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모든 욥들에게(민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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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미워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성경을 읽을 때에 만나고 싶은 성경인물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성경인물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만나기 싫은 인물을 꼽으라 한다면 저는 욥을 꼽는다 했던 것을 기억하시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주변을 돌아보았을 때에 저를 포함하여 제 주변에 많은 욥들이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분 한 분들의 사정을 소개해드릴 수는 없지만 저를 포함한 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고민들을 품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멋진 삶, 세상에 매이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그리는 모두가 여러가지 현실 앞에 고민하기도 하고 또 무너지는 모습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한 현실과 상황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불가항력적인 상황들 앞에 믿음과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자신을 갈무리하려 노력하는 욥과 흔들리는 자신과 가끔은 그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원망섞인 말들을 뱉어내는 욥들을 만나게 됩니다. 단 위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저조차도 내가 생각한 길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인생 속에 하나님이 문득 미워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아 내가 전하는 말씀이 거룩하지 내가 거룩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제 자신의 연약함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자'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영화에 등장하는 안성기 배우는 이런 대사를 했습니다.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신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으면 미움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다시 돌아보았을 때에 저는 하나님을 미워했던 마음을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고 계셨고 변한 것이라고는 원하는 길로 가지 못하는 조바심에 감사가 사라지고 불평과 원망만 남은 제 모습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배경설명
배경설명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살펴 볼 말씀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이후 한 번의 세대교체 이후에 생긴 일들입니다. 본문 1-3절에서는 ‘호르마'라는 지역에서의 전투를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민수기13장에서 이스라엘은 정탐꾼들을 보냅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와서 자신들은 가나안 인들을 이길 수 없다고 했고 이 말에 선동을 당한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인도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원망을 들으시고 1세대를 향해 너희는 가나안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이 슬퍼하며 그제서야 점령을 하겠다며 가나안을 향해 올라가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은 이스라엘은 전투에서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 뼈 아픈 1세대의 패배가 호르마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출애굽 제1세대는 그렇다 할 승리 없이 2세대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후 1-3절에서의 호르마전투는 아예 그 양상이 다릅니다. 가나안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서 몇 사람을 포로로 잡습니다.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이들의 서원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내 손에 넘시기면 모두 멸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서원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서원은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내가 도구가 되겠다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이스라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들을 멸하게 하십니다. 21장에서 호르마전투의 승리는 출애굽한 2세대 백성들의 승리라는 부분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여 얻어낸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호르마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소망합니다. 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과 기도를 모두 들으십니다. 삶 속에서, 세상과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을 찾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정한 길을 도우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길을 인도하실 하나님께 우리를 맡기고 주어진 순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순간에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그 은혜,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경험하게 되는 은혜를 동일하게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다시, 원망
다시, 원망
그런데 이 승리의 기쁨도 잠시 이들의 마음이 상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4절을 보시면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에돔 지역에 잘 닦여있는 길로 가고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20장에서 에돔 오아은 잘 닦인 길을 지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할 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조금 돌아가는 이 길 때문에 마음이 상할 정도일까? 싶은 마음이 드실 듯 하여 제가 얼마나 돌아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사진을 가져왔습니다.
이 지역은 광야였습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땅이었습니다. 잘 닦여있는 길을 두고 척박하고도 먼 길로 돌아가야 한다는 상황 속에서 마음이 상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이 상할 때는 언제입니까? 제가 저의 상황과 또 주변 사람들의 상황을 보며 욥이라 여기고 하나님을 미워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곰곰이 생각해보았을 때 그 이유는 사실 오늘 말씀 속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유와 동일했습니다. ‘길'로 인해 마음이 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한 길은 이런 길이 아닌데, 왕의 대로라고 불리는 잘 닦여있는 빠르고 평안한 길인데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은 돌아가는 길이요 광야인 것입니다. 내 길은 내가 정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에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길을 걷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저의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길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실 때에 가장 좋고 완벽한 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세대 출애굽 사람들처럼 우리 마음대로 길을 정하여 가나안으로 올라갔다가는 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길을 맡기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게 됩니다.
5절에서 마음이 상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다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원망에 이르기까지는 일련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조바심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으면 하는 조바심이 입니다. 그리고 그 조바심은 곧 불평과 불만들로 옮겨갑니다. 이 불평과 불만은 곧 분노로 이어지고 원망이 됩니다. 성경을 찬찬이 살펴보면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 이제는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만 들으면 하나님께서 원망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해서 하나하나 팩트를 체크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죽게 두셨습니까? 또 광야에서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방치하셨습니까?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어 굴머죽기 직전이었습니까? 모두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꺼내어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한다.’ 여러분 이 하찮은 음식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십니까? 이 하찮은 음식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빵인 ‘만나'를 일컫는 단어로 보여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먹어야만이 광야에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만나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음식이 지겹다 못해 하찮다고 말하는 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호르마 전투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승리한 전적이 있는 이들에게는 감사가 믿음이 넘쳐야 마땅해 보이는데 되려 이들에게는 승리의 감격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온데간데 없고 원망이 넘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에 주의할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내가 생각한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칫, 우리가 경험했던 어제의 승리마저도 그리고 매일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마저도 하찮은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나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좋은 길을 두고 광야로 돌아가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중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명기 8장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케 하신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겹다고 했던 만나를 주신 이유도 바로 다음 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에서는 무화과와 포도, 석류가 나지 않습니다. 척박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법과 낮아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치 않으면 망한다는 것과 순종했을 때에 산다는 진리를 배웠습니다. 또 자신들을 용서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찐한 사랑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애굽의 무화과와 포도, 석류와도 같은 세상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만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힘과 능력으로 음식을 얻을 수 없는 광야에서 만나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을 낮추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숨겨진 은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요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생명의 떡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이시요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우리의 인생의 길을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은 채로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살펴보는 구원은, 특히 모세 오경을 통해 살펴보는 구원의 과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는 출애굽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다시금 세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 들어가겠습니까? 더 많은 자들을 구원해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다시 세상 가운데 ‘속하지 않기 위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광야'인 것입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은 낮아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자들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된 백성들은 마침내 복을 받았을 때에 이것이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님을 말할 수 있는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됩니다. 아멘.
혹, 저와 여러분들 사이에 광야를 걷는 자들이 있으십니까? 저는 아직 광야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모든 욥이라고 느껴졌던 자들도 다들 광야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과정이 그저 고통을 주기 위한, 고난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님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알아갑니다. 여러분, 구원을 받은 우리는 다시금 세상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다만,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세상과 분리된 자들로서 더 많은 자들을 세상으로부터 자유케하기 위해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그 때에 우리는 복 받은 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여러분의 광야생활에 목적이 궁금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욥과 같은데, 그 이유가 궁금하십니까? 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복이 내 능력과 내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을 얻기 위한 과정임을 알고 조금만 더 힘을 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불뱀, 놋뱀 그리고 예수님
불뱀, 놋뱀 그리고 예수님
여러분,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우리의 믿음이 막상 현실과 부딪힐 때에는 쉽게 넘어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우리의 눈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황량한 광야가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앞에서 그래도 막연하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보고자 하는 우리의 작은 의지는 광야에 부는 모래바람과 함께 날아가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평안보다는 조바심에서 시작된 불평과 불만을 지나 마침내 분노가 자리잡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처한 모든 상황을 종합했을 때에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도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원망이라는 죄를 지었고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이 불뱀에 대한 한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처럼 하늘에서 불타는 뱀을 뚝! 하고 떨어뜨리신 것이 아닙니다. 이 불뱀은 광야에 서식하고 있는 독사를 가리킵니다. 한 번 물리면 불에 타는 것과 같은 아픔이 있고 한 시간 내에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는 독사이기에 불뱀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여러분 뱀 한 마리가 교회에 들어온다면 우리는 아마 예배를 드릴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불뱀들이 온 이스라엘을 휘젓고 다니며 사람들을 문다면 아마 이스라엘 회중은 난장판이 되었을 겁니다. 하나님을 불신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혹시 이런 경험을 하신 적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시듯 우리 주변의 모든 환경들이 나를 덮쳐와서는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은 경험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어떤 방법을 떠올려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때에 백성들은 모세에게 달려와 말합니다. 저희가 하나님과 당신께 대해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습니다. 기도하여 뱀들을 물러가게 하소서. 백성들은 알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원인을 좇아 올라가 봅니다. 그 원인에는 바로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향한 원망이 있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하나님과 모세 앞으로 나아와 회개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문제는 나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결해보려 할 수록 더욱 심각해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원인을 찾아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원인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또 하나님 앞에 낮게 엎드릴 수 있는 겸손의 자세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모세는 백성을 위하여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들으셨습니다. 우리의 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들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매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상황을 한 번 상상해 보시겠습니까? 사람이 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뱀을 쫓아달라고 했는데 되려 그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보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모세는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이 뱀을 본 자들은 모두 산다는 다소 비상식적인 이야기로 오늘 말씀은 끝을 맺습니다.
여러분, 이 놋뱀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습니다. 차라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속죄제를 지내라고 하신다던지 모세에게 어떤 풀을 찾아 해독제를 만들고 그 해독제를 마셨더니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더라라고 했다면 우리가 조금 더 받아들이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도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놋뱀을 사용하신 이유는 첫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가였습니다. 장대 위에 있는 놋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생명을 얻는다는 너무나도 쉬운 말에 이들이 믿고 순종하는가를 보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이 과정에서 백성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제사나 어떠한 특정 행위를 함으로 불뱀으로부터 살아났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났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놋뱀을 바라보며 오히려 자신의 무능과 죄를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 가운데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에 장대 위에 매달린 놋뱀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고 광야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약의 모든 말씀들이 증거하고 있는 대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십니까? 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속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본문 속 이 놋뱀이 들려서 그것을 본 자들마다 생명을 얻은 것을 표징으로 삼아 자신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니까 오늘 본문 속 놋뱀이 장대에 매달린 것은 예수님께서 나무에 매달리신 것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사실과 구원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얻을 수 없음을 말하여 줍니다. 그저 믿고, 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저주받은 나무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우리의 죄를 떠올리게 됩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또 바라봄으로 죄사함을 얻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호르마에서 내 생각과 뜻대로 판단하여 실패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괜찮습니다. 다시금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겨냈듯, 이겨내시면 됩니다. 광야에 지쳐 감사를 잃고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고 계십니까? 괜찮습니다. 오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하듯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계십니다. 오늘 놋뱀을 본즉 살아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우리는 다시 용서받고 살아나 복음의 길을 걸을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문 밖에 서서 우리를 향해 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문을 열어드리고 그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밥을 먹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만나를 먹으며 광야를 건너 마침내 가나안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삶을 살며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해서 조바심을 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주신 것들을 생각하며 감사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각 자신이 욥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 모두가 예수를 바라보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함으로 살아나고 회복되어 새 힘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순종함으로 걸어 마침내 복받은 자들로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가운데 자랑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넓혀가는 자들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