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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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5–22 NKRV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 같이 점을 치며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여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 오른 작은 언덕과 모든 높은 망대와 모든 견고한 성벽과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경배하려고 만들었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암혈과 험악한 바위 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버리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야곱 족속에의 호출입니다. 이 호출은 언약에 대한 회상과 결정적인 회심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빛에 행한다는 것은 사 2:1-4 에서 묘사된 아름다운, 궁극적 평화를 그리는 미래에 대한 필요 조건이자 ‘회개에의 초대’입니다. 또한 지난 번 설교에서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머리를 숙이고 선인과 악인을 모두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신뢰하도록 한다는 점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그 초청에 대해 ‘거부하고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이들은 원래라면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는 선지자의 외침 없이도, 그 빛 안에서 걸어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지자의 외침이 굳이 언급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빛에 거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더불어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라고 완료형으로 표현합니다.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 ‘버리다’는 히브리어 נָטַשׁ인데, 이 단어는 단순한 ‘버리다’라는 뜻 외에도 저버리다, 포기하다, 떠나다, 괴로워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버리셨다는 오늘의 이 표현은 단순히 우리가 필요없어진 물건을 버리는 유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의미 없는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괴로워하면서, 포기하고, 떠나다는 의미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야곱 족속, 즉 이스라엘에 대한 미련을 가지신 채로, 그럼에도 더 이상 그들과는 함께할 수가 없기에 떠나고 마신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체적으로, 아무 잘못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스라엘이 먼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더욱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 앞에서, 이스라엘은 그 행위와 믿음의 온전함에서 실패하고 맙니다. 이들은 그 결과, 하나님이 데리고 가기에 부적합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고,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공감한 선지자는 심지어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지 말라’는 기도를 하기에 이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본 그 시대의 죄악은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가득하다’라는 단어인 מָלָא가 4번 등장하면서 그 내역을 나열합니다.
동방 풍속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처럼 점을 치고 이방인과 손을 잡아 언약하였습니다.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합니다.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합니다.
우상이 가득하여 자기 손으로 지은 것을 경배하고 귀천을 막론하고 그 앞에 굴복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을 결합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벗어나 자기 자신의 삶을 살기로 작정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6절에서 지적되는 ‘동방 풍속’은 사실 두 가지의 세부 사항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점을 친다는 것이지요. (블레셋 사람들은 사실 이스라엘의 서편에 삽니다만,) 블레셋 사람들은 미래를 예견하기 위해 여러 표징이나 자연 현상들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비단 이것은 블레셋인만들의 문화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에게 있어 이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점술이라는 것은 본디 사람이 원하는 바를 신에게 들어주기를 요청하는, 다른 말로 하자면 신을 조종하는 행위의 일종이겠지요.
믿지 않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불안한 심리를 위로해주는 ‘무교(巫敎)’의 그들에게의 가치를 부정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우리 그리스도인이 점술에 의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다 하나님을 조종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에서, 그 지시하시는 방법대로 살아가야 하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8:9–13 NKRV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6절에서의 두 번째 행위는 이방인과 손을 잡아 언약함에 있습니다. 이것은 상업적 행위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상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바벨론 등이 위치한 오늘날의 이란-이라크나 아라비아 지방에서 이집트로 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스라엘 땅을 거쳐야만 하는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언제나 이방인들과의 거래라는 필요성이 삶에 결부되어 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정세에 있어서는 유다는 고립된 땅이었습니다. 당시 국력으로는 이스라엘이 유다보다 훨씬 강력하였고, 블레셋에 의해 해안이 가로막혀 있어 이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 유다 왕국, 특히 웃시야 왕의 때에는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던 때로,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군사적-상업적인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적 삶의 방식을 그들에게 요구하고 있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농업과 상업에 아주 유리한 이집트 땅을 두고 척박한 가나안 땅을 주신 이유는, 분명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의존 관계를 의식하고 살 수밖에 없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과 ‘경제적 관계’는 필연적으로 다음 3가지의 문제점을 낳습니다.
첫째, 상업과 거래, 경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이것이 과하면 물신주의, 즉 Mammonism을 낳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이스라엘에는 은금이 “가득”하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둘째, 마필과 병거가 무수하다는 것은 이들의 군사력에의 의존을 나타냅니다. 돈이 많으면 그를 약탈하려는 세력들이 증가하는 것과 큰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은금을 사용해서 군사력을 증강하여 이를 막아야 하겠지요.
셋째, 이들에게는 우상이 가득합니다. 유다는 거룩한 백성으로 다른 나라와 구별되어야 했지만, 그들 스스로 다른 나라와 같기를 원했습니다. 그들 스스로의 소원을 들어줄, 자기 자신만의 신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은 결국 자기 자신의 성취, 자기 자신의 안보, 자기 자신에 대한 치하라는 의미에서의 투사에 불과하다고 구약학자인 Walter Bruggemann은 이야기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하나, 인간의 성과에 대한 의지로 귀결됩니다. 이들의 3가지 ‘가득함’은 유다 공동체의 성격을 바꾸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들 스스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들 스스로 자립하여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유다 공동체에 함께 계실 수 있을까요? 애초에 하나님께는 이러한 공동체가 ‘필요하신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만이 나타나는 날입니다.

오늘 말씀의 10절부터 21절의 긴 목록들에 있어서, 이사야 선지자는 긴 목록과 함께 두 가지 반복되는 방향을 언급합니다.
높아짐과 낮아짐이라는 두 가지의 분리된 방향에 있어서, 높은 것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낮아진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신현의 날은 사람들에게 두려운 날입니다. 이것은 고대 세계에서 거의 공통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고대 이집트 문학에서 신은 태양 원반과 천둥 구름을 동반하며 등장합니다. 고대 아카드인들 역시 이러한 신현이라는 단어 melammu에 ‘두려운, 공포스러운’을 자주 연관시켜 생각했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도 역시 신의 맨 얼굴을 인간이 보면 그 사람이 바로 죽는 듯한 언급이 있고, 우리 성경에서도 그러한 인식은 별로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날, 이 날은 인간이 좋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낮아집니다. 교만한 자도, 눈이 높은 자도, 거만한 자, 자고한 자도 모두 낮아집니다. 레바논의 백향목과 바산의 상수리나무는 크기와 아름다움, 강도와 유지성에 있어서 매우 중시되었던 건축 자재였다고 합니다.
산, 언덕, 망대, 성벽은 말할 것도 없지요. 다시스의 배와 조각물에 대해서는, 다시스가 가지고 있는 상업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미 기원전 3천년 경부터 이러한 상업의 흔적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고, 아주 큰 대형 범선은 아니지만 배의 양편에서 여러 사람이 노를 젓는 갤리선들을 가지고 무역을 했다고 합니다. 조각물이라는 것은 이 배에 달려 있는 선수상 등을 주로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이는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며 만든 여신상이나 괴물 상들을 주로 새겨넣는다고 하네요.
그 날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낮아집니다. 우상은 없어지고 하나님만 홀로 높임을 받으십니다. 여호와는 ‘사용자에게 친절한’ 신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여호와께서는 다른 모든 것이 낮아짐과 동시에 높아지시는 분이신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아지심을 선택하시는’ 성육신이 얼마나 기적적이며 충격적인 일일 수밖에 없는지 체험하게 됩니다.
그 날,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만든 모든 것들, ‘은 우상과 금 우상’이라고 표현된 ‘은금’과 ‘우상’의 결합체는 가장 낮은 곳에 사는, 가장 천한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져지게 됩니다.
상상해 봅시다. 여호와의 두려운 날이 임했습니다. 여호와의 공의의 빛 앞에서 사람들은 도망칩니다. 도망칠 때, 무겁기만 한 우상을 가지고 도망갈까요? 그들은 겨우 자기 목숨만 부지하며 도망칠 것입니다. 물론 소중한 금과 은은 가지고 갈 수 있겠습니다만, 암혈과 토굴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은과 금이 어떤 가치를 지닐까요. 결국 그들은 맨손으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때서야 그들은 체감하겠지요. 그들이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곳이 바로 어디에 있는가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의존하나요? 사람입니까? 인간은 믿을 수 없으니 인간적 수단입니까? 돈입니까? 힘입니까?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소원을 이뤄주시는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가만히 우리를 내어드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람의 인생은, 그의 호흡은 코에 있습니다. 또한 그 코에 있는 호흡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창 2:7)
창세기 2:7 NKRV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코로 숨을 쉬는 인생의 유한함과 동시에, 그를 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십시오.
오늘 말씀의 마지막을 기억하십시오. 사 2:22
이사야 2:22 NKRV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이 버리심은 단순한 유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슴아파하며 우리를 버리고 떠나시는 두고 가심입니다.
이 두고 가심은 우리의 ‘인간적인 것에의 의존’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유다 공동체가 하나님 없이, 다른 이들처럼 살아가려 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옆을 바라보며 사는 것은 우리의 사는 방법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모든 인간적인 수단이 낮아지고 여호와 한 분만이 높아지실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삶을 되찾아야 합니다.
빛으로 걸어갑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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