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을 회복하라
04-07-07 고전 15:12-19 부활신앙
오늘 보신 고린도전서 15장은 당시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부활의 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입니다.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부활의 문제라는 것은 부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은 없다는 것이죠.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조차도 부활을 부정하는 현상이 종종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부활을 부정하는 문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린도라는 도시의 성격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문화와 관습 그리고 또 배경을 바로 이해하여야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고린도라는 도시는 희랍의 중요한 상업 도시로서 고대로부터 `희랍의 빛'으로서 그 번영을 자랑하던 곳이었습니다. 계급적으로는 여러 계층이 있었는데, 약 20만의 자유민과 40만 이상의 노예가 고린도의 인구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각 처에서 모여든 희랍인들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였지만, 유대인들도 상당히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주변 도시인 로마나 알렉산드리아에는 각각 수만의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도시들과 거의 비등할 만한 번영을 자랑하고 있었던 고린도에도 수 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도시에서는 당시 지중해 근교에서 유행하던 온갖 종류의 제사가 그대로 다 행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성읍 남쪽에 높이 솟아 있는 고린도 정상에 세워진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 신전이었습니다. 이 아프로디테는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와 풍요의 여신이지요. 로마인들은 이 아프로디테를 베누스라고 불렀고 이것이 오늘날 비너스가 되었습니다. 하여간 이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000명에 달하는 여인들이 살면서 신전 매창(賞娼)이 행해졌다고 합니다. 매음행위죠. 따라서 이 도시의 풍기는 극도로 문란하였습니다. 윤리와 도덕의식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식으로 산다'라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아주 `행실이 나쁘다'라는 뜻입니다. 신의 존재와 관계없이 육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와 같은 악마적이고 퇴폐적인 풍습이 교회 내에도 스며들어서 고린도 교회의 문젯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악습은 바로 부활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헬라인들의 사상적 배경은 어떠했을까요?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졌길래 신전에서의 매춘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감각조차 없이 그렇게 행해질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와 같은 행위와 부활을 부정하는 것과는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사도행전 17장을 보십시다.
[행 17:16-행 17:18]
(16)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17)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18)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사도 바울은 아덴, 즉 희랍의 가장 대표적인 도시인 아테네에 갔을 때, 그곳의 철학자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학파의 사람들과 논쟁을 합니다.
참 한글번역이 기가 막히게 되었는데요, 에비구레오는 에피쿠로스학파를 지칭하는 것이고, 스도이고는 스토아학파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공부 열심히 하신 분들은 아마 기억나실겁니다. 세계사나 윤리과목에 나오지요.
이 에피쿠로스 학파는 희랍의 유명한 쾌락주의자들입니다. 즉, 인생의 목표가 쾌락에 있다는 것입니다. 썩어질 몸 마음껏 즐기고 마음대로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죽음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죽었을 때는 이미 죽음은 나에게서 떠나갔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죽음은 오지 않았고 죽었을 때 이미 죽음은 나에게서 떠나간 것이니까 걱정하지 마라는 이야기입니다. 일종의 괴변이죠. 그러나 이것은 사실 언어의 유희에 불과합니다. 언어의 유희를 통해서 죽음으로부터 도피하고 죽음을 잊어 버리려는 일종의 도피입니다. 해결이 아닙니다. 해결이 아니라 말로 적당히 넘어가려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죠. 따라서 그들은 죽음을 생각하지 말고 그저 이 세상을 즐기자! 인생은 한번인데 마음껏 즐겨보자. 인생을 엔죠이 하자,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쾌락주의의 사상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동물적인 삶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어요.
이 사상이 바로 아프로디테의 신전에서의 매음을 가능케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쾌락이 그들의 목표였기에 당연히 부활은 받아들여지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부활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요.
또 다른 학파인 스토아 학파는 이와는 전적으로 반대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금욕주의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이원론입니다. 둘로 분명하게 나눈다는 것이죠. 영혼과 육체를 나눕니다. 그리고 영혼불멸설을 주장합니다. 육체는 없어진다. 육체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직 영혼만이 가치있다. 영혼만이 불멸한 것이다. 몸에 대한, 육체에 대한 의미를 극소화 시켰습니다.
물론 이들은 진지하게 죽음을 사색했습니다만, 그러나 육체에 대한 의미를 극소화함으로써 몸의 부활 자체를 부정하였던 것입니다. 육체가 없는 영혼의 불멸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부활이 아니지요. 기독교 역시 영혼 불멸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영혼 불멸은 육체가 없는 영혼 불멸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부활의 몸이란 새로운 육체를 포함하는 부활체를 의미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부활입니다. 그럼에도 스토아 학파는 육체없는 영혼불멸을 주장하였기에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 이처럼 당시 희랍세계에서의 두 철학사조의 영향으로 당시 고린도 교회 역시 부활을 부정하는 사상이 팽배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부활의 메시지를 외쳤을 때 희랍 사람들은 그 부활의 메시지를 부정하였고,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은 도대체 부활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부활이 사실이냐는 것이죠? 진짜냐? 는 것입니다.
몸이 다시 산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면 우리가 부활을 부정하고 부활을 부인할 때 도대체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부활을 부정하면 안 되는 지 그 이유에 대해서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합시다.
그 이유를 암으로써 우리의 부활신앙이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믿습니까?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한 목사님이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이 목사님께 이렇게 물었어요. “목사님 저는 예수님의 죽음은 얼마든지 믿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부활이 안 믿어져요. 예수님의 죽음만 믿고는 크리스천이 될 수가 없습니까?”
이 목사님이 뭐라고 대답했겠습니까? 물론 안됩니다. 그랬죠. 미안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만 믿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받아들이지만 몸이 다시 사신 것을 부정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답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활을 부인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 지 살펴봅시다.
13절을 보십시다.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첫째로,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장차 우리의 몸도 부활할 것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부정하게 되면 이와 같은 모든 사실들을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부정하게 되면 둘째로,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헛것이다는 말이죠.
14절을 보십시다.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결과적으로 우리 믿음도 헛것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헛것이라는 희랍어 캐논은 무의미한, 근거가 없는, 진실이 결여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의 어원은 사실 쓰레기, 휴지조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을 부정하는 그 믿음, 하나님의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그 믿음은 쓰레기와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부활이 없는 데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의미가 있고, 진실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부활을 부정함으로써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17절을 보십시다.
(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무의미한 것이요, 헛것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헛것인데 당연히 우리의 구원도 헛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헛것이라면 죄 가운데 그대로 버려져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음, 믿음 그러지만, 그 믿음이 다 가짜라면 구원도 가짜라는 결론입니다.
크리스천을 정의한다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누가 크리스천입니까? 교회 나가는 사람?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 노(No)! 아니에요. 교회 나오면서도 예수 안 믿는 사람 너무너무 많습니다. 속지마세요.
교회 나온다고 다 구원받습니까?
롬 10:(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부정하면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다는 그 부활의 사실을 믿을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부활을 부인하게 되면 결국 모든 사람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이야기죠.
19절을 보십시다.
(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까?
구원이 없으니, 다시 말하면 영원한 생명이 없으니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다만 이생뿐입니다. 그러니 쾌락주의자들처럼 인생의 목표가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썩어질 몸 실컷 즐기자. 그러나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펄펄 끓는 지옥불입니다.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니 불쌍한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우리의 부활이기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으셨을 뿐 아니라 그는 우리가 새로운 생명 안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임재하심을 체험하며 날마다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부활 하셨습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복음의 절대적인 요소요, 또 우리 믿음의 핵심입니다. 이 부활이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부활신앙을 회복합시다.
기도합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곧 우리의 부활이요, 영원한 생명으로의 보증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서 확고한 부활신앙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부활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헛것과 같은 믿음생활이 아니라 부활신앙을 회복하고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새로운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교회 나온다고 다 구원받습니까?
롬 10:(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부정하면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다는 그 부활의 사실을 믿을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부활을 부인하게 되면 결국 모든 사람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이야기죠.
19절을 보십시다.
(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까?
구원이 없으니, 다시 말하면 영원한 생명이 없으니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다만 이생뿐입니다. 그러니 쾌락주의자들처럼 인생의 목표가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썩어질 몸 실컷 즐기자. 그러나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펄펄 끓는 지옥불입니다.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니 불쌍한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우리의 부활이기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으셨을 뿐 아니라 그는 우리가 새로운 생명 안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임재하심을 체험하며 날마다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부활 하셨습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복음의 절대적인 요소요, 또 우리 믿음의 핵심입니다. 이 부활이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부활신앙을 회복합시다.
기도합시다.
- \\
23절의 약속 다시 읽어보세요. 23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ꡒ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ꡓ 부활의 순서, 우선 아담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뭐예요 이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오신다. 다시 오실 때 우리도 뭐예요 우리도 부활한다. 우리도 부활한다. 누가 부활합니까? 23절에 보시면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어떤 사람이 부활 한다구요? 그에게 붙은 자. 저는 여기 크리스천에 대한, 저가 제일 좋아하는 정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 크리스천이 누가 크리스천이냐? 교회 나가는 사람? 노(No)! 아니예요. 교회 나오면서도 예수 안 믿는 사람 너무너무 많아요. 난 안속아요. 교회 나온다고 다 예수 믿는다고 안속아요. 크리스천의 정의, 그리스도인의 정의 뭘까요? 다같이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ꡓ 네, 예수에게 붙어 있는 자. 여러분 예수에게 붙어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에게 붙어 있어니까 주님이 와! ~ 그러면 딸려가고 올라갈 거 아니예요 예수님이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니까, 주님 강림하실 때 다시 일어나요. 우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되어 주님과 함께 저 영원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저 영원의 기업을 누리기 위해서 주와 함께 설 줄로 믿습니다. 이게 부활의 순서예요.
그 다음 29절부터34절까지 부활의 근거, 우리가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근거, 바울은 세 가지 근거를 둡니다,
첫째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좀 어려운 말이죠?
이건 기독교 사상이 아니예요. 이교 사상 가운데 그 당시, 그 당시에 다른 종교를 믿고있는 사람들 가운데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게 정당하다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예요 바울이. 정당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왜 받느냐하면 죽은 사람을 위해 대신 받으면 죽은 사람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라는 소망 때문에, 그러면 너희가 죽은 다음에 어떤 소망이 없다면 왜 세례를 받느냐? 다른 사람들이 하는 습관을 가지고 바울은 까꾸로, 죽은 다음에 어떤 가능성을 여기서 증명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이런 얘기예요. 우리가 천국을 증명하기 위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전도할 수가 있습니다.
여보세요 우리한국에 옛날 아, 대대로 우리주변에 어떤 분이, 어른신네가 돌아가시면 우리가 어떻게 말합니까? 돌아가셨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돌아가실 곳이 없으면 왜 우리가 돌아가셨다고 말하겠어요? 돌아가실 곳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가 전도를 할 수가 있어요 없어요 있죠? 바울이 그런 비슷한 논리를 펴는 거죠. 죽은 사람을 위해서 대신 세례를 받는 것이 정당한 교리다 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예요. 잘못된 교리지만 잘못된 교리를 신성시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그러나 죽음 다음에 뭐가 없다면 사람들이 왜 저런 일을 하겠느냐 이 말이예요. 저런 일을 하겠느냐? . 그 다음을 보시면 더 알 수가 있습니다.
부활의 둘째 근거. 성도의 고난. 우리들이 전도 하다가 고난을 받는 이유. 그 왜 고난을 받느냐? 30절 같이 읽겠습니다. 30절 다같이 시작,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ꡓ 여기 인칭 대명사를 주의해 보셔야 돼요. 뭐냐하면 음~ 29절에는 저들이 나와요. 자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ꡐ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저들이 세례를 받느냐ꡑ 저들에 대한 얘기, 이건 우리에 대한 얘기가 아네요. 크리스천에 대한 얘기가 아니죠? 그러나 여기 30절에 보면은 또 어찌하여 우리가, 이번에는 우리 성도들 얘기예요. ꡐ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ꡑ 우리가 목숨을 걸고 전도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죽는 것을 겁내지 않고 담대하게 크리스천들이 전도하다가 순교를 당하는 일 왜 그럴까요? 그게 끝이 아니기 때문에, 부활을 믿기 때문에 그 얘기예요. 그래서 우리가 부활을 믿는 또 하나의 근거, 이것은 무얼 보면 알 수가 있느냐, 왜냐하면 목숨을 걸고 전도하고 있는 사람들, 이것은 죽음 건너편에 부활의 확실한 사실을 우리가 소망하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네,
그 다음에 부활의 또 하나의 근거는 뭐냐하면 거룩한 삶의 죽음, 거룩한 삶의 죽음, 32절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 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ꡓ
여러분 부활의 소망이 없고 내세에 소망이 없다면 뭐예요? 이 세상이 전부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이 짧은 세상 끝나기 전에 뭐예요? ‘노세, 노세, 젊어 노세ꡑ ’부어라 마셔라ꡑ 하~ 네, 먹고 마시고 즐기자. 뭐, 그것이 우리 인생관의 전부가 될 수밖에 없어요. 만약 부활이 없다면, 만약 내세가 없다면, 그러나 그 다음절에는 “속지 말라 이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짖지 말라ꡓ 우리가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이유, 그것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상급 주심과 우리를 기다리고있는 영원한 나라를 우리가 소망하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활을 믿는 근거란 말이예요.
자 그 다음에 부활의 특성.*
35절부터 49절까지 부활의 특성. 지금 저가 초 급행열차로 지금 달려갑니다.
네, 한 열 달 할 것을 몇 분 동안 요약하는 거예요. 35절부터 49절까지 부활의 특성, 부활의 몸은 어떤 특성이 있느냐, 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소유하고있는 몸과 부활 때 가지게 될 몸 사이에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고 생각해요. 공통점, 알아볼 수 있어요. 뭘 보면 알 수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알아봤어요. 조금 달랐지만 알아봤어요. 너무 빛나고 아름다운 모습이어서 헛갈리고 착각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알아볼 수 있었어요. 저는 우리가 천국 가서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아볼 수 없다면 무슨 재미예요? 응? 서로 알아봐야지, 저도 여러분을 알아보고, 그러나 그 때는 주름살도 걱정할 필요가 없고 흰머리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우리 인생의 최정상의 모습으로 최절정의 모습으로 만날 줄로 믿습니다. 저는 공통점도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차이가 더 많다고 생각을 합니다. 차이가 더 많을 거예요. 그러나 그것을 바울이 어떻게 비유를 했느냐하면 씨앗과 열매로 비교했어요. 씨앗과 열매, 3십 여기6절에 보시면 ꡒ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ꡓ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 씨앗에게 형체를 주신다. 씨앗과 열매, 공통점도 있어요 없어요? 있긴 있어요. 어떤 생명의 본질성에 있어 공통점이 있어요. 그러나 같습니까 다릅니까? 굉장히 달라요. 우리가 뿌린 건 씨앗 하나예요. 그러나 나중에 뭐예요? 엄청난 열매를 보세요. 엄청난 열매. 굉장히 다른 모습이예요. 어떻게 다르느냐? 부활의 몸이 어떻게 다를 것이냐, 그 정수를 바울은 이렇게 요약을 합니다. 어떻게 다를 것인가?
42절부터 보시면 42절 자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ꡓ
그러니까 이 땅의 몸과 부활의 몸의 차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은 뭐예요? 썩을 몸! 옆에 있는 사람 째려보세요. 그리고 폼 잡아도 썩을 몸 이예요 한 마디 해봅시다. 시작, ‘폼 잡아도 썩을 몸 이예요ꡑ 그러나 그때에는 어떤 몸을 입을까요? 그 때는, 썩지 아니할 몸! 썩지 아니할 몸, 옆에 사람에게 썩지 아니할 몸 궁금하네요 한 번 해보세요. 시작,
’썩지 아니할 몸 궁금하네요ꡑ 하하~ 네,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을 입는다고 했어요. 그 다음에 보시면 욕된 몸이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그러니 욕된 몸, 어떤, 우리 몸에는 부끄러움을 느껴요. 그렇지 않아요? 이상하게, 우리 몸에 대해서 어떤 자부심도 있지만 또 부끄러워하고, 벗지도 못하고, 어떤 부끄러움이 있어요 부끄러움이 있어요. 그러나 그 때 우리가 가질 몸은 아주 영광스럽다. 부끄러움의 요소가 하나도 없다. 어떤 죄 때문에, 죄성 때문에 어떤 부끄러움이 개제되어 있지만, 그때 그 몸은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이다. 그 다음에 또 약한 것이 강한 몸, 그러니 얼마나 약해요. 그냥 감기 한 번 돌아다니니까 캑캑거리고 그냥, 얼마나 약한 몸 이예요. 그러나 그때 우리는 강한 몸. 여러분 기대 하십니까? 또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 육의 몸이지만 그때 우리는 신령한 몸. 어떻게 다른가? 나도 몰라요. 어쨌든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이라고 그랬어요. 흙에 속한 몸, 49절에 보면은 하늘에 속한 몸.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은 흙에 속한 몸 이예요. 그 때 우리가 가질 몸은 하늘에 속한 몸. 어떻게 다를까요? 그건 나도 몰라요. 어쨌든 굉장히 다르다! 굉장히 다르다. 같은 것도 있지만 굉장히 다르다. 한 번 따라서 하세요. ꡐ같은 것도 있지만 굉장히 다르다ꡑ 네, 옆에 사람보고 ꡐ어떻게 다를까요?ꡑ 한 번 상상 해보세요. 어떻게 다른 몸으로 만날까? 어떻게 다른 몸으로 우리가 만날 것인가? 부활체의 특성,
마지막 50절에서 58절까지 부활의 소망, 부활의 소망 두 가지 입니다. 미래의 소망,5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52절 다같이 시작,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ꡓ 나팔이 막 울려 펴지면 우리가 일어나요. 죽은 자리에서 다 일어나게 되요. 광야의 나팔은 전쟁을 위해서 예비하는 나팔이 제일 중요한 용도였어요.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 나팔은 축제의 나팔, 나팔이 울려 펴지면 뭐했어요 축제를 시작해요. 저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불어지는 나팔, 그것은 축제의 시작이다. 우리가 새로운 몸을 입고 주님과 영원을 즐기기 위한 나팔소리와 함께 우리는 다시 살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찬양을 불러요. 그 찬양의 제목가운데 하나가 뭐냐하면 죽음을 이긴 찬양이예요. 죽음을 이긴 찬양. 그 찬양이 뭐냐하면 55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ꡓ 사망아 니가 나를 잡아먹었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놀랬지? 내가 지금 부활했다.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 이기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사망을 이긴 영원한 승리자로 부활의 찬미를 부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미래의 소망이예요.
그러나 부활은 미래의 소망만 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소망을 줍니다. 현재의 소망은 무얼까요 58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58절 다같이 시작,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ꡓ
아멘~ 아멘, 그 부활의 소망이 확실하기 때문에 뭐예요? 지금 우리가 주를 위해서 흘리는 땀, 우리가 바쳐진 수고, 드려진 봉사의 모든 수고, 그것은 하나도 헛되지 아니하고 그 앞에 영광스러운 상급으로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ꡑ이것이 지금 여기서 또한 누릴 수 있는 우리의 소망인줄로 믿습니다. 이 부활의 소망을 주기 위해서 2000년 전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네, 오늘 얼마나 수지 맞았어요. 부활 뛰었습니다. 옆에 사람보고 ‘부활 뛰었습니다ꡑ
기도하겠습니다. 자 우리 조용히 기도하시면서 하나님 감사해요. 부활의 소망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다같이 조용히 주 앞에 찬양하십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부활의 소망을 주신 내 사랑하는 주님을 높여 드립니다. 찬양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지 아니 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이 찬미를 부를 수가 있었을까요 죄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영원한 나라의 소망, 소망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찬양을 받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감사합니다 성탄의 씨즌 오늘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다시 한번 확인 했습니다. 주님 주께서 부활 하셨기 때문에 주님께 붙어 있는 자로 그 부활의 소망이 나의 소망이 된 것을 인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세상이 어둡고 세상이 비바람이 요란하다고 할찌라도 그리고 우리를 꺾어 버리는 죽음의 세력이 우리를 낮추고 우리를 좌절시키고 우리를 실망시킨다 할찌라도 하나님 우린 실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고 승리로운 걸음을 옮겨 갈 것입니다. 육체의 병이 있어도 우리는 부활의 소망으로 승리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 소망 중에 승리하는 당신의 백성들 되게 해 주시옵소서
아름다운 성탄의 씨즌, 우리가 여러 가지로 복잡한 생각들이 또 삶에서 우리가 지고 가야할 짐이 무겁고 또 우리 마음속에 단순하지 않는 여러 가지 삶의 무게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지만 우리의 어린 시절 우리가 기다려 왔든, 성탄의 그 순전한 낭만과 기쁨.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든 그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운 로맨스, 주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그 구원의 기쁨을 주시고 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주셨기에 우리 그리스도인 들만이 부를 수 있는 아름다움의 노래 그 찬양 속에서 내게 내 삶에 주인 되어주신, 구주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고, 감격케 하고, 감사하며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또 주를 찬양하면서 새로운 천년의 꿈을 꾸는 귀한 우리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시기를, 이날도 수요 모임으로 모여 주 앞에 경배 드리고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고 말씀을 받고, 부활의 소망을 확인하며 우리 사랑하는 이웃들을 우리의 사랑으로 함께 끌어안기 위해서 귀한 헌금을 주 앞에 드리고 나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의 축복이 이날도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복하옵나이다. 아멘