 합니다. 두번째 내가 한 믿음의 선택과 결단과 행동과 헌신에 후회 하지 않도록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성경을 읽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하며 기도 합니다. [ 청소년부 예배 ]마리아의 향유 옥합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았다는 것헌신의 의미헌신에 대한 보상가룟유다의 책망예수님의 음성예수님을 믿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복은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그 자체이다.예수님을 믿어서, 헌신해서 얻은 무언가 때문에 좀더 좋고 좀더 행복해 진다면그걸로 인해 기쁘고 행복해진만큼예수님 자체로 인한 기쁨은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10억짜리 스포츠카를 선물로 받았는데 그 안에 핸드폰 번호를 적을 수 있는 스티커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때문에 그 기쁨이 더 커졌다는 것과 비슷한것이다. 현실은 가혹하고 우리는 따듯한 집과 음식이 필요한 존재임에 틀림없지만그것보다 훨씬 더 절박하고 간절히 필요한것은바로 영혼의 ㄱ이것이 채워지는 것은 배고픔이 채워지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영혼에 쉼을 주기에그 감사함을 잊을 수 없다. 다만 그것을 느낄만큼 영혼의 굶주림을 느끼는자가 많지 않을 뿐이다.
12장은 그 유명한 마리아의 향유 옥합 이야기가 나옵니다. 목사님께서 저를 위해 남겨두신 본문이라 더 특별한 본문이 되었네요.
12장은 그 유명한 마리아의 향유 옥합 이야기가 나옵니다. 목사님께서 저를 위해 남겨두신 본문이라 더 특별한 본문이 되었네요.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장면은 4복음서 모든 곳에 등장합니다.
마태,마가,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고 눅7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또 다른 여인과 향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 복음과 마태 마가복음이 이야기를 기록한 방식에서 다소 다른 부분을 보이고 있습니다.
첫번째 차이점은
마태마가복음에서는 베다니라는 동네이름만 나옺만 요한복음에서는 바로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동네라는 설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말해주는 것입니다.
두번째 차이점은 마태 마가복음에서는 마리아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여인으로만 기록되어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을 바로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야기는 지난주에 다루었던 11장에 있는 나사로이야기의 연장선 상에서 이해를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여겨집니다.
아주 짧게 11장의 내용을 정리하고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나사로 오빠와 마르다 언니와 마리아 형제가 함께 살았습니다. 오빠가 많이 아팠고 위중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과 이틀거리에 떨어진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까운 형제와 같던 그들의 요청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일이라고 하시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신채 빨리 와달라는 요청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틀이나 더 그곳에 더 머물러 계십니다..
특별한 일이나 급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 사이 나사로는 죽었고 죽은지 4일이나 지난 어느날 장례식장에 찾아 오셨습니다.
수많은 기적으로 사람들을 도우신 예수님, 그렇게 신뢰하고 사랑하던 예수님의 외면과 방치속에 마리아 마르다 자매는 사랑하는 오빠를 잃었습니다.
두 자매는 예수님이 찾아 오셨을때 서운한 마음 감출 수 없었습니다.
오빠가 죽고 예수님이 오실때까지 4일동안 오빠의 죽음으로 비통함에 빠져있었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고치고도 남을 능력의 예수님께 철저하게 방치되었다는 사실은 두 자매에게 더 큰 상실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오빠의 죽음 이후 4일이라는 시간은 그동안의 신뢰가 무너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느긋하게 찾아오시는것 처럼 보이는 예수님께 두 자매 모두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고 같은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거라고, 이런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거라고.
심지어 마르다는 돌문 앞에선 예수님께 썩어서 냄새가 진동하기만 할텐데 이제 와서 왜 그러시냐는 말까지 합니다.
두 자매는 예수님의 능력도 알고있습니다.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것도 알고 있습니다.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뜻과 선택과 행동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오빠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예수님만 바라보다 예수님만 기다리다 오빠를 잃어버렸습니다.
죽어버린 오빠를 무덤에 묻고 ..4일이나 지난뒤 찾아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들이었지만 예수님으로 야기된 또는 예수님에 의해 방치된 상황까지 받아들이기는 너무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고 예수님을 적대시 하던 유대인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드디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단합니다.
나사로의 기적은 예수님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잠시 에브라임이라는 곳으로 피해 가십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일주일 앞둔 오늘 다시 베다니 동네로 찾아오셨고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는 숨만쉬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사로만 보면 누가 살렸는지를 떠올릴 테니까요.
나사로가 뀌는 방귀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사로는 존재 자체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와 마르다 자매는
깊은 상실감과 배신감,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 사이에서 일어나는 처절한 내면의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이제 두 자매에게는 왠만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사라질 일은 없을것입니다. 어떤 환경 어떤 상황이 와도 예수님을 신뢰하는 제자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회의 지도자이자 권력층이었던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하고 심지어 나사로 까지 죽이려고 하는 상황속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열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변화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는 잔치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마리아입니다.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 털로 그의 발을 닦습니다.
한근으로 번역되어있는 이 단위의 무게는 300그람이 조금 넘는 무게입니다. 하지만 나드 향유는 지극히 비싼것이었습니다. 수입품이었죠.
인도에서 자라는 나드라는 식물의 뿌리에서 소량 추출하여 만든 향유였기 때문에 귀한것이었고 300그람정도면 그 당신 노동자의 1년 연봉에 해당되는 가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베다니라는 동네 이름은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울의 강남과도 같은 예루살렘성과 3키로 정도 떨어진 광야근처 마을이었습니다.
전세는 꿈이고 월세도 내기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살던 , 그 시대 가장 어려운 자들이 주로 모여사는 가난한 동네인것을 감안하면
오늘 마리아가 부어버린 이 향유의 상대적인 가치는 훨씬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과부가 헌금한 두 렙돈은 아주 적은 돈이었지만 과부에게는 전부였던 것처럼요.
1. 왜 마리아는 이 비싼 향유를 부었을까요?
마리아가 어떻게 그렇게 비싼 향유를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다락방까지 갖춘 마가와 같은 사람에겐 이정도의 향유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겠지만 가난한 동네에 살고 있는 마리아에게 있어서 자신이 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표현은 물질적인 가치였을지 모릅니다. 나사로의 기적을 경험하기까지 깊은 상실감과 배신감과 싸웠을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흔들렸던 자신에 대한 민망함과 예수님에 대한 미안함을 깊이 느꼈을 마리아 입니다. 그리고 감정과 판단을 넘어선 예수님을 향한 무한 신뢰를 얻게된 마리아 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마리아가 예수님께 자기 자신을 드리는 행위인것입니다.
2. 머리털로 발을 닦습니다.
마태,마가복음에서는 머리에 부었다고 했지만 오늘 요한 복음에서는 발에 부었다고 합니다. 머리에 부어서 발까지 흘러내렸다고 이해하기도 하지만 오늘 이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의 초점은 발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손님의 발을 닦는 것은 사실 노예의 일이었고 노예중에서도 가장 천하고 별볼일 없는 어린 노예들이 맡아서 하던 행동이었습니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낮은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예수님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도 드러냅니다.
그 당시 여자의 긴 머리는 여자의 영광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귀하고 비밀스럽고 소중한 의미를 지녔기에 함부로 남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머리카락이었습니다. 천으로 가리고 다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당황스럽고 괴상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이 행동은 그당시의 문화적 의미를 생각해보면 마리아 입장에서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린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신발끈을 묶는것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면 자신의 낮음과 예수님의 높으심을 고백하던 모습과 비슷합니다.
나에게 가장 영광스러운것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발을 닦는 용도로 쓰기에는 부족할만큼 예수님은 존귀하신 분이고 고마우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발이 아닌 다른 사람의 발이었다면 먼지 가득뭍어있고 굳은살 갈라진 발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발이었기에 나의 가장 큰 귀한 것을 이용해 닦을지라도 부족하고 죄송하고 감사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기적이 가지는 가장 놀라운 의미는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경험하며 오늘 등장인물들에게 일어난 변화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귀한 존재로 여기게 되는 자신의 모든것도 아깝지않은 예수님을 향한 마음을 소유하게된 이들의 마음의 변화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피같은 돈과 금같은 시간을 들여서 누구의 발을 닦아 주고 있습니까? 그 발이 자녀의 발입니까? 배우자의 발입니까? 직장에서 만난 동료들의 발입니까? 교회 안에 지체들의 발 입니까? 부모님의 발입니까? 그발이 예수님의 발일 수 있습니다.
3. 머리털러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소유인 향유만 부었을 때가 아니라 자신의 일부이자 자기 자신이 머리카락으로 닦으니 향유냄새가 가득하다고 합니다.
잔치집이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도 보고싶고 나사로도 보고싶어 소문의 주인공들을 직접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마리아의 향유냄새가 모여있는 모든 사람의 후각을 자극하고 값비싼 향기가 모인 사람들을 향에 취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궁금해집니다.
마리아의 향유 이야기가 한 사람 한 사람 전해집니다. 향기와 함께 마리아의 헌신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전해집니다.
모두가 다시한번 나사로의 기적을 이야기 하지만 나사로가 주인공인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로를 살리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향이 퍼져나가는것 처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복된 소식, 생명의 소식도 퍼져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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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질문
1. 내가 닦아드리고 있는 예수님의 발은 무엇입니까? 나는 무엇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고 싶습니까?
2. 나의 자존심, 나의 억울함, 마지막까지 양보할 수 없는, 건드려서는 안되는 상처가 나의 향유이자 머리카락 나의 가장 귀한것 일 수 있습니다.
누구도 건드릴수 없는 , 만질수도 없고 볼수 없는 것, 마리아의 머리카락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내어 놓고 그것으로 발을 닦을 때 향이 퍼져 나갑니다.
저사람이 왜 그래? 사람이 변했어! 라는 사람들의 수근거림 안에 예수님의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소리도 없습니다. 눈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느끼고 취하는 향이 흘러갑니다.
4. 삼백데나리온
이런 놀라운 은혜의 순간에 가룟 유다의 목소리가 마리아에게 찬물을 끼얹습니다.
삼백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합니다.
우리가 헌신하는 순간에 늘 따라오는 목소리입니다.
꼭 그 방법이어야 하냐고 책망합니다. 제사에 쓰이는 관유도 아니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물로 씻으면 충분할 발을 닦기위해 향유를 붓는게 말이 되냐고 책망하는 소리입니다.
이 목소리는 강력합니다. 눈으로 확인가능한 숫자를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득력있습니다.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뭐라 대꾸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목소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가족의 목소리 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일 수도 있지만 내 내면의 목소리 일 수도 있습니다.
결의에 차있고 마음의 감동에 이끌려 헌신하는 순간에는 조용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뒤 향기가 사라지듯 모든것이 사라져버리고 아무것도 남은것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목소리입니다.
마음을 다해 섬겼던 사람들이 공동체를 떠나고 믿음을 포기하고 때로는 나를 미워하기 까지 합니다. 미련없이 돌아섭니다.
나의 모든 노력을 허무하게 만드는것 같은 자녀의 모습을 보는것 같은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나의 모든것을 쏟아 부었는데 아무것도 남은것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내안의 가룟유다의 목소리가 들릴것입니다.
힘이 빠지고 내 선택에 발등을 찍고 싶고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말자는 자조석인 다짐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순간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5. 그를 가만 두어라
예수님의 목소리 입니다.
그를 가만 두어라 나의 장례를 위하여 간직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간직하게 하라”는 표현은성경원문을 번역하는 과정의 특성상 다른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는데
나의 장례를 위해 간직한 것이다 라는 뜻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어떤 번역이든 마리아의 행동에 예수님께서 의미를 부여해 주십니다.
가룟유다의 책망의 목소리로부터 예수님의 목소리가 마리아를 감싸시고 보호해주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이 돌아가실때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장례를 염두해두고 향유를 부었다고 할만한 근거도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의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주신것입니다.
마리아가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부여해 주십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택, 믿음의 결단, 믿음의 행동 끝에서도 눈에 보이는 결과로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응답이 되는 기도가 의미가 있고
깨닫는것이 있는 성경읽기가 의미가 있고
나의 수고를 알아주는 봉사가 의미가 있고
상대방이 변하는 희생이 의미가 있고
성도수가 많아지는 사역이 의미가 있고
사람들이 감동하고 인정하는 설교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사실 이것 때문에 긴장됩니다.
마치 아파트 값이 올라야 대출이자를 갚는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마리아 보인 헌신의 결과는 소리도 없습니다.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책망받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음성으로만 인정받고 보호 받습니다.
우리 주님이 알아주십니다.
은혜가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음성이 안들리다는 것입니다.
바로 곁에 예수님이 안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흔들리는 믿음으로 매 순간 의미부여를 하며 가룟유다의 목소리와 싸우기는 힘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이 능력이고 말씀이 생명입니다.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우리의 헌신을 지켜주실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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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질문2
내가 한 믿음의 선택, 믿음의 결단, 믿음의 헌신, 믿음의 행동을 책망하는 가룟유다의 목소리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목소리로 보호 받아야할 믿음의 행동과 헌신은 무엇입니까?
이제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가장 귀한것을 드려도 부족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내가 놓을 수 없는 결코 버릴 수 없는 것까지라도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나의 의지로 힘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것 되는 은혜를 주시도록 그앞에 나 자신을 내어 드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 합니다.
두번째 내가 한 믿음의 선택과 결단과 행동과 헌신에 후회 하지 않도록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성경을 읽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하며 기도 합니다.
[ 청소년부 예배 ]
마리아의 향유 옥합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았다는 것
헌신의 의미
헌신에 대한 보상
가룟유다의 책망
예수님의 음성
예수님을 믿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복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그 자체이다.
예수님을 믿어서, 헌신해서 얻은 무언가 때문에
좀더 좋고 좀더 행복해 진다면
그걸로 인해 기쁘고 행복해진만큼
예수님 자체로 인한 기쁨은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10억짜리 스포츠카를 선물로 받았는데 그 안에 핸드폰 번호를 적을 수 있는 스티커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때문에 그 기쁨이 더 커졌다는 것과 비슷한것이다.
현실은 가혹하고
우리는 따듯한 집과 음식이 필요한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절박하고 간절히 필요한것은
바로 영혼의 굶주림이며 영혼의 안식처이다.
이것이 채워지는 것은 배고픔이 채워지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고통에서 건져주는것 이기에
감사함을 잊을 수 없다.
다만
영혼의 지침과 굶주림을 느끼는 자가 적을 뿐이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