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혜의 능력

룻기 강해설교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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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면서 살아갑니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때, 중고물품을 내놓을 때, 직장에서 일을 할 때, 심지어 길을 갈 때도 어떤 길로 가야 시간을 아낄 수 있는지 시간을 계산합니다. 손해와 이익을 계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게 해야 시간과 물질을 확보해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갈 때 필수적인 지혜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가 손해를 봐야 할 때가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손해를 봐야 하는지, 손해를 봤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율법의 정신을 실천할 때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율법의 정신을 실천할 때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룻이라는 여인이 보아스에게 찾아가서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보아스는 ‘나보다 먼저 기업을 물러야 할 사람이 포기하면 내가 기업 무를 자가 되어 주겠다.’라고 약속을 하고 룻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에게 보아스가 쉬지 않고 일할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이 사건 이후에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서 기업 무를 자가 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당시 성문은 경제 활동이나 재판을 하는 장소였습니다. 성문에 앉는다는 말이 본문에 계속 나오는데, 그 말은 사법적인 행위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이 이스라엘의 성문을 발굴 했는데, 장로들이 앉던 고정할 수 있는 의자가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4장 1절에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앉습니다. 이제 나오미의 가정의 기업 무르는 일에 대한 사법 처리를 하려 합니다.
본문에 보면 ‘마침’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갔다는 말이 나옵니다. 원문상으로 볼 때 시간적으로 보아스가 성문에 앉자마자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역사의 뒤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절묘한 손길, 타이밍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나오미가 땅을 팔 때 사서 되돌려줘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첫 번째로 이 의무를 가지고 있고 이 사람이 거절하면 이 의무는 보아스에게로 갑니다. 보아스는 이 의무를 합법적으로 양도받기 위해서 마침 지나가고 있는 기업 무를 자를 붙들어서 성문 의자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보아스와 기업 무를 자가 성문에 앉은 뒤에 성에 있는 장로 열 명을 청합니다. 여기 장로는 재판관 역할도 하고 증인 역할도 합니다. 비록 보아스는 자신이 좋은 일을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절차와 형식에 맞게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해야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는 것에 대한 법적인 명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나온 대로 해야 하고 법과 절차대로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선행을 하려고 해도 그걸 행하는 사람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말씀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4절부터 6절까지 보시면 기업 무르기에 대한 안건을 쭉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에 나온 지나가던 기업 무를 자, 그러니까 본문에서 아무개라고 한 사람이 나오미가 팔 소유지를 사서 돌려줘야 합니다. 또 그 집안에 사위로 들어가서 대를 이어줘야 합니다. 만약 이 사람이 이 의무를 거절하면 그 다음에 이 의무를 진 보아스가 그 의무를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기업을 무르는 제도라는 독특한 토지 제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해서 토지를 팔면 가까운 친척이 그것을 사서 돌려주는 제도입니다. 그리고 토지는 그 집안을 세우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른바 계대결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으면 가까운 친척이 그 집 사위가 되어서 집안의 대를 이어주고 죽은 자의 이름이 이어지도록 하는 혼인 제도입니다. 이런 토지제도, 혼인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울타리입니다. 가난해서 땅을 팔아야 할 수도 있고 전쟁, 질병 등으로 집안의 대들보인 남편을 잃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제도를 만드셔서 백성들이 어려운 일을 겪어도 회복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제도의 수혜자에게는 이 제도가 엄청난 복이지만 이 제도를 시행해야 하는 의무자에게는 부담입니다. 자신의 재산에 손해를 봐야 합니다. 갑자기 가장 노릇을 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대를 이어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아무개라고 한 사람이 6절에서 기업을 무르는 책임을 회피합니다.
기업 무르는 제도는 예수님이 명령하신 이웃 사랑의 정신이 극도로 집약된 그런 제도입니다. 율법의 참된 정신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이 기업을 무르는 일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이런 손해를 보겠습니까?
보아스는 율법의 정신인 사랑의 정신을 잘 실천한 사람입니다. 첫 번째로 의무를 가진 사람에게 그 의무를 받아서 수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보아스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1번 의무자가 있기 때문에 룻의 부탁을 거절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자처해서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지려고 합니다.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은 때론 손해를 감수하는 일입니다.
(증명) 최고의 율법 선생이신 예수님은 그분 스스로가 이 땅에 살아계신 내내 율법의 정신을 완벽하게 실천하시며 늘 손해보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 땅에서 버림 받은 자, 병든 자,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이웃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만 먹으면 헤롯 궁전을 뒤집고 로마 정권을 뒤엎어서 왕이 되고, 황제가 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당당히 군림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왕인데 누가 거기에 토를 달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낮고 낮은 죄인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크나큰 손해를 보셨습니다. 하늘 보좌 뿐 아니라 땅에서도 보좌도 포기하셨습니다. 화려한 왕궁 대신 늘 길가에 계셨습니다. 부드러운 옷 대신 거친 옷을 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손해로 시작해서 손해로 끝났습니다.
돌아가실 때의 모습은 어떠셨습니까? 죄인으로서 사형에 처하셨습니다. 예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 아버지였는데 그 아버지를 잃어버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야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잃으셨고 파산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끊임없는 손해의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시고 사랑을 남기셨습니다.
(적용)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이 이전 같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학이 약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신학 수준은 지금 시대가 최고입니다. 프로그램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 교육 기관과 단체가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숫자가 줄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기독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종교 중에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습니다. 건물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밤에 높은 곳에 가면 붉은 색 십자가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전과 달리 점점 힘을 잃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계속해서 세상의 지탄을 받고 전도가 어려워지고 교회에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이 이전 같지 않은 이유는 바로 계산을 너무 잘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손해를 보고 어떻게 하면 손해를 안 볼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손해를 안보는 선에서 이웃 사랑을 행하고 시간을 투자하고 물질을 투자합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손해를 안보면서도 나에 대한 평가도 깎이지 않는 절충선을 찾아내는 일에 전문이 되었습니다. 교회들이 너무나 똑똑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전의 교회처럼 하려면 이전의 신앙의 선배들처럼 영적인 힘이 있으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내가 손해 보는 걸 알면서도 율법의 정신, 이웃 사랑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 있는 저와 성도님들은 그 바보들 때문에 이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늘 밥을 사주던 교회 어른들, 그렇게 말 안 듣던 나를 끝까지 용납하신 주일학교 선생님, 예의 없는 나의 행동을 이해해주신 전도사님, 궁금한 게 있으면 밤이라도 전화를 받아 성경을 풀어주신 목사님 이렇게 자신의 것을 손해 보신 분들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면 손해를 봅니다. 안 볼 수도 있지만 손해 보는 순간이 옵니다. 그 때 우리가 조금만 더 바보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잠시만 계산기를 옆으로 치워야 되겠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구현하는 힘 있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2- 율법의 정신을 실천할 때 교회를 세우게 된다.
(설명)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율법의 정신을 실천할 때 교회를 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5절하반절에 보면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기업 무를 자가 땅을 사서 돌려주고 결혼을 한다면 엘리멜렉과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기업이 세워진다고 합니다. 기업 무르는 일은 집안의 대를 잇고 죽은 사람의 이름을 잇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집안의 대가 이어져야 족보가 생기고 이름이 남는 것입니다.
엘리멜렉 가문은 대를 잇지 못해서 집안의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공동체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업 무를 자 보아스가 죽은 엘리멜렉의 사위로 들어갑니다. 대를 잇게 해줍니다. 팔았던 땅을 되찾아주고 그 땅의 소산으로 그 가정이 생활할 수 있게 합니다. 기업을 물러주는 일은 한 마디로 사라져가는 공동체를 세워주는 일입니다. 기업 무르는 제도를 통해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면 언약 공동체를 더욱 든든하게 세울 수 있습니다.
1절에 나온 아무개라는 사람은 율법의 정신을 실천해서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포기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비추어 보았을 때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신명기 25장 10절에 보면 죽은 형제의 아내에게 장가를 들지 않는 사람은 성문 앞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신발이 벗겨지고 침 뱉음을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는 자로 여김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무개 씨는 당연히 자기 이름이 있는 사람입니다. 보아스도 이 사람의 이름을 알았을 것입니다. 왜냐면 기업 무를 의무가 있는 가까운 친족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친족의 이름을 모르는 건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성경 기자는 이 사람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아무개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어떤 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고 영어 성경에는 ‘프랜드’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사전에 보면 ‘프랜드’는 친분이 있는 ‘친구’의 의미도 있지만 불특정인을 ‘프랜드’라고 합니다. ‘아무개’인 셈입니다. 룻기의 저자는 공동체에서 이름을 잇고 대를 세우는 일에 무관심한 이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아무개’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세우는 일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원래 이름이 있지만 아무개가 된 것입니다. 뉴스에서 보면 이름을 밝히면 안 되는 사람을 이름이 있어도 땡땡으로 처리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룻기의 기자는 신학적인 의도를 남기고 이름이 있는 사람을 아무개라고 지칭했습니다.
반면에 보아스는 죽은 형제의 대를 잇고 이름을 남겨주고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통해 대를 잇고 이름을 세워주고 공동체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이 보아스는 어떻게 됩니까? 잘 아시는 것처럼 그의 이름이 영원히 남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보아스는 결혼을 통해서 구속 역사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언약 공동체 뿐 아니라 훗날의 교회를 세우는 일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니까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적용)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손해를 감수하고 율법의 정신을 지켜서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사람이 될지 아니면 말씀 앞에서 이리 저리 계산하다가 그냥 아무개로 끝날지...”
아무개가 되면 편할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친구들 모임에서 적당히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 보여주면 별 갈등도 없고 고민도 없이 무난한 일상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룻기의 기자가 아무개를 아무개라고 적은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아무개로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가 보아스가 될 때 비록 손해는 생기지만 우리가 가는 곳마다 율법의 정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기도하며 애쓴다면 우리가 가는 곳 마다 믿음의 공동체가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보아스가 될 때 이 땅의 교회들이 더욱 능력을 얻어 힘 있는 언약의 공동체로 세워질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는 여전히 손해를 보는 일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보아스를 지역의 유력한 자로 만들어주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손해를 은혜로 채워가며 율법의 정신에 순종하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합시다.
결론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에는 손해가 따를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이익 대신 율법의 정신에 순종하는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일꾼이 될 것입니다.
이 일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손해를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손해를 채우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율법의 정신에 순종하여 교회를 더욱 힘 있게 세우는 우리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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