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케 하는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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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이냐 기복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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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시리즈 (기복아니고 팔복을 받자)

산상수훈: 마태복음 5〜7장 (화평케 하는 자)
화평케 하는 자마태복음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인간 세상의 명백한 사실 중의 하나는 인간실존에 평화가 없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국제관계를 개선하는 노력이 많이 있었지만 우리의 세상은 여전히 국제적인 평화도, 정치적인 평화도, 경제적인 평화도, 인종적인 평화도, 사회적인 평화도, 가정적인 평화도, 개인적인 평화도 없다.주전 36년부터 1968년까지 세상에는 14,533회의 알려진 전쟁이 있었다.
1945년에만 70여회의 전쟁과 200여회의 국제적인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지금은 국가 간에 이데올로기 중심의 냉전이 종식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세계가 평화의 낙원이 된 것은 아니다. 사회의 불화와 분쟁은 연일 신문과 텔레비전에 나온다.
노사정(勞使政)의 분규, 근로자들의 파업, 여당과 야당의 극한적인 정치 투쟁, 학원 분규 등이 사회의 평화를 깨고 있다.1999년 7월 2일자 조선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하루 1,026쌍이 결혼하고 255쌍이 이혼한다. 4쌍 중 1쌍이 이혼하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상당수의 가정들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정의 파괴를 보고 있을 뿐 아니라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 동서간의 반목, 형제들 간의 유산 다툼 등을 보고 있다.이처럼 국가 간의 평화도, 사회적인 평화도, 가정적인 평화도 없는 세상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이루는 사명을 맡겨 주셨다. 평화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사명일 뿐 아니라 우리의 복이다.하나님의 해결세상에 평화가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은 평화가 없는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악인에게는 평화가 없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평화가 없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은 인간의 죄악 때문이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인간관계에서 평화가 없는 것은 정욕 때문이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 4:1).현대심리학과 철학은 자아를 최우선으로 삼는다. 그러나 자아를 최우선에 두면 평화는 마지막에 두는 것이다. 자아는 정욕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불화, 반목, 분쟁, 분열, 증오, 분개, 전쟁을 야기한다.자기를 최고로 아는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장벽이 생기게 했다. 정욕, 탐욕,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장벽이 생기게 한다. 개인 사이의 장벽, 그룹 사이의 장벽, 국가 간의 장벽의 원인은 인간 마음속에 있는 이기적인 탐욕이다. 불화와 분규와 분쟁의 근본 원인은 인간의 범죄한 마음이다. 죄악된 마음들이 모여있어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인간의 평화라는 것은 고작 일시적인 분쟁의 종식으로서의 휴전일 뿐이다. 휴전은 실상 냉전이다. 분쟁과 전쟁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때까지 휴전은 사실 분쟁이 지하로 내려간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분쟁을 지하로 내려가게 해서 일시적으로 평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항구적으로 평화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평화만이 인간의 분쟁을 근본적, 영구적으로 종식시킨다.하나님의 평화는 죄를 그대로 둔 상태의 평화가 아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죄를 처리한 평화, 즉 정결과 정의를 바탕으로 한 평화이다. 예수님도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고 하셨다(마 10:34). 평화가 오기 전에 먼저 진리와 정의가 있어야 하는데 세상은 진리와 정의를 반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충돌이 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 정의의 조건을 이루시고 평화를 도래케 하셨다. 우리도 먼저 정결해야 그 다음에 평화를 체험한다(약 3:17). 평화 조성자가 때때로 불화 조성자로 매도되는 것(예수님과 엘리야, 왕상 18:17; 눅 23:2, 5)도 이 때문이다.성경은 평화를 직접적으로 400회 언급하고 간접적으로는 더 많이 언급한다. 성경은 에덴동산의 평화로 시작하여 신천신지의 평화로 끝난다. 에덴동산의 평화는 인간의 범죄로 깨어졌으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시 회복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평화를 주신다. 지금은 예수님이 신자들 마음에 평화로 다스리시고, 앞으로는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온 세상을 평화로 다스리실 것이다.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셨고, 그 결과 천지의 모든 만물과 만인을 본래의 질서 속에서 평화하도록 하신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평화를 이루셨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평화이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뜨리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신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3〜14).하나님은 불경건하고 무능한 죄인들이며 원수들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외아들의 피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셨다(롬 5:8, 10). 하나님은 자신의 외아들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으사 우리와 화해하신 것이다(요일 2:2).불화와 분규와 분쟁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평화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흘리신 보혈이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돈 리처드슨(Don Richardson)이 ⟨평화의 아들⟩(Peace Child)이란 책을 썼다. 이 책은 리처드슨이 선교사로 화란령 뉴 기니아의 사위족에게 복음을 전한 내용이다. 사위족은 사람들의 머리를 사냥하는 식인종이다. 그들은 해골을 베개 삼아 잠을 잤다. 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미덕은 배신이다. 상대방에게 잘 해주어 상대방이 살이 찌게 한 다음 상대방을 잡아먹는 배신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말이다. 그들에게는 “우정으로 살찌운다”는 말이 유행했다. 리처드슨 부부가 1962년에 사위족이 사는 지역에 선교사로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두 마을이 고질적인 분쟁에 휘말려 끊임없이 싸우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또한 두 마을이 ‘평화의 아들’을 교환한 다음에는 서로 싸우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예수님이 하나의 ‘평화의 아들’이라고 복음을 전해서 그 종족을 복음화했다.평화를 만드는 방법여섯 번째 복인 마음의 청결은 그 주변에 벽을 만들어 바깥과 분리하는 정결이 아니다. 그것은 보호된 정결(protected purity)이 아니라 정결하게 하는 힘(purifying force)이다. 그것은 사방에 둑을 만들어 물이 흐르지 못하게 함으로써 정체되고 썩는 연못의 물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 흘러 정결하게 함으로써 정결한 상태로 남아 있는 흐르는 물이다. “정결케 하지 않는 정결은 정결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승리하지 않는 미덕은 미덕이 아니다. ……심령이 청결한 자들은 사랑의 공격으로 평화를 만들 때까지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불리지 않는다.”그러면 실제로 싸우는 가정과 싸우는 사업장에서 어떻게 평화를 만들어야 하는가? 정의가 없는 평화는 거짓된 평화이고 일방적인 정의만 주장하면 분쟁만 난다. 어떻게 사랑의 공격으로 평화를 만들 것인가?평화를 이루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자기희생과 화해의 십자가 정신을 실천해야 한다. 십자가 정신을 실천한다는 것은 우선 물질보다 화목을 중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성경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낫다고 한다(잠 17:1). 화목이 물질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십자가 정신을 실천한다는 것은 내가 죽고 지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자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답게 사는 모습은 형제간에 분쟁이 생길 때 차라리 당하고 차라리 속고 사는 것이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7).4세기에 텔레마쿠스(Telemachus)라는 수도사는 로마로 가야겠다는 감동을 받았다. 짐을 챙겨서 로마로 갔는데 로마 거리가 군중으로 붐볐다. 왜 저렇게 붐비는가 하고 물었더니 원형극장에서 검투 게임이 있다고 했다. 그때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지 4세기가 지났는데 지금도 서로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게임을 해?’그는 원형극장으로 달려가서 검투사들이 “시저 만세! 우리는 시저를 위해 죽습니다.”고 외치는 것을 들었다. 그는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서 두 명의 검투사 사이에 서서 양 손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싸우지 마십시오.”라고 외쳤다. 그때 모인 군중들은 “뭉개 버려! 뭉개 버려!”하고 소리를 질렀다. 한 검투사가 칼 뒤쪽으로 그의 배를 쳤고, 그는 쓰러졌다.그는 다시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싸우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군중은 계속, “뭉개 버려!”라고 소리 질렀다. 한 검투사가 그에게 다가와서 칼로 그의 배를 찔렀고, 그는 땅에 넘어졌다. 땅은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그는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싸우지 마십시오.” 그때 8만 명이 모인 원형극장에서 쑥덕거리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다. 곧 한 사람이 일어나 경기장을 떠났다. 뒤이어 다른 사람이 일어나고 또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 몇 분 안에 8만 명이 다 경기장을 떠났다. 그것이 로마 역사에서 마지막 검투 경기였다. 텔레마쿠스는 자기 혼자 당함으로써 사람들을 칼로 죽이고, 또 죽이는 것을 보고 즐기는 검투 경기를 종식시킨 것이다.십자가 정신을 실천한다는 것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는 것이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듣기도 속히 하고 말하기도 속히 하면 사람들 사이를 이간시킬 가능성이 많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잠 20:19).십자가 정신을 실천한다는 것은 원수를 친구로 삼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원수가 주리고 목마르면 먹이고 마시게 하라고 한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21). 성경은 가급적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살도록 권면한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우리가 평화를 만들 때에 “값싼 은혜”에 빠지면 안 된다. 평화가 없는 데도 “평화, 평화”를 외치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했던 것이고, “값싼 은혜”를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은 평화를 만드시기 위해서 자신의 외아들의 피를 흘리게 하셨다. 하나님이 주신 평화의 값은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값이다. 그것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값이고, 최상의 가치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용서하기 싫은 것도 용서해야 하고, 화해하기 싫은 경우에도 화해해야 한다. 고백할 것은 고백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청산할 것은 청산함으로써 용서와 화해 작업을 통해 평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우리가 평화를 이루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또한 평화의 복음인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인간에게 평화가 없는 것은 인간이 평화의 원천이신 하나님(레 26:6; 왕상 2:33; 시 29:11; 사 9:6; 겔 34:25; 롬 15:33; 고전 14:33; 살후 3:16)을 모시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평화의 하나님만 모시면 평화를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은 평화의 원천이시고, 예수님은 평화의 화신이시며, 성령님은 평화의 중재자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의 복음을 전함으로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평화를 만든다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친화력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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