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실수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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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여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며 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나가서 자기 산당들로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 그를 진노하게 하였으매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그가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 주시며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그가 그의 소유 때문에 분내사 그의 백성을 칼에 넘기셨으니 그들의 청년은 불에 살라지고 그들의 처녀들은 혼인 노래를 들을 수 없었으며 그들의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그들의 과부들은 애곡도 하지 못하였도다 그 때에 주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사 그의 대적들을 쳐 물리쳐서 영원히 그들에게 욕되게 하셨도다 또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도다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2013년 경에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유명해진 문구가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는 문구입니다.
익숙한 문구이지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라는 격언과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는 격언을 하나로 합친 문구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냥 문구 만으로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어느 한 네티즌이 인터넷에서 적절한 표정이 담긴 사진에 이 문구를 합성하면서 큰 유행을 탔습니다.
이 문구가 표지를 장식한 책도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흑역사"라는 책인데요. 인간의 역사에서 자행된 흑역사(?)들을, 영국의 한 작가가 정리한 책입니다.
이 작가는 인간을 지칭하는 ‘호모 사피엔스', 즉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는 이 단어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왜냐하면 가장 똑똑한 동물이라고 하기에는, 인간은 역사적으로 너무 많은 실수와 실패를 거듭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류가 실수와 실패 뿐만 아니라, 놀라운 발전과 문명을 이뤄낸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 속에서 실수와 실패가 계속 반복되는 경향을 보여 왔기에, 과연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라고 불릴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이 책 내용 전반에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제게 인간이 저지른 여러 뼈 아픈 실수 중 가장 큰 실수는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전쟁'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욕심과 잔인한 폭력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서로를 증오하고 죽였으며,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보기 좋았다고 하신 아름다운 세계가 폐허로 변해 버린 역사를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위협은, 최근 뉴스를 통해서 접하고 있는 것처럼 여전히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역사를 통해 지혜롭게 실수와 실패를 교훈 삼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라는 말이 일견 동의가 됩니다.
그런데 이는 성경에서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아삽의 시입니다. 특별히 아삽의 ‘마스길’이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습니다.
‘마스길'이라는 단어는 ‘생각하다', ‘깨닫다', ‘가르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사칼'이라는 단어에서 파생 되었지만, 그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여러 시편에서 표제어로 사용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는 ‘교훈적이고 반성적인 시'라는 뜻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편의 저자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과 반성을 전해 주고 있을까요?
첫째는 타락한 인간은 끊임 없이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56절부터 59절까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께 대적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여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며 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나가서 자기 산당들로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 그를 진노하게 하였으매
어떻습니까?
단 세 절이지만, 우리는 그들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그들이 시험하고 반항한 대상을 보면 깊이 느끼게 됩니다.
그들이 시험하고 반항한 대상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지존하신 하나님'이라고 시편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지존하시다’ 라는 뜻은 ‘지극히 높으신', ‘가장 높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즉,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 위에 있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존하시다는 표현은, 온 우주와 인류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설명할 때 이 단어보다 어울리는 단어가 또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감히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였다 라고 시편 저자는 기록합니다. 시편 저자의 이 기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과정에서 보였던 한 행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약의 땅으로 인도해 가셨습니다.
출애굽의 여정에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완악하고, 자신이 세상의 왕이라 여겼던 바로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심으로써 지존하신 하나님 자신을 애굽과 온 땅에, 그리고 그 곳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잡으러 달려 오는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애굽 군대의 위협과 공포 속에서, 지존하신 하나님은 홍해가 가르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무사히 애굽 군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황량하고 척박한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아우성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네~그렇습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고프다 소리치는 이스라엘 백성을 배부르게 먹이셨습니다.
이 모든 기적과 하나님의 능력이 누구를 향한 것이었습니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이토록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경험하고도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증인으로, 지존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선포해도 모자를 판에, 되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대적이 또 다시 ‘반복’되었다 라는데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나가서
오늘 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무사히 정착한 세대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아래, 스스로 보기에 메뚜기 같다고 이야기 할 만큼 정상적인 대결에서는 상대도 되지 않았을 가나안 족속들을 차례차례 쫓아내고 그 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였다 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 숭배’였던 것입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지존하신 하나님을 두고, 우리가 보기에 좋은 형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는 것...
십계명의 제1계명이 무색하리만큼,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대적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도 자신들의 신을 모신 산당들로 우상 숭배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며 크게 미워하셨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미워하셨다는 단어는, 다른 번역에서는 ‘거부하다'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을 미워하시고 거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해 계셨던 하나님의 얼굴을, 이제 돌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복되는 반역, 즉 우상 숭배는 심판의 대상입니다.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나도 큽니다.
그가 그의 소유 때문에 분내사 그의 백성을 칼에 넘기셨으니 그들의 청년은 불에 살라지고 그들의 처녀들은 혼인 노래를 들을 수 없었으며 그들의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그들의 과부들은 애곡도 하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칼'에 넘겨진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대가를 치뤄야 했을까요?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 민족에게 넘기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이자 능력의 상징처럼 여겼던 언약궤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대적하는 원수 블레셋에게 넘겨주십니다.
젊은이들이 전쟁에서 희생 당했고, 그 희생된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처녀들은 혼인을 할 수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너무나 큰 충격과 공포로,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감히 슬퍼하는 기색조자 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을 때 그들은 모든 이방 민족의 침략에도 무사했지만, 반복된 반역 앞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기로 결정하시고 그들을 거부하셨을 때 이스라엘은 너무나도 보잘 것이 없는 존재였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꿈꾸는교회 가족 여러분.
혹시 조금씩 반복되는 죄 된 습관에도, 크게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에 익숙해 지고 계시진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과 조금씩 멀어진 채로 지내고 계시진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닌 헛된 우상에게 나의 마음을 내어 주고 계시진 않은가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의 결말은 심판 뿐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에게는 심판 밖에는 허락된 것이 없습니다.
혹시 내 삶 안에 반복되는 죄로 하나님과 멀어지셨다면, 지금이라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돌이키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교훈은, 그럼에도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심판을 끝이라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 심판은 새로운 시작과 다름없습니다. 마치 죽음이 끝이라고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죽음은 부활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죄악 앞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향한 거부와 심판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에게 침략을 당했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심판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슬퍼하는 소리조차 낼 수 없는 황폐한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심판을 새로운 시작으로 만드십니다.
그 때에 주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사
마치 잠이라도 드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모른 척 하셨던 하나님께서 일어나신다 라고 고백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하나님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들이 이유도 모른채, 마치 아예 없었던 존재처럼 갑자기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 66절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대적들에게 영원한 치욕을 안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반복된 죄악 앞에 그들을 미워하시고 거부하시던 하나님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심판하실 때는 언제고, 왜 또 이렇게 구원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이는 레위기 26장 12절, 즉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아래 말씀 낭독)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바로 이 약속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신실하다는 것은 믿을만 하고, 의지할만 하며,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우리는 신실함을 경험하기 어려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다른 누군가가 우리에게 약속할 때나 계약서에 사인이 필요할 때에도 꼭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을 당부합니다. 즉 의심함으로 손해를 보지 않도록 보호하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죠.
하지만 신명기 7장 9절에서 고백하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아멘!
하나님은 그의 언약을 천 대에 걸쳐서라도 반드시 이행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 언약을 하나님은 자신의 신실하심을 증거로 반드시 지키시는 것입니다.
이를 에베소서에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렇습니다.
그토록 반복되는 반역으로 인해 심판 당해 마땅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윗’이라는 새로운 목자를 세우시고 새롭게 인도하셨던 것처럼...
신실하시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반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허물로 죽어야 할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우리를 일으키사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꿈꾸는교회 가족 여러분.
감격스럽게도, 그리고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약속을 끝까지 기억하시며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온전한 신뢰를 내어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대적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답습하는 자가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붙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
그래서 오늘도 변함없이 풍성한 긍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지존하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며 붙드시는 하루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결말을 보았습니다. 나의 삶이 실수와 죄악을 반복했던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않게 하옵소서.
내 안에 반복되는 죄악들이 있다면 이 시간 주님의 보혈로 덮어 주시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