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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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어나라 2. 돌아오라 3. 용기를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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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봄 말씀축제 전 금요기도회 참석 - 차량 운행
2. 봄 말씀축제 후 차량 운행 (토요일 오후 7시부터 시작 - 더 일찍오면 좋은 일이..)
3. 3월 양육훈련 구글 설문지 조사
이주 만에 만나네요.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고 기도해줘서 고마워요. 이제 저는 두려울 것이 없어요. 기대해주세요. 자주 전화해서 귀찮게 할지도 몰라요. 제 번호 차단하지 마세요. 차단하거나 안 받으면 후회하게 만들어 줄거에요.
이 주 동안 저도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는데 이런 마음이 들더라구요. “아 편하다” 편해지니까 점점 몸이 뒤로 눕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깨달았어요. 집에서 예배 드리는 것도 좋지만 교회에서 함께 호흡 하는 것이 최고다. 이렇게 모여서 찬양하고 예배 드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축복이다. 즐거움이다. 그리고 순모임도 꼭 해야겠다. 혼자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우리는 꼭 순모임을 하겠다. 교회에서 소모임 하는 것이 금지가 아니기에 방역수칙 지키면서 꼭 해야겠다. 예배를 드리며 주신 은혜를 반드시 나누고 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던 이주였어요.
돌아오는 주 토요일부터 우리 뭐하죠? 봄 말씀축제가 시작이 되죠. 사실 청년부에서 대대적으로 기도하면서 준비하고 했으면 더 분위기가 났을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냥 와서 즐기세요. 여러분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준비하며 말씀을 준비하고 계시는 두 분의 강사목사님을 통해 일하실 하나님의 말씀을 와서 즐기세요. 주중에 만나고 연락을 했는데요. 여러분을 위해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려서 칼날을 갈고 있더라구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축제처럼 꽂아주려고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계시더라구요. 와서 즐기세요. 축제를 즐기기를 바래요.
봄 말씀축제를 시작으로 지난 2년 동안 잠시 휴식기를 가졌던 순모임을 시작하려 해요. 봄 말씀축제는요. 그냥 단순히 강사를 모셔놓고 말씀을 듣는 시간이 아니에요. 5명의 설교자가 그냥 하던데로 설교하는 시간이 아니에요. 여러분을 위한 시간이에요. 여러분을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축제를 즐기는 시간이에요. 축제와 함께 순모임이 시작되는거에요. 와서 즐기고 말씀 듣고 함께 기도하고 순모임도 하면서 여러분 마음 속 깊이 숨겨놓았던 하나님을 향한 열망과 모임에 대한 갈망을 풀어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래요.
이번 주 토요일 오후 7시부터 시작이에요. 그 전에 오세요. 와서 기도로 준비하세요. 같이 이야기하면서 분위기를 끌어올리세요. 여러분을 향해 준비한 하나님의 축제를 꼭 즐기는 시간 되기를 바래요.

일어나라

지지난주에 함께 나눴던 말씀을 잠깐 떠올려 볼까요?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던 한 가정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나눴었죠. 하나님은 나의 왕입니다! 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사람.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던 가정이 맡겨주신 모든 것들을 다 뒤로하고 내려놓고 길을 떠났죠. 엘리멜렉 차라리 혼자 떠나지. 그의 선택이 온 가정의 삶을 뒤흔들었어요. 모압 여인이었던 오르바와 룻의 삶 또한 완전히 흔들어버렸어요.
엘리멜렉이 혼자 떠나지 않고 가족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간 이유는 그곳이 좋아보였기 때문이죠. 고지대이고 비도 많이 오고 물이 많기로 소문난 모압만 가면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이 흉년의 시기를 벗어나 먹을 것이 풍족하게 있을 것 같아 보였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묻지 않고 바로 선택하고 떠난 것이죠.
여러분 우리 1월 달에 성막에 대한 말씀을 나눌 때 예배는 나와 하나님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시간이라고 했었는데 기억하고 있죠? 매 주일 예배 시간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 갔나요? 아니 오늘 예배를 생각해봐요. 어떤 예배를 썼나요? 예배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또 하나님과 나의 이야기를 제대로 써내려가지 못하는 것은 일주일의 나의 삶의 모습 때문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 저와 여러분은 일주일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요?
정말 귀중하고 소중한 이 예배 시간에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를 증명하는 어떤 이야기도 써내려가지 못한다면요. 말씀이 잘 들리지 않고 집중이 되지 않는다면요. 그것은 나도 모르게 하나님보다 세상이라는 모압 땅을 선택하고 살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보다 모압과 더 친밀하게 지냈기 때문일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말씀 축제를 기대해야 해요. 여러분을 위해 칼을 갈며 아주 날카롭게 날을 세운 말씀을 들고 이 자리에 나오는 강사님들을 통해, 모압이 아닌 하나님을 선택하는 내가 되기를 기대해야 하는 것이에요. 지난 2년 동안 눌러왔던 여러분들의 울분을 토해내고 쏟아내는 시간이 되어야 해요. 말씀을 붙잡고 기도함으로 모압이 아닌 하나님을 선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만 해요.
모압이 아닌 하나님을 선택하는 삶.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삶을 살기를 선택해야 해요. 그런데 사실 잘 생각해보면요. 저와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과 가까워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친밀하게 붙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갈 뿐이에요. 내가 하나님과 가까웠구나! 하나님은 늘 내 옆에 있었구나! 그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정리하고 소화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바울 vs 요나

바울이 다메섹으로 사람들을 잡으러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죠. 그리고 사람이 완전히 변해버렸잖아요.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 언어 그리고 행동 진짜 모든 것들이 바뀌었어요. 이렇게 사람이 한 번에 바뀌는 것이 쉬울까요? 아니요. 어려워요. 우리는요. 나에게 익숙한 것들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있어요. 그래서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깨달아도 그것을 유지할 수 없는거에요. 그 은혜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있어요.
사도행전 9장 9절을 보면요.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울은 이 4일이라는 시간동안, 자신의 모든 삶을 다 돌아 본 것이에요. 먹고 마시는 시간도 포기한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고, 많은 공부를 한 똑똑한 사람인데! 그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나인데,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그 사람이 구세주라고? 말도 안돼. 그래서 나는 내 소신대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거지?’ ‘예수? 그가 진짜 구세주인가? 그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가?’ 이런 수많은 번뇌가 그 안에 있었던 것이에요.
그 4일 동안 철저히 하나님 앞에 자신을 고백하고, 모든 것을 쏟아내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처절한 고통 가운데 깨달은 것이에요. 그래서 바울의 삶이 변화 된 것이죠. 바울의 삶이 변하고 일어난 일은 무엇인가요?
부족함 없이 살던 바울이었어요. 모두의 지도자였고, 모두가 선망하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요? 자신의 모든 과거를 버리고 새롭게 시작한 지금은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바울을 신뢰하지 않아요. “예수님 믿는 척하다가 우리가 모였을 때 한번에 다 잡아가려는 것 아니야?” “쟤 왜 저래? 무슨 꿍꿍이가 있는거야?”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단 말이에요. 그리구요? 로마 시민. 당시 로마가 그 지방의 모든 패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은 어딜 가던지 프리패스였어요. 예전에 아내랑 상하이 디즈니랜드 갔거든요? 사람이 너무 많은거에요. 정말 타고 싶은 놀이기구가 있는데 그냥 기다렸다가는 3-4시간은 버려야겠는거에요. 그래서 보니까 어플을 이용해서 신청하면 프리패스로 바로 탈 수 있데요. 프리패스. 줄 서지 않고 그냥 그대로 통과 시켜주는 것이잖아요?. 바울 그런 사람이었어요.
지금은요?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정한 지금은요? 예수님 전하다 돌에 맞아 기절도 하구요. 곤장도 맞아요. 이전과는 totally different life.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살게 되었어요. 나와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거죠. 그의 삶의 영역은 그대로였어요. 하지만 삶을 대하고 살아가는 태도와 마음이 바뀐거죠.
바울처럼 이렇게 완전히 바뀌어버린 사람이 또 있죠. 바로 요나에요. 어쩌면 우리는 바울보다 요나와 더 비슷한 사람일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나타나셔서, 니느웨로 가서 말을 전하라! 라고 하셨어요. 근데 요나가 어떻게 했죠? 니느웨? 가 아니라 다시스로 갔죠. 왜 다시스로 갔어요? 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죠?
그는 보기에 좋은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에요. 가서 니느웨에게 “너희가 너무 많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신다고 하더라.”라고 말하는 것보다, 차라리 말씀을 전하지 않아서 그들이 망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어요. 왜?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고,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며 괴롭히는 민족이었거든요. 이참에 하나님이 앗수르를 다 밀어버리시면, 이스라엘은 자유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죠.
우리도 늘 보기에 좋은 것을 선택하죠. ‘딱딱하고 재미없는 설교? 안 들어. 나는 휴대폰 할래. 차라리 잘래’ 이게 우리의 심리이고, 우리가 예배 시간에 선택하는 모습들 중 하나에요. 그래서 요나가 어떻게 됐어요? 요나도 바울처럼 하나님만 처절하게 만나는 시간이 생겼죠. 바울은 눈이 보이지 않았고, 요나는요? 커다란 물고기 배속에 들어갔단 말이에요. 3일이라는 시간 동안 그 곳에서 처절하게 하나님을 찾았어요. 하나님께 부르짖었어요. 이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지 알겠다. 니느웨로 가겠다! 마치 은혜 받은 것 같아요.
3일 후 물고기가 육지에 요나를 토해냈죠. 그리고 니느웨로 갔어요. 요나가 어떻게 했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데로 성을 돌며 최선을 다해 외치지 않고, 그냥 반나절만 걸었어요. 그러면서 “야 망한댄다. 하나님이 너네 멸망시키신데.” 아주 성의 없게 말씀을 전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어도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았어도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내가 집어던져져서 죽는구나 싶었던 그 때에, 물고기 배속에서 말도 되지 않게 3일을 살고, 다시 육지로 나와 살게 된 요나의 모습이 이랬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축제를 통해 분명 은혜 받을거에요. 저는 믿어요. 하나님께서 진짜 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은혜를 쏟아 부어질 것이라고 믿어요. 그 은혜가 유지되느냐 유지되지 않느냐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것이에요. 말씀 축제가 진행되는 3월 한 달이 여러분에게 있어 바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던 4일간의 시간처럼 되기를 바래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셨음을 다시 한번 깨닫고 곱씹어서 소화시켜서 다시 시작하는 우리의 삶이 되길 바래요.
우리는 늘 엘리멜렉과 같이, 요나와 같이 내 눈에 보이는 것 편한 것만 선택하려 해요. 하나님하고는 상관없이 살고 싶어 해요.
바울은요? 내 편한 것을 기꺼이 포기했어요. 자신이 예수님을 전하고 다니기 시작하면, 자신이 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비난 받고 돌 맞고 태장 맞고 잡혀갈 것을 알았어요.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이 너무 좋았어요. 자신이 괴롭힘 당하고 힘든 것보다, 하나님이 더 좋았어요. 그래서 기꺼이 자신의 것들을 다 포기하고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았어요. 매일 자신을 치면서,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 하나님만 따르기 위해 그 분의 은혜를 구하며 살았어요
요나는요? 엘리멜렉은요? 우리는요? 하나님을 위해 받는 불편함? 감수할 생각 없어요. 하나님을 위해 힘들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아요. 그런데 또 굳이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예전에 제가 인도에서 기도회 갔던 이야기 했었잖아요? 오늘은 기도실 이야기 2탄이에요. 지금 우리가 예배 드리고 있는 이 장소의 반을 잘라서 한 쪽은 그리스도인 한쪽은 무슬림들이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예배 어떻게 드리죠? 온 마음을 다해 뛰면서 열정적으로 드리죠. 무슬림 여자애가 기도하는데 그 소리 때문에 자꾸 방해가 돼서 기도가 되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따지기 위해서 왔어요.
따지려고 문을 박차고 들어 온 그 무슬림 여자아이는 그대로 굳어버렸어요. 자신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상황을 보았거든요. 인종을 초월해서 모여 있는 그리스도인의 기도 모임이였어요. 서로의 언어도 달라 의사소통에도 제한이 있었어요. 그런데 얘들이? 기도하면서 울고 서로 부둥켜 안고 기도하고 있는거에요. 서로를 정말로 걱정하고 사랑해주는 모습을 본 것이죠. 자신은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 앞에 선 그 무슬림 여자아이가 굳어버린체로 서 있다가 어떤 행동을 보인줄 알아요?
문을 박차고 들어왔는데, 씩씩거리면서 들어온 그 여자아이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우리를 보며 몸이 굳었고, 자신도 모르고 눈물을 흘리며 대성통곡하기 시작했어요. 자기도 왜 우는지 몰랐데요. 그냥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계속 맴돌았데요. ‘도대체 저 사람들은 왜 우는 것일까? 어떤 신이길래 저들은 저렇게 울고 웃으면서 서로를 사랑해주는 것일까?’ ‘나는 왜 우는 것이지?’
그 여자친구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죠. “나 오늘부터 너희가 믿는 그 예수님을 믿고 싶어. 그 분을 더 알아가고 싶어. 부모님에게 가서 이 알 수 없는 감정을 이야기 할거야. 나 알라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거야. 기도해줘. 내가 죽을지도 몰라.” 지금까지 그 친구와 연락이 되지 않아요. 죽었는지 집에 감금 당했는지 몰라요. 그 여자친구는요.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 거에요.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한거에요. “그냥 비밀로 하고 예수님 믿으면 되지 왜 말해요?” 이런 생각들죠?
말하지 않아도 그 행동에서 들키게 되어 있어요. 정해진 시간마다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메카를 향해 기도해야해요. 그런데 이 여자친구는 그것을 하지 않겠다 말했어요. 무슬림의 제사에 참여하지 않겠다 결단했어요. 그러면 가족이 바로 알아채겠죠. 그래서 자신의 입으로 가서 말한 것이에요.
말씀 축제의 주제는 Re:start에요. 올해 청년부 주제이기도 해요. 지난 2년 동안 잘 견뎌줘서 고마워요. 잘 버텼어요. 잘했어요. 그리고 이제 우리 함께 다시 시작해봐요.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하나님 앞에 나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재정비하는 시간이었을 가졌던거에요. 당연하게 여겼던 예배의 삶의 당연하지 않았음을 깨달았고,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를 돌아보았던 시간을 가졌던 거에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새로 다시 시작해야 해요. 지난 2년 동안 나를 방어하기 위해, 나를 지키기 위해 선택해왔던 나 중심적 신앙을 이제 던져버리고 모두 함께 다시 시작 하는거에요. 기꺼이 나의 편함을 포기하고 이제 다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결단하며 다시 시작해야 해요.

돌아오라

엘리멜렉이 지금 자신의 가족과 함께 지극히 인간적 경험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모압 땅으로 이주했어요. 그리고 어떻게 됐어요?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룐 다 어떻게 되었어요? 죽었죠. 불과 십년 사이에 3명의 남자가 다 죽었어요. 누가 남았죠? 나오미, 오르바 그리고 룻 이렇게 세 명이 남았어요.
룻기 1장 6절을 보면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것”을 듣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제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떠나기 시작했어요
오늘 본문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일어난 사건과 막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의 사건이에요. 7절을 보면 “있던 곳에서 나오고”라고 기록되어 있죠. 6절을 보면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굳이 “있던 곳에서 나오고”라고 또 반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을까요? 강조하기 위해서? 맞아요. 무엇을 강조해요? 이건 단순하게 모압지방을 나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에요. “있던 곳에서 나오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기 위해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그 은혜를 정확하게 깨닫기 위해 “있던 그 곳에서” 나오라 말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올해 앞으로 함께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거에요. “있던 그 곳에서” 에서 나오는거에요. 어디에서? 나라는 사람에게서, 나에게 정말 익숙한 그 곳 “죄와 더 가까워진 나의 삶에서.” 나오면 돼요. 그냥 하나님만 믿고, 내가 하나님과 가까워지지 못하도록 하는 모든 상황 속에서 툴툴 털고 나오면 되는 것이에요. 웹툰, 휴대폰, 게임, 친구, 공부, 가족, 불확실해 보이는 미래로 떨고 있는 나의 모습 등 모든 것들 가운데서 일어나서 털고 나올 수 있는 그 용기를 가지세요. 그 용기를 내지 못하면 절대 “있던 곳” “죄의 영역”에서 나올 수 없어요.
나오미는 이제 용기를 냈어요. 자신들의 편안함을 위해 고향과 하나님을 떠났던 나오미가 이제 용기를 냈어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좌절하고 텅 빈 삶을 살아가던 그녀에게 베들레헴의 이야기가 들려왔고, 이제 돌아가려고 용기를 냈어요.
그전에는 돌아가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까요? 나오미가 남편과 아들들을 다 잃어버린 이후, 베들레헴으로 가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죠. 남편과 아들도 죽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에요. 차라리 베들레헴이라도 회복이 돼서, 먹을 것이 많았다면 자신이 돌아왔을 때 그래도 베들레헴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 그녀를 맞아줬을 거에요. 그런데 지금 모압도 베들레헴도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란 말이에요. 사람들이 자신들을 버리고 나갔던 나오미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돌아온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상상이 돼요? “저것 봐. 지들 잘 살자고 나가더니, 결국 쫄딱 망했네.” 이런 말이 분명 나왔을 것이란 말이에요.
베들레헴 사람들도 여전히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인 것이죠. 그런데 이제 베들레헴의 상황이 회복되고 있어요. 사람들의 마음도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죠. 나오미와 가난한 사람들을 품어 줄 수 있는 심적인 여유도 회복된 것이죠.
우리도 “있던 곳”에서 나와야 해요. 지난 2년 동안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던 그 자리에서 나와야 해요. 용기를 갖고 일어나서 걸어나와야 해요. 있던 곳에서 벗어나야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있던 곳에서 나와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요. 오늘 이 예배의 시간이. 우리가 함께 가질 그 기도의 시간이, 하나님을 향해 한 발 내딛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한 걸음. 그 첫 걸음만으로도 충분해요.
나오미가 길을 가다 왜 오르바와 룻에게 자신을 떠나 각자의 고향으로 가라고 두 번이나 이야기 했을까요?
11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내가 아들을 더 낳아 너희에게 새 남편을 줄 수도 없지 않느냐” 이 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의 법을 알고 있어야 해요. 당시 이스라엘의 법은 이러했어요.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정복하고 각 지파대로, 지파 안에 있는 가문데로 땅을 분배하고 그곳에서 살아갔어요. 그리고 그 땅은 대대로 물려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 땅은 남자. 아들을 통해서만 이어졌어요. 그런데 만약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면 그 가족의 누군가를 통해 아이를 낳아야 했어요. 그러니까 기룐과 말룐 둘 중에 기룐만 결혼을 했었다고 생각을 해봐요. 기룐이 결혼을 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었어요. 그러면 기룐의 아내는 말룐을 통해 아이를 낳아야 했고, 그렇게 태어난 아들은 기룐의 아들로 등록해요. 그렇게 땅이 이어지도록, 기업이 끊기지 않도록 계속해서 이어갔어요.
그런데 지금 기룐과 말룐이 죽었어요. 그리고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까지 죽었어요. 만약 오르바와 룻이 나오미 집안의 땅을 이어 받는 아들을 낳기 위해서는요. 나오미가 재혼을 해야 했어요. 남편 엘리멜렉과 같은 가문의 사람을 통해 아들을 낳아야 했고, 그 아들이 자라서 결혼할 나이가 될 때까지 오르바와 룻은 기다려야 했어요.
나오미가 이제 재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결혼 할 나이가 되려면 적어도 15년이 필요했어요. 그때까지 오르바와 룻이 기다려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나오미는 늙었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어요. 모든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이에요. 그런 나오미를 통해 아이가 태어날 수 있을까요? 아니 설사 아이를 낳았다 해도 오르바와 룻이 기다릴 수 있을까요?
그것을 알기 때문에 나오미는 오르바와 룻을 놓아주고 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하나 더있었어요. 신명기 23장 3절.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오르바와 룻이 어느 민족 사람이죠? 모압이에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법에 보면 모압 사람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는 저주받은 민족이었어요. 자신들의 편함을 쫓아, 가진 것을 나누고 싶지 않아 스스로 하나님과 동족을 버리고 모압 땅으로 간 나오미의 가족이었어요. 그런데 그 땅이 저주 받은 민족의 땅 모압이었고, 자신의 아들들은 모압여자들과 결혼을 했어요.
나오미가 지금 빈털터리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창피한데, 모압 여자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었어요. 자신은 오르바와 룻을 사랑하지만, 베들레헴에 있는 사람들이 며느리들을 환영하고 받아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요.
당시에 남편이 없다는 것은요. 먹고 살 일이 막막하다는 뜻이에요. 몸을 팔거나 구걸하는 것 외에는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전혀 없었거든요. 나오미는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룻과 오르바를 끝까지 돌려보내려 했던 것이었어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창피하지만, 그래도 고향이고 또 친척들이 있기 때문에 나오미는 그냥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조롱과 비난을 며느리들이 받아야 한다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졌던 것이죠. 그래도 나오미가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두 며느리였단 말이에요. 근데 그 며느리들을 지금 손에서 놓아주고 있는 것이에요. 이제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남지 않게 되겠지만, 그래도 며느리들을 위해 포기하고 있어요.
그리고 떠나 보내려 하며 며느리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있어요. 여러분, 8절에 기록된 ‘선대’하다 이 말은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길 바란다. 은혜 주시길 바란다. 근데 어떻게 됐죠? 오르바는 가지 않겠다 하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룻은요? 가지 않았죠. 룻도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말해요.
당신이 어딜 가던지, 난 당신을 따라갑니다. 당신이 사는 곳 그곳에서 나도 함께 살아갑니다. 나오미만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것이 아니었어요. 룻도 마찬가지였어요. 같은 민족 모압이 아닌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을 했어요. 그리고 그녀도 고향을 떠나 시어머니를 떠나 베들레헴으로 갔어요.
나오미와 룻은요. 정말 어떻게 보면 너무 안쓰럽고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의지할 사람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그래도 돌아갈 집이라도 있죠. 부모님이라도 있죠. 말할 수 있는 친구, 선후배, 강도사님 그리고 저라도 있죠. 이 사람들은 아무도 없어요. 얼마나 불쌍해요. 그런데 이렇게 불쌍하고 처절한 삶을 살아가는 나오미의 가정. 이방 여인 룻의 이름으로 된 성경이 쓰여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용기를 갖고 돌아오라

1장의 주요 주제. 가장 많이 반복된 단어는 ‘슈브’에요. “슈브” ‘돌아오다’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돌아오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있는 나의 삶에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다. 바로 슈브에요.
그런데 이 슈브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사람이 좀 특이해요.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일어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했어요. 그럼 나오미가 돌아오다. 라는 의미로 이 슈브가 사용이 되어야 하는데, 엉뚱해보이는 곳에 슈브가 사용이 되어요.
우리 한글 성경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요. 이것을 원래 쓰였던 히브리어로 본다면 룻을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여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원래 모압 사람인데,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여인 = 룻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나오미가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갔다가 돌아온. 슈브한 여인이지. 룻이 아니란 말이에요. 근데 성경 저자는 룻을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여인이라고 표현해요.
그럼 이 슈브가 우리에게 적용된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어요. 신과 함께에 묘사된 이 지옥들처럼, 영원한 고통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주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있던 곳”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 걸음을 내딛고 슈브. 하나님께로 돌아 올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이에요.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나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면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계시거든요. 슈브. 돌아오라. 지난 2년동안 너를 편안하게 해주었던 그 자리. 그 장소에서 일어나서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오라.
나오미는 지금 돌아왔어요.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어요. 모압땅에서 살았던 십여년동안 나오미는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 하나님을 떠나 산 나를,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던 나를 하나님꼐서 치셨다. 그래서 내 마음이 “너무나 쓰리다.” 하나님과 함께 살았어야 했는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을 내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그렇게 살지 않아서. 내 눈에 보이기에 좋은 것. 내가 좋아하는 것만 선택하며 살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내 마음이 너무 쓰리다.
알고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는데,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멍청해서 속이 쓰리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니 나를 더 이상 나오미라 하지 마시고, 마라! 쓰다! 라고 불러주십시오!
나오미는 불쌍한 여인이에요. 우리보다 더 큰 괴로움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여인이에요. 그런데 우리보다 나은게 하나 있어요. 그녀는 여호와의 손이 자신을 내려 쳤고,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고 하면서도요. 여호와의 손으로 다시 돌아와요. 자신을 내려쳤다고 하는, 징계를 줬다고 생각하는 그 손을 향해 슈브. 돌아왔어요. 여호와의 손. 그 품을 향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었음을 인정하고 돌아왔어요.
왜 돌아왔을까요? 다시 시작하려고 온거에요. 지난 십여년 동안 겪었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것이라면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다시 시작하려고 온 거에요.
우리 말씀 축제 주제가 뭐죠? Re:Start죠. 다시 시작해야 해요.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해요. 다시 시작하는거에요.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옆에 계시는데,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일어나서 한 발만 내딛으면 모든 것이 해결돼요. 그것만 기다리고 계셔요.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해요. 있던 곳에서 벗어나, 일어나 슈브나! 돌아와야 해요. 그래야 우리의 영혼이 숨 쉴 수 있어요. 그래야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상황. 알 수 없는 그 고통스러운 감정과 상황에서 탈출 할 수 있어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텅 비어버린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포기하고, 살았다면 그녀는 하나님의 손으로 품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어요. 룻을 통해 새로운 자녀가 태어나고 그 이후에 다윗과 예수님이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에요.
나오미는 인정했어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음을 처절하게 인정했어요. 이제 여러분의 차례에요. 인정하세요. 지난 2년동안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돌아보고 인정해야 해요. 바울처럼 고민하고 곱씹는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해요. 2년동안 만들어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로 충분했다는 생각이 있다면 지워야 해요. 나도 모르게 하나님과 거리감이 있었다는 것을 . 하나님 없이 살았음을.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멋대로 살았음을 인정하세요. 인정해야 회복이 일어나요.
인정해야 있던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용기가 생겨요. 그래야 내가 한 발 내딛어봐야지! 이런 의지가 생겨요.
내가 하나님에게 돌아와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분 인정할 수 있겠어요? 이제는 내가 돌아와야하는. 슈브나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있기를 바래요.
당신이 어딜 가던지, 난 당신을 따라갑니다. 당신이 사는 곳 그곳에서 나도 함께 살아갑니다. 이 고백을 토해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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